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8) 외갓집 / 봄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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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연재>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 섣달그믐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2) 잠과 밥 / 설날 / 정월 초이틀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3) 피난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4) 청연학살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5)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①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6)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②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7) 다섯 번째 저승 문턱

■ 외갓집
고종사촌 형수씨의 모습이 저 멀리 사라졌다
신작로에서 20여 미터 되는 외가 마당에 멍하게 서있었다
추위 탓인지 난리 탓인지 거리에도 인적이 끊어졌고
외갓집 식구들도 문을 꼭꼭 닫고 있었다
누구를 찾을 기력도 없어
마당 가운데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외숙모가 물 사발을 들고 부엌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외숙모는 밥을 빌러 온 거지인 줄 아시고
요새는 시도 때도 없이 온다며 타박을 하셨다
“외숙모님!”하고 불렀다
외숙모님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아니, 네가 운섭이 아니냐. 아이고, 이 사람들아, 운섭이가 왔다.”
방안에 모여앉아 우리 걱정을 하시던 외갓집 식구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아버지도 거기에 계셨다
기진맥진한 나를 아버지가 안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피투성이가 된 내가 나타자자
외갓집은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버지 품에 안겨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바탕 오열을 토해내고
나는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와 외삼촌 두 분은 논들에 방치되어 있는
세 식구의 시신 처리를 의논하셨다
하늘이 돕지 않았더라면 어찌 살아났을까
외숙모가 물을 데워주셨고
눈물을 흘리시며 피범벅이 된 옷을 벗기고 씻겨주셨다

정신이 들자 총알과 개머리판에 맞은 상처 때문에
머리가 무척이나 따갑고 아팠다
총알이 옆구리를 스친 상처도 아팠다
발도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큰외삼촌은 총알이 조금만 더 깊게 스쳤더라면
살지 못했을 거라고 좋은 운을 타고난 아이라고 기뻐하셨다
요즘 같았으면 버렸어야할
피 묻은 옷을 다시 입히려고
외숙모님이 무촌 천변에서 빨래를 했는데
냇물이 핏빛으로 붉게 변하더라며 끔찍해하셨다
그때부터 외갓집에 살았는데
외할머니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셨다
외사촌은 남자 둘, 여자 셋이었다
그들과는 가끔 다투었는데
내 편은 외할머니뿐이었다

청연 마을 논들에 방치되어있는
어머니와 작은형과 여동생의 시신을
아버지와 외삼촌 두 분과 큰형이 숨어 들어가서 찾아내었다
주변 산에 매장을 하고 군인들이 무서워 통곡도 하지 못했다
땅이 얼어 작은형과 여동생은 깊이 묻지 못해
훗날 여우가 파먹었다고 하였다
그해 정초부터 봄이 오는 삼사월까지는 무척이나 길었다
어머니가 있는 외사촌들이 부러웠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어머니와 작은형과 여동생이 그리울 때는
무촌 앞 신작로에 앉아 감악산 너머에 있는
아득한 집을 그리며 한없이 울었다

▲”어머니가 있는 외사촌들이 부러웠다 /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 어머니와 작은형과 여동생이 그리울 때는 / 무촌 앞 신작로에 앉아 감악산 너머에 있는 / 아득한 집을 그리며 한없이 울었다” (사진=pixabay)

■ 봄은 왔는데
혹독한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하였다
사는 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했다
나는 아버지와 집으로 왔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집은 그대로인데 아래채 방에는
우리 식구들의 양식이 들어있었고
마구간에는 소가 한 마리 있었다
하필이면 포탄이 아래채로 날아와서 잿더미가 되었다
집 뒤란의 굴속에 넣어두었던 떡국거리와 유과도
사방으로 흩어져있었다
이제는 어머니도 여동생도 작은형도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다
집에는 먹을거리도 하나도 없다
살아남은 세 식구의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큰집이 있는 청용마을로 아버지와 나는 거처를 옮겼다
큰형은 혼자 사는 둘째 고모 집에서 일을 해주며
밥을 얻어먹었다
어리광을 부릴 나이인데 나는 이때부터 풀이 죽어
남의 눈치만 보고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살아야했다

같은 또래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학교 들어갈 나이가 두 살이나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학교에 보내줄 생각이 없으셨다
좀 더 크면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서
먹고 살게 할 작정이었던 것 같다
난리에 지칠 대로 지쳐서 몸도 뼈와 살가죽만 남았다
약골로 태어나 일도 못하는데
남의 집 머슴을 가면 일에 치여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끓었다
산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데
내 마음은 엄동설한이다
사람들은 날 보고 천운을 타고났다는데
삶의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