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6)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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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연재>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 섣달그믐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2) 잠과 밥 / 설날 / 정월 초이틀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3) 피난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4) 청연학살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5)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①

■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②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아,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다
등이 시리다
하늘엔 별이 반짝였다
나는 내동 마을 뒤 천수답 고랑에 처박혀 있다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띵하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논에 있는 흙을 끌어다가 상처에 발랐다
피는 멎지 않고 따갑기만 했다
엉금엉금 기어서 고랑의 얼음을 깼다
얼음이 별빛에 반짝였다
반짝이는 별빛이 어머니의 눈물 같다
손과 얼굴을 대강 씻었다
손가락이 빠질 듯 손이 시렸다
지금 나는 청연의 산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조차 잃어버렸다
군인들도 마을 아저씨들도 없다
집으로 갈까, 지금쯤 아버지는 와계실까,
춥다, 너무 춥다,
마을로 들어가면 군인들한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작정 마을로 들어와 동청(마을회관) 앞까지 왔다
군인들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동청에서 내동 우리 집과
청동 사는 작은 고모님 집과의 거리가 비슷하여
아버지를 만나면 청연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야 될 것 같아
고모님 집으로 갔다
고모님 대문에는 군인이 한 명 서있었다
웬 놈이냐고 물을까 봐 주춤했지만 군인은 말이 없었다
마루로 올라가서 방문을 여는 순간
더운 열기와 소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댓 명의 군인이 저녁식사를 막 끝내고 쉬고 있었고
방 가운데 밝혀놓은 석유 등잔불은 심지가 너무 솟아
그을음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별안간 꼬마가 나타나 방구석에 털썩, 주저앉으니
군인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고양이가 생쥐를 다루듯이 요리조리 살폈다
“너, 어디서 왔어?”
“여기가 고모님 집이라요.”
묻는 말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야 할 것 같았다
“밤에 왜 왔나?”
“아버지가 아침에 아저씨들 짐 지고 갔는데, 오시지 않아서 고모님이 계신 줄 알고 왔어요.”
“너희 식구들은 다 어디 가고?”
“아무도 없어요.”
“어머니는 있을 것 아니냐?”
“죽었어요.”
“누나는 어디 가고?”
“없어요.”
“이모는?”
“없어요.”
“형들은 있을 것 아니냐?”“없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셋이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어제 군인 아저씨들 짐 지러 갔고 어머니는 3년 전에 아파서 죽었어요.”
셋이서 살다가 아버지와 둘이 산다고 했는데도 “누나와 이모는 집에 있지, 어디 갔지?”
없다고 해도 자꾸 묻는다
아까 총소리 들었냐고 하기에
모른다고 했더니
벽에 세워놓은 총을 들어 보이며
거짓말하면 쏘아 죽이겠다는 시늉을 했다
아버지가 국군 짐 지고 갔다 해도 빨갱이 짐 지고 갔냐고 묻고
형은 없다고 했는데 빨갱이냐고 묻고
누나는 빨갱이 밥해주러 갔냐고 물었다
혹시나 딴 소리가 나올까 유도를 해도
대답이 똑같으니 고놈 똑똑하단다
머리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처음에는 어두침침해서 모르다가 정색을 하며
왜 피가 나느냐고 묻는다
오다가 담벼락에 부딪혔다니까
불쌍해보였는지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안 먹었다고 하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소고깃국에 김치를 내놓으며 먹으라고 했다
밥 냄새가 너무나 고소하여 한 숟갈 입에 넣었는데
목구멍이 받아주지를 않아서 멍하게 바라만보고 있으니
먹으라고 재촉을 하였다
소고깃국을 못 먹는다고 하니
건빵 한 봉지를 건네주었다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서
집에 가서 아버지께 보이고 먹어야 한다니까
악마 같은 자들도 부모 생각이 나는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총을 쏘았고 화약 냄새가 났는데 / 여기가 저승일까 / 내 뺨을 만져보았다 / 살아있는 건 분명하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생존자 김운섭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장이 합동묘역 알림글을 살펴보고 있다. . (사진=김성경 제공)

잠시 후 그들은 코를 골았고
나는 벽에 기대어 깜빡 졸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다
“야, 임마!”
내 잠꼬대가 심했는지 깜짝 놀라며 군인들이 깨었다
그때부터 나는 자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림자 길게 흔들리는 석유등잔불만 바라보며
‘심지를 낮추면 기름이 덜 들 텐데.’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였다
기름을 아끼려고 불을 잘 켜지 않던 어른들 생각이 났다
따뜻한 방이어서 잠이 쏟아졌다
자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새우잠이 들었다
잠결에서도 밥 냄새와 쇠고깃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느새 날이 샜는지 군인들이 식사를 끝내고 마당으로 나갔다
밖은 캄캄한데 마당 가득 군인들이 모여들었다
아버지가 혹시 군인들 짐꾼 속에 있을까 밖으로 나오니
어젯밤에 끈질기게 물어보던 군인이 방에 있다가 나중에 가라고 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맨발로 마당에 내려섰다
얼음을 밟는 것처럼 차가와 마루로 다시 뛰어올랐다
마루 밑을 뒤지더니 어른이 신던 헌 짚신을 꺼내주었다
군인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서 집으로 왔다
짚신이 있어 다행이었다

어둠이 묽어질 무렵 대문을 들어섰다
보초병이 서있는데도 무조건 마당으로 들어갔다
별안간 군홧발이 엉덩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나는 마당 가운데로 엎어졌다
짚신과 건빵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엉덩이가 아파서 쩔쩔매고 있는데
총구로 머리를 쿡쿡 찌르며
“이거 빨갱이 새끼 아냐?”
방에 있는 군인이 오라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엉금엉금 기어서 건빵을 집어 들고
마루로 올라 방문을 잡고 섰다

“어린놈이 어찌 이렇게 일찍 왔나?”
“여기가 우리 집이라요.”
“가족들은 다 어디 가고 너 혼자 어디 갔다가 와. 임마.”
“아버지가 어제 아침에 아저씨들 짐 지고 가서 오시지 않아서 고모님 집에 있다가 와요.”
“니 어머니는 어디 가고?”
“죽었어요.”
“누나는? 형은? 고모는? 이모는?”
“없어요.”
“아버지, 어머니, 나 셋이 살았는데 어머니는 삼 년 전에 죽었고 아버지와 둘이 살아요.”
나 보고 저 새끼 수상한 놈이라고 했다
방에 있는 여자 옷은 누구 옷이며
굴속에 있는 떡과 유과는 누가 만든 것이냐고 다그쳤다
‘이제 죽었구나.’
고모님 집에서 군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져본 것 같다
집 뒤란에는 저장용 땅굴을 10미터 정도 파서
설에 만든 떡과 유과 등을 넣어두었는데,
굴속의 떡은 이웃집에서 갖다 놓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어머니 옷은 추울 때 내가 입는다 했다
믿으려 하지 않고 수상하게 보았다
건빵을 보여주며 군인아저씨가 준 것이라 해도 믿지 않았다
문초는 살벌했다
군인들이 너무 난폭하게 족치니
군인들 밥을 해주러 잡혀온 오례마을에 사는 당고모님(5촌 고모)이 아는 체 하지 말라며 부엌에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모른척하고 서있을 때
대문에 서있던 보초가 출발이라고 외쳤다
“쏴버리고 가자.”
“철커덩, 탕!”
화약 냄새가 얼굴을 확, 스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루 천장에 붙은 파리똥이 희미하게 보였다
기절을 한 것이다
저승의 문턱을 네 번이나 갔다가 오는 순간이었다
일어나 앉아 총알이 몸 어디를 뚫고 지나갔는지
찾아보아도 피가 나는 곳이 없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분명히 총을 쏘았고 화약 냄새가 났는데
여기가 저승일까
내 뺨을 만져보았다
살아있는 건 분명하다
너무 추웠다
마당에 내동댕이쳐있는 건빵을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따스했다
아랫목은 뜨거워 발을 댈 수도 없었다
건빵을 뜯어먹을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아버지와 같이 먹기 위해 살강에 올려놓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잠이 들었다
눈을 감으면 자꾸 죽는 꿈을 꾸어서 깊이 잠들지 못했다
차라리 죽으면 편할 텐데,
이리 많은 고통을 겪느니 죽는 게 나을 텐테,
하지만 죽는 것이 겁이 난다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 저 눈이 작은형과 나와 여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먹는 흰 쌀밥이었으면,
배가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