[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4) 청연학살

17:30

<앞선 연재>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 섣달그믐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2) 잠과 밥 / 설날 / 정월 초이틀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3) 피난

▲”대부분이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 기관총과 M1 총구가 주민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따다닷! 탕탕탕! 총구에서 뿜어내는 폭음은 고막을 찢을 듯이 지축을 흔들었다.”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사진=피카소 미술관)

■ 청연학살(1951년 2월 9일, 음력 1월 4일)
밤새도록 눈이 소복이 내렸다
먼동이 트자 눈을 치우는 써레질 소리로 마을이 부산해졌다
하늘은 먹구름에 가려져 목화솜 같은 눈송이를 하염없이 뿌렸다
몹시 추웠다
먹다 남은 떡국이 불어서 곤죽이 되었는데
다시 데워져 아침 끼니로 나왔다
작은형과 나는 찬밥에 김치였다
식사가 끝나니 어머니 친구와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시고
봉초담배를 담뱃대에 담아 나눠 피우셨다
햇살이 올라오면 떠나야 하는데
해는 영영 떠오를 것 같지 않았다
나서야하는데 눈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다
마을의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댔다
명절 때라서 외지에서 온 낯선 이들 때문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별안간 마을 앞에서 벼락 치는 총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었다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마을 앞 논들로 끌어냈다
대부분이 초가삼간인 농가들은 흰 눈을 머리에 잔뜩 이고도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무섭게 타올랐다
집주인들은 대대로 살아온 전 재산이 잿더미가 되는 것을
핏발이 선 눈으로 지켜보았다
울부짖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지옥이 따로 없었다
살려달라고 군인에게 매달려 빌어도
돌아오는 것은 무자비한 개머리판이었다
어머니 친구 분의 남편인 아저씨도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를 철철 흘렸다
총소리와 개 짖는 소리
군인들의 고함소리로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주민들은 옷도 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눈길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군인들은 사정없이 발길로 차고 때리며
주민들을 논들로 내몰았다
마을은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주민들은 속수무책, 눈이 덮인 논들로 짐승처럼 끌려 나왔다
군인들은 박 씨들 무덤가 위로 죽 늘어섰다
총부리는 논바닥에 서있는 주민들을 향했다
그중에 계급이 높은 군인은 불을 피워놓고
하늘에다 탕, 탕, 총질을 해댔다

나는 발이 너무 시려 사람들이 몰려있는 논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발만 감싸고 있었다
총소리가 멈추더니 군인가족이나 경찰가족이 있으면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군인들의 짐을 지고 갈 장정들과 가족들도 나오라고 했다
어머니 친구 분의 남편인 아저씨는 가족을 데리고 짐꾼으로 나갔다
어머니도 뒤따라 나가며 같은 가족으로 행세하려다
관계를 물을 때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무지막지한 군홧발에 차여 되돌아왔다
그때 같은 가족이라고 그분들이 도와주었더라면
우리의 운명이 많이 바뀌었을 텐데
깜빡하는 사이에 운명은 그들과 우리를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았다

더욱더 안타까운 일은
군인들이 내동으로 올 때 내동 짐꾼들 속에
아버지가 계셨다는 것인데
외가로 보낸 우리들이 그곳에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니까 무섭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우리를 한번 찾아보시지, 하는
안타까움이 사무쳤다
청연마을 어느 아주머니는 짐꾼으로 나간 남편 뒤를 따르다가
걸음이 느리다고 개머리판에 가슴을 맞아
평생을 피멍이 든 가슴앓이의 고통을 겪으며 살았다
군경가족과 짐꾼가족이 빠져나가니
대부분이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
기관총과 M1 총구가 주민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따다닷! 탕탕탕!
총구에서 뿜어내는 폭음은
고막을 찢을 듯이 지축을 흔들었다
따다닷! 탕탕탕!
사람들의 살결이 터져
핏물이 바가지로 퍼붓듯 머리 위로 쏟아졌다
폭풍에 고목나무가 넘어가듯
사람들이 내 위로 우수수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들 속에 끼여서 숨통이 막힌다
나는 죽을 것 같다
온힘을 다해 머리만 간신히 밖으로 내밀어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들 몸에서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비린 피 냄새가 역겨웠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의 몸에 눌린 나는
죽은 시신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온 힘을 다해 발악을 해도 죽은 자는 꼼짝도 안 했다
논바닥에 깔린 하얀 눈은 어느새 붉은 피로 흥건하게 물들었다
몸은 점점 감각을 잃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쓰러졌는데도 총알은 계속 날아왔다
왼쪽 옆구리가 화롯불에 달군 인두가 스쳐가듯 뜨끔했다
총알이 스쳤다는 것을 외갓집에 가서 씻을 때
살 껍질이 벗겨진 것을 보고 알았다

총소리가 멈춘 것 같아서 살며시 고개를 들어
군인들이 있는 곳을 쳐다보는 순간
기관총을 쏘는 군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유난히 똥그랬다
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는데
따다다닷!
기관총이 나를 향해 불을 뿜었다
머리에 큰 돌이 날아와 때리는 것 같은 충격이 왔다
피가 쫘르르 얼굴로 쏟아졌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땅속 깊이 한없이 빠져 들어갔다
이젠 죽어서 고통 없는 저승으로 가는가
그런데 어제 이곳까지 끌려온 기억이 생생하다
몸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고
너무 고통스러워 이제 죽는가 싶어서 슬픔이 북받친다
총알 두 개가 왼쪽 갈빗살과 머리를 스쳤다
사람들이 쓰러졌는데도 계속 총질을 해댔다
피에 굶주린 광란자들이었다

눈을 감았다
죽기만 기다려도 죽지 않고 정신은 더욱 또렷하다
군인들이 가기만 기다렸다
무슨 원한이 그리도 많아
빨갱이와 싸워야할 총알을 동네 사람들한테 쏟아붓는가
도대체 국군이 왜 사람을 죽이는지 알 수 없었다
죽은척하고 있어야 살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군인들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후 총소리가 뜸한 것 같아 고개를 들어
군인들이 있는 곳을 살펴보니
불 옆에 대여섯 명이 있고
군인들의 긴 대열은 남상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군인 대열 가운데 한 군인이
M1 소총으로 나를 조준해서 쏘는 것 같았다
그 총알은 죽은 사람들 속에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내 옆의 한 어린 아이를 맞췄다
퍽, 머리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는 눈을 뜨고 죽었다

군인들의 긴 대열은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한참 후 불 옆에 있던 군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다 간줄 알고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는데
탕! 탕!
군인들이 처참한 시체 주위를 돌면서 가끔 총을 쏘아댔다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죽이는 확인사살이었다
한참을 죽은척하고 있다가
실눈을 뜨고 보니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끔찍한 짓을 군인이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눈 위를 기어 다녔다
군홧발이 축구공처럼 아이를 시체더미 속으로 차 넣었다
그리고 피 묻은 군화를 눈에 문질러 닦았다

군인도 제복을 벗으면 똑같은 사람일 텐데
어찌 이리도 잔인할까
그들은 인육을 먹는 악마일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무지막지한 군홧발로
고사리 같은 아기를 공처럼 찰 수 있을까

몸은 저리다 못해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움직이면 들킬 것 같고 눈을 감고 있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숨어 있을까봐 한참을 기다려도 조용했다
몸을 뒤틀었다
있는 힘을 다했지만 시체들을 빠져나오지 못하겠다
그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다시 옆으로 꼬꾸라졌다
내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고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좌우로 조금씩 빠져 나오려는데 짚신이 벗겨진다
설이라고 아버지가 특별히 삼아주신 신이다
잃어버렸다고 하면 화를 낼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
발에 걸고 빼내려고 했지만
시체를 사이에서 몸도 빼내기 어려운데
짚신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신을 포기하고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왔다
살을 찢는 추위인데도 땀이 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어머니를 찾아야한다
오매! 오매! 울며불며 시체들을 헤집고 엄마를 찾아 헤맸다
기관총 앞에 낯익은 처네(어린아이를 업을 때 두르는 끈이 달린 작은 포대기)가 보였다
하얀 눈, 아, 하얀 눈 위에
어머니가 피투성이로 누워있다
무심한 까마귀들은 어디서 피비린내를 맡고 날아왔는지
이리저리 날뛰며 시체들의 살점을 쪼아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