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본]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 김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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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작전명 제5호 ‘견벽청야(堅壁淸野)’는 지리산 인근 빨치산 소탕작전명이다. 국군 11사단 9연대장 오익경 대령은 작전 지역 안의 이적행위자는 발견 즉시 처형하고, 빨치산에게 동조하거나 음식을 제공한 주민들도 적으로 간주하여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전쟁으로 시끄러웠던 바깥의 세상과는 달리 거창군 신원면은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1951년 2월 5일 제11사단 9연대 3대대장 25살의 한동석이 이끄는 병력이 신원면에 들이닥친다. 마을 주민들은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부녀자가 대부분이었다. 국군은 마을 곳곳을 수색했으나 빨치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대대는 2차 공격지인 산청으로 이동하게 된다. 연대장인 오익경 대령은 산청의 집결지에서 한동석 소령에게 질타를 한다. 그러자 한동석은 1951년 2월 9일 다시 부대를 이끌고 신원면 청연마을로 들어오게 된다.

첫째 날, 국군은 1951년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을 학살한다. 둘째 날, 1951년 2월 10일 신원면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을 학살한다. 셋째 날, 1951년 2월 11일 신원면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을 학살하고 집과 길거리 등 노지에서 18명의 주민을 학살하였다. 모두 719명의 양민들이 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14세 미만의 어린이가 359명, 60세 이상 노인들이 66명, 희생자의 58%가 어린이와 노약자였다. 남자 희생자가 327명, 여자 희생자가 392명이었다.

이 시는 거창군 신원면 내동 마을이 고향인 김운섭 선생이 청연골까지 피난을 하면서 겪은 수기, <억울한 죽음 뒤처리>를 바탕으로 쓴 서사시임을 밝힌다. 대부분의 문장은 원저자(原著者)의 기록이다. 오탈자와 비문 위주로 수정하고 원저자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열 살의 어린 소년이 1951년 2월 5일부터 11일까지 겪은 피어린 사연의 기록이다. 김운섭 선생은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 고문 등의 일을 맡아 거창학살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지난 2020년 1월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고인(故人)이 되셨다.

▲2018년 7월 김운섭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장(왼쪽)을 만난 김수상 시인이 인터뷰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성경 제공)

■ 섣달그믐
설음식 만드는 고소한 기름내가 온 마을에 진동했다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고 날씨는 을씨년스럽게 추웠다
1951년 2월 5일, 음력으로는 1950년 섣달그믐날
아침을 막 먹었는데 마을 청년이 숨이 넘어가듯 외치며 뛰어왔다
“청수골 소 새초(여물) 먹는다!”
위험을 알릴 때 쓰는 마을 사람들만 알아듣는 암호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청수골을 서서히 덮고 있었다
청수골로 군인들이 기러기 떼처럼 가물가물 몰려오고 있었다

지난여름부터 먼 데서 쿵쿵쿵 포성이 들리더니
난리가 났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터로 가는 군인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국군이었다
무장을 한 그들이 청수골에서 사천천을 건너
마을까지 오는데 순식간이었다
우리 집은 길가에 있었다
숨을 죽이며 문구멍으로 밖을 보았다
두 명의 군인이 총을 겨누며 살금살금 안방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야, 기겁을 하며 나는 문에서 물러나 이불 속으로 숨었다
주인을 찾는 기척도 없이 별안간 방문이 열렸다
탕! 탕!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폭발하는 소리였다
방안에는 어머니와 열네 살의 작은형과
세 살배기 젖먹이 여동생
그리고 열 살인 내가 새파랗게 질렸다
젖먹이 여동생은 기절을 했는데
군인들은 군홧발로 방 안으로 들어와 총으로 쿡쿡 찔러대며
난폭하게 우리를 밖으로 내몰았다

군인들은 우리를 동청(마을회관) 앞 논들로 끌어냈다
얼마나 무섭고 또 얼마나 추웠던지 이가 저절로 부딪혔다
지난가을에 벼 타작을 하고 쌓아놓은 논들의 짚단 옆에서
마을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군인들은 길에 죽 늘어서서 주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한 군인이 하늘에다 총을 쏘아댔다
한참을 미친 듯 쏘아대더니 주민들 앞에 나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끌려 나올 때부터 귀에서 윙, 소리가 났는데
귀가 멍멍해지더니 군인들이 떠드는 소리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을 지껄이기 시작하더니
동청 왼편 길옆 바위에 몸을 의지하고 앉아있는
김봉문(당시 45세) 아저씨 앞으로 다가가 뭐라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아저씨는 길바닥에 쓰러졌다
군인들은 다시 주민들 앞으로 돌아와 뭔가를 다그쳤다
말하지 않으면 총으로 모두 쏘아 죽일 것처럼 날뛰었다
카빈총을 미친 듯이 하늘을 향해 쏘아댔다

할머니가 두 손녀를 데리고 떨고 있었다
어린 손녀를 등에 업은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큰 손녀는 꽉 붙잡고 있었다
할머니가 손녀를 자꾸 떼놓으려 하자
손녀는 죽기 살기로 울며불며
할머니 치마를 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이것아 제발, 우리가 온 동민을 다 죽이게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가 광란을 부리는 군인 앞으로 불려 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할머니에게 군인이 무엇인가 물었다
이윽고 할머니가 대답하는 것 같았는데
“탕! 탕!”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업은 채 논바닥에 쓰러졌다
치맛자락을 잡은 할머니의 손녀가 비명을 질렀다
다시 “탕!”
손녀의 발가락이 파르르 떨리더니 미동도 없었다
논바닥에는 붉은 피가 썰물처럼 흘렀다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총에서 또 총알이 터져 나올까 봐
가족들끼리 끌어안고 눈을 감아버렸다
하늘도 새파랗게 질렸다
피를 말리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등에 업혀 기절했던 여동생이 깨어나 울려 했다
어머니는 젖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네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나갔다
군인은 독기서린 말로 계속 뭐라고 미친 듯이 외치더니
슬그머니 총을 내렸다
그러더니 마을 아래쪽으로 긴 대열을 이루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색이 되어있는 주민들은
망연자실 제자리에서 떨기만 했다
부대의 긴 꼬리가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을 때
죽을상이 되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린아이 둘과 어른 둘이 죽었다
임시방편으로 유족들이 시신을 가마니로 덮어놓았다
동네 개들이 밤새 짖었다
무서워서 아무도 대문 밖을 나갈 수 없었다

■ 잠과 밥
한 해의 운수를 알기 위해
접시에 들기름이나 아주까리기름을 담아
실이나 창호지를 꼬아 심지를 만들어
식구들 수대로 불을 밝힌다
불이 선명하게 밝으면
그해는 건강하고 운이 좋고
불이 흐릿하면 운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작은형의 불빛이 흐렸다

그믐밤에 잠을 자면 굼벵이가 되어
닭 모이가 된다는 어머니 말에
잠은 쏟아지는데 닭 모이가 되지 않으려고
접시불만 보다가 머리를 태우기도 했다
머리카락 타는 노린내가 방안을 채웠다
에라, 모르겠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이 들었다
밖에서는 일어나라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꿈결에도 들렸다
찬바람이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가 싶었는데
아버지의 신발짝이 날아온다
아버지가 늦잠을 자는 작은형과 나를 깨우는 방식이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아버지 말씀은 우리 집의 법이었다

아침에만 밥을 했다
보리와 무, 그리고 쌀 한 줌
솥 밑바닥에는 무를 썰어서 깔고
중간에는 보리, 그리고 다시 쌀 한 줌
그렇게 다섯 식구의 밥을 지었다
밥을 풀 때는
맨 위의 쌀과 보리는 잘 섞어서 아버지 밥으로 드리고
중간의 보리와 무를 섞으면 작은형과 내 밥이 되었다
마지막 솥바닥엔 무 누룽지가 남는데
물을 부어 끓여서 나무주걱으로 문지르면
숭늉이 되었다
아버지 몫으로 한 사발을 드리고
남는 것은 어머니가 드셨다
어머니는 동생에게 젖도 먹여야 하는데
멀건 숭늉으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어
불이 꺼진 아궁이 앞에 앉아
담배로 허기를 달래셨다

점심은 거의 건너 뛸 때가 많았고
저녁은 쌀 한 줌과 김치를 넣고 국시기(김치국밥)를 끓였는데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야
겨우 밥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작은형과 나는 한창 뛰어놀 나이인데
옷이 떨어진다고
애들과 어울려 놀지도 못하게 하였다

▲박산골 아이들 묘소.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아이들로 분류한 후에 화장해서 묘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김성경 제공)

■ 설날
전쟁이 나고 사람이 죽어도 밤은 오고 새벽은 다시 밝았다
1951년 2월 6일(음력 1월 1일) 설날,
새해 아침 낯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버지께 세배를 하고 큰집으로 차례를 지내러 간다
증조부께서 슬하에 할아버지 두 분을 두셨는데
청용마을에 큰집이 있고 내동에는 작은집이 있다
큰집부터 먼저 가야하는데 가마니로 덮어놓은
시체 옆을 지나가려니 너무나 무서웠다
죽은 시체가 손을 내밀어 발목을 끌어당길 것 같았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꼭 잡았다
그곳을 지나서 반시간
큰집으로 가는 길은 그래도 행복했다

큰아버지께 세배하고 나오니 대청마루 차례상에는
산해진미로 가득하다
큰집은 종갓집인데
주변마을의 모든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차례를 지낸다
덕담을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시국이 워낙 불안하다며 모두가 걱정을 했다
어제 내동에서 군인들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피난을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의논을 돌렸으나 어른들은 결론을 내지 못했다

어른들의 걱정과는 상관없이 애들은 먹는데 정신이 팔렸다
먹을 게 부족한 시절이니 항상 배를 채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설이나 추석이 되면 배탈이 나도록 먹는다
결국은 먹은 것이 살로 가지 못하고 변소만 들락거린다
저녁때가 되면 중병을 앓은 것 같이 눈이 쑥 들어간다
먼 데서 여우가 울었고
어디선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 정월 초이틀(2월 7일)
정월 초하루가 무사히 넘어갔다
이튿날은 마을 어른들께 세배도 하고
신혼의 부부들은 타지에 있는 처가로 인사를 갔다
거창군에서도 가장 산골인 신원면은
그믐날 군인들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한가로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큰집 식구와 우리 집 식구를 합하면 대식구다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어디로 피난을 가야할지 문제였다
짧은 겨울 해는 벌써 지고 또 밤이 찾아왔다

나는 배탈이 나서 어제부터 초죽음이 되었다
내가 밥을 먹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상은 물리어졌고
방에는 석유 등잔불이 밝혀졌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랫목 차지를 하고 누워
큰어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낯선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큰어머니가 등잔불을 끄셨다
캄캄해진 방에 수상한 사람이 관솔불을 들고 들어와
선반 위의 물건을 뒤졌다

방에는 큰어머니와 어머니,
사촌 누나 둘, 작은형, 나와 여동생이 있었다
우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제자리에 죽은 듯 엎드려있었다
괴한의 발길이 옆구리를 스칠 때에는
오금이 저려오고 죽을 듯 무서웠다
그 괴한이 기역자로 되어있는 선반을 뒤져서
무엇을 가져갔는지 모른다
그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별안간
앞산에서는 콩을 볶는 듯 총소리가 들렸다

신원면 청수리 청용마을 앞산을 ‘안산’이라고 불렀다
높지 않았지만 동서로 뻗은 산이었다
그 산 왼편 ‘도독골’ 상공으로
벌건 불덩어리가 수없이 날아다니며 폭음을 냈다
나는 큰집의 대청마루 기둥에 숨어서
겁도 없이 불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콩을 볶는 듯 총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볶아대는가 싶더니
신원면사무소 있는 곳이 환해졌다
신원면사무소가 불에 타고 있었다
그 소식은 이튿날 날개 돋친 듯이 번졌다

지난해 12월 5일에도 경찰과 산사람이
서로 총질을 해대다가
경찰과 방위대 여럿이 죽고 다쳤다
똑같은 상황이 닥쳐올까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모습(사진=국가기록원)

■ 피난(2월 8일)
큰집에서 정월 초사흘까지 보내고
어머니와 작은형 나와 여동생은
눈길을 헤치고 서둘러 내동 집으로 돌아왔다
2월 5일 섣달그믐날 가마니로 덮어놓았던
시체는 치워졌는데 그 옆을 지나가려니
귀신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아 오금이 저렸다
사흘 동안 비워놓았던 방은 싸늘하게 식어있었고
총알이 지나가서 뚫린 방의 벽은
걸레로 막아놓았지만 을씨년스러웠다
어머니는 방안 정리를 한 후에
옷이 얇은 작은형에게
아버지 저고리를 껴입히고 피난을 나섰다
작은형과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여동생을 업은 어머니의 뒤만 졸졸 따랐다

길에는 눈이 소복했다
사람들은 짐 보따리를 이고지고
청연마을을 향해 흐르는 사천천을 건너고 있었다
오례마을 쪽에서 장총소리가 산천을 흔들었다
‘딱콩’이라는 총이었다
괴한이 장총을 쏘며
당장 그 자리에 서라고 손짓을 하며 달려왔다
피난민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은 듯이 서있었다
괴한은 번개처럼 달려와서는
곧 해방이 되는데 어딜 가느냐며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소리쳤다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못하고 되돌아갔다
돌아온 안방은 추워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불 피울 준비는 안 하시고
동생을 업고 안절부절 하셨다
총을 들고 다니는 괴한은 빨갱이라는데
빨갛게 생기지는 않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빨갱이들은 들판을 날아다니는 듯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번개같이 사라지곤 했다

어머니는 대문간 옆에서
빨갱이가 멀리 사라졌는지
숨어서 확인을 한 뒤에
작은 형과 나를 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살금살금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갔다
큰길이 아닌 마을 뒤 야산으로 올라가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을 따라
다시 피난을 떠났다
꽁꽁 얼어있는 개울에 눈이 내리니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나는 연신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아파도 속으로 삼키고
어머니 뒤만 따라갔다
넘어지고 자빠지며 개울이 합쳐지는 냇물을 건너
논두렁을 기어올라
마을에서 한참 멀어진 대바위골 오솔길에 도달했다
‘대밭기’라고도 하는 곳인데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하여
호랑이라도 튀어나올 것같이
음침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산자락으로 나있는 오솔길에는 눈이 그대로 있어
짚신을 신은 양말은 눈에 금방 젖어들었다
발도 시리고 추워서 어머니께 투정을 부렸다
어머니는 작은형이 입은 아버지의 저고리를 벗겨서
나에게 입혀주었는데 따스했다
작은형은 말없이 벗어주었다
내동에서 청연마을까지는 십 리 길인데
빨갱이를 피해서 산으로 둘러오느라
어느새 점심때를 넘겼다

길가에는 주막이 있었다
거창 읍내를 드나드는 길손들의 쉼터이기도 하고
목마른 길손들이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곳이었다
난리통에 문짝이 바람에 나가떨어지고
안에는 피난을 가다가 죽은 시체가 방치되어 있어
흉가가 되어버렸다
청연마을을 지나서 무촌 외가로 가야하는데
춥고 배가 고파서
청연마을에 있는 어머니 친구 집을 찾아갔다
(아, 그런데 이 일이 우리에게 큰 불행으로 닥쳐올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춥고 배가 고파도 남상면 경계를 넘어
무촌 외가로 갔어야 했다
어머니 친구 내외분은 박순근(당시 16세)이라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아들과 살고 있었다
점심을 못 먹었다고 하니 명절 떡국이 나왔다
지난해에는 풍년이 들어
이번 설에는 떡국에 소고기가 들어갔다며 자랑을 했다
육식을 먹는 사람들은 별미였겠지만
작은형과 나는 고기를 못 먹으니 그림의 떡이다
고기를 먹으면 배가 아프거나 두드러기가 돋아서
배는 고픈데 먹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유과 부스러기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몸도 녹였고 쉴 만큼 쉬었다
외가로 가야하는데 눈보라가 날리더니 날씨가 사나워졌다
어머니 친구 분은 자고 날이 개면 가라고 붙들었다
정초의 해는 짧기만 하여서 금세 저녁때가 되었다
저녁에도 낮에 먹다 남은 떡국으로 허기를 때웠는데
작은형과 나에게는 식은밥이 나왔다
소고기 냄새 때문에 먹는 둥 마는 둥
또 한 끼는 넘어갔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옹달샘에서 길러온 물로 설거지를 하고
세상 이야기를 도란도란하셨다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었다
문풍지도 추운지 파르르 떨었다

▲”대부분이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 기관총과 M1 총구가 주민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따다닷! 탕탕탕! 총구에서 뿜어내는 폭음은 고막을 찢을 듯이 지축을 흔들었다.”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사진=피카소 미술관)

■ 청연학살(1951년 2월 9일, 음력 1월 4일)
밤새도록 눈이 소복이 내렸다
먼동이 트자 눈을 치우는 써레질 소리로 마을이 부산해졌다
하늘은 먹구름에 가려져 목화솜 같은 눈송이를 하염없이 뿌렸다
몹시 추웠다
먹다 남은 떡국이 불어서 곤죽이 되었는데
다시 데워져 아침 끼니로 나왔다
작은형과 나는 찬밥에 김치였다
식사가 끝나니 어머니 친구와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시고
봉초담배를 담뱃대에 담아 나눠 피우셨다
햇살이 올라오면 떠나야 하는데
해는 영영 떠오를 것 같지 않았다
나서야하는데 눈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다
마을의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댔다
명절 때라서 외지에서 온 낯선 이들 때문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별안간 마을 앞에서 벼락 치는 총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었다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마을 앞 논들로 끌어냈다
대부분이 초가삼간인 농가들은 흰 눈을 머리에 잔뜩 이고도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무섭게 타올랐다
집주인들은 대대로 살아온 전 재산이 잿더미가 되는 것을
핏발이 선 눈으로 지켜보았다
울부짖는 소리, 애원하는 소리, 지옥이 따로 없었다
살려달라고 군인에게 매달려 빌어도
돌아오는 것은 무자비한 개머리판이었다
어머니 친구 분의 남편인 아저씨도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를 철철 흘렸다
총소리와 개 짖는 소리
군인들의 고함소리로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주민들은 옷도 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눈길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군인들은 사정없이 발길로 차고 때리며
주민들을 논들로 내몰았다
마을은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주민들은 속수무책, 눈이 덮인 논들로 짐승처럼 끌려 나왔다
군인들은 박 씨들 무덤가 위로 죽 늘어섰다
총부리는 논바닥에 서있는 주민들을 향했다
그중에 계급이 높은 군인은 불을 피워놓고
하늘에다 탕, 탕, 총질을 해댔다

나는 발이 너무 시려 사람들이 몰려있는 논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발만 감싸고 있었다
총소리가 멈추더니 군인가족이나 경찰가족이 있으면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군인들의 짐을 지고 갈 장정들과 가족들도 나오라고 했다
어머니 친구 분의 남편인 아저씨는 가족을 데리고 짐꾼으로 나갔다
어머니도 뒤따라 나가며 같은 가족으로 행세하려다
관계를 물을 때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무지막지한 군홧발에 차여 되돌아왔다
그때 같은 가족이라고 그분들이 도와주었더라면
우리의 운명이 많이 바뀌었을 텐데
깜빡하는 사이에 운명은 그들과 우리를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았다

더욱더 안타까운 일은
군인들이 내동으로 올 때 내동 짐꾼들 속에
아버지가 계셨다는 것인데
외가로 보낸 우리들이 그곳에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니까 무섭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우리를 한번 찾아보시지, 하는
안타까움이 사무쳤다
청연마을 어느 아주머니는 짐꾼으로 나간 남편 뒤를 따르다가
걸음이 느리다고 개머리판에 가슴을 맞아
평생을 피멍이 든 가슴앓이의 고통을 겪으며 살았다
군경가족과 짐꾼가족이 빠져나가니
대부분이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만 남게 되었다
기관총과 M1 총구가 주민들을 향해 겨누어졌다

따다닷! 탕탕탕!
총구에서 뿜어내는 폭음은
고막을 찢을 듯이 지축을 흔들었다
따다닷! 탕탕탕!
사람들의 살결이 터져
핏물이 바가지로 퍼붓듯 머리 위로 쏟아졌다
폭풍에 고목나무가 넘어가듯
사람들이 내 위로 우수수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들 속에 끼여서 숨통이 막힌다
나는 죽을 것 같다
온힘을 다해 머리만 간신히 밖으로 내밀어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들 몸에서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비린 피 냄새가 역겨웠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의 몸에 눌린 나는
죽은 시신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온 힘을 다해 발악을 해도 죽은 자는 꼼짝도 안 했다
논바닥에 깔린 하얀 눈은 어느새 붉은 피로 흥건하게 물들었다
몸은 점점 감각을 잃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쓰러졌는데도 총알은 계속 날아왔다
왼쪽 옆구리가 화롯불에 달군 인두가 스쳐가듯 뜨끔했다
총알이 스쳤다는 것을 외갓집에 가서 씻을 때
살 껍질이 벗겨진 것을 보고 알았다

총소리가 멈춘 것 같아서 살며시 고개를 들어
군인들이 있는 곳을 쳐다보는 순간
기관총을 쏘는 군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유난히 똥그랬다
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는데
따다다닷!
기관총이 나를 향해 불을 뿜었다
머리에 큰 돌이 날아와 때리는 것 같은 충격이 왔다
피가 쫘르르 얼굴로 쏟아졌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땅속 깊이 한없이 빠져 들어갔다
이젠 죽어서 고통 없는 저승으로 가는가
그런데 어제 이곳까지 끌려온 기억이 생생하다
몸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고
너무 고통스러워 이제 죽는가 싶어서 슬픔이 북받친다
총알 두 개가 왼쪽 갈빗살과 머리를 스쳤다
사람들이 쓰러졌는데도 계속 총질을 해댔다
피에 굶주린 광란자들이었다

눈을 감았다
죽기만 기다려도 죽지 않고 정신은 더욱 또렷하다
군인들이 가기만 기다렸다
무슨 원한이 그리도 많아
빨갱이와 싸워야할 총알을 동네 사람들한테 쏟아붓는가
도대체 국군이 왜 사람을 죽이는지 알 수 없었다
죽은척하고 있어야 살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군인들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후 총소리가 뜸한 것 같아 고개를 들어
군인들이 있는 곳을 살펴보니
불 옆에 대여섯 명이 있고
군인들의 긴 대열은 남상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군인 대열 가운데 한 군인이
M1 소총으로 나를 조준해서 쏘는 것 같았다
그 총알은 죽은 사람들 속에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내 옆의 한 어린 아이를 맞췄다
퍽, 머리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는 눈을 뜨고 죽었다

군인들의 긴 대열은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한참 후 불 옆에 있던 군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다 간줄 알고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는데
탕! 탕!
군인들이 처참한 시체 주위를 돌면서 가끔 총을 쏘아댔다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죽이는 확인사살이었다
한참을 죽은척하고 있다가
실눈을 뜨고 보니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끔찍한 짓을 군인이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눈 위를 기어 다녔다
군홧발이 축구공처럼 아이를 시체더미 속으로 차 넣었다
그리고 피 묻은 군화를 눈에 문질러 닦았다

군인도 제복을 벗으면 똑같은 사람일 텐데
어찌 이리도 잔인할까
그들은 인육을 먹는 악마일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무지막지한 군홧발로
고사리 같은 아기를 공처럼 찰 수 있을까

몸은 저리다 못해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움직이면 들킬 것 같고 눈을 감고 있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숨어 있을까봐 한참을 기다려도 조용했다
몸을 뒤틀었다
있는 힘을 다했지만 시체들을 빠져나오지 못하겠다
그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다시 옆으로 꼬꾸라졌다
내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고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좌우로 조금씩 빠져 나오려는데 짚신이 벗겨진다
설이라고 아버지가 특별히 삼아주신 신이다
잃어버렸다고 하면 화를 낼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
발에 걸고 빼내려고 했지만
시체를 사이에서 몸도 빼내기 어려운데
짚신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신을 포기하고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왔다
살을 찢는 추위인데도 땀이 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어머니를 찾아야한다
오매! 오매! 울며불며 시체들을 헤집고 엄마를 찾아 헤맸다
기관총 앞에 낯익은 처네(어린아이를 업을 때 두르는 끈이 달린 작은 포대기)가 보였다
하얀 눈, 아, 하얀 눈 위에
어머니가 피투성이로 누워있다
무심한 까마귀들은 어디서 피비린내를 맡고 날아왔는지
이리저리 날뛰며 시체들의 살점을 쪼아댔다

▲”사람들 속에 끼여 잘 모른다고 했는데, 훗날 오매 치마 속에 휩싸여 살았다고 소문이 났다. 어머니의 지극한 영혼이 어린 나를 살렸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거 창양민학살사건의 생존자 김운섭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장. (사진=김성경 제공)

■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발목에 총을 맞아 피가 흐르는 정애와 운산이 남매의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피난을 가지 않고 내동에 남았는데
학살 소식을 듣고 손자와 손녀를 찾아 청연마을로 혈혈단신 오셨다
할아버지의 큰며느리와 아들 하나 딸 둘은 청연골에서 이미 죽었다
군인들 눈에 띄면 죽을 수도 있는데 참으로 간 큰 노인이다
할아버지는 미친 듯이 시체들을 헤집고 다녔다
마침내 정애와 운산이를 발견하고는 얼른 품에 안고
정신없이 달아나셨다
나도 집안의 손자뻘이 되는데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았다
살겠다고 나도 할아버지의 뒤를 무조건 따라갔다
양말만 신고 가시밭을 지날 때는 발바닥이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채여서 그 고통은 죽는 것보다 더 아팠다

청연에서 내동까지 십리길 굽이굽이 모롱이를 돌고 돌아 집에는 왔는데
아버지도 큰형도 보이지 않고 집안은 텅 비어있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피에 젖은 양말을 벗어던지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한없이 슬퍼졌다
마을 사람들이 담 너머로 나를 보더니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엄마와 세 자매가 외가로 피난을 간 줄 알고 있었는데
어린 것이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측간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돌아와
울기만 하는 사연을 궁금해하였다
“야야, 와 그리 우노. 니 꼴이 와 그러노.”
“국군들이 청수테(청연) 사람, 내동 사람 다 죽였어요.”
“그놈들이 그믐날 그 독장을 지기더니 기어이 큰일을 내고 말았구만.”
“너거 오매랑, 너거 형이랑, 여식아까지 다 죽었단 말이가?”
“너희 아버지는 아침에 군인들 짐 지고 갔는데 못 만났나?”
동네 사람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니는 우찌 살아왔노?”

사람들 속에 끼여 잘 모른다고 했는데,
훗날 오매 치마 속에 휩싸여 살았다고 소문이 났다
어머니의 지극한 영혼이
어린 나를 살렸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
한참을 울고 나니 사람들 속에
운출이 아버지와 미순이 오빠가 보였다
애들이 아직 살아 있으니 빨리 가지 않으면
얼어 죽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정신을 놓지 않고 말을 해주어서
운출이는 이틀 만에 데리고 왔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기적이었다
미순이도 살았다
내동 애들은 나까지 다섯(나, 정애, 운산이, 운출이, 미순이)이 살아남았다
어린 운산이는 그 후에 일찍 죽었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날씨가 워낙 추우니 피에 젖은 옷이 빳빳하게 얼었다
얼은 옷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앞집 할머니가 미지근한 숭늉을 한 사발 주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가난한 할머니집인데
물에서 소고기 냄새가 나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고기 냄새 때문에 물을 마시지 못했다
몸을 녹일 만한 곳이 없었다
방도 불을 땐지 오래되어 냉골이었다
이불을 둘둘 감고 방구석에 앉아 있으니
춥고 배가 고프다
조산말(오례)에 밥 얻으러 다니는 아이가 생각났다
바가지를 들고 다니며 부엌 문전에서
“밥 좀 줘요. 밥 좀 줘요.”
바가지 가득 밥을 얻어
담벼락 밑에 앉아 맛있게 먹곤 했다
나도 부엌에 있는 바가지를 들고 밥 동냥을 나가볼까, 생각했다
마을 곳곳엔 빈집인데 이 난리통에 누가 밥을 줄까,
막막했다
아, 모지랑 할매가 있었지
우리 집에서 세 번째 집에 있었다
두 발목이 없어 무릎으로 다니기 때문에
‘모지랑 할매’라고 불렀다
할매는 점을 치기도 하고
푸닥거리도 하며 아픈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었다
아버지와는 친하게 지냈다
할매 집에 가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맨발로 눈을 밟았다
얼어붙은 눈은 칼날이었다
발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았다
팔딱 팔딱 뛰면서 대문을 나서는데
저 멀리 청수골 쪽에서 군인들이 또 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군인들한테 걸리면 죽는다,
죽음 앞에서 발이 시린 것은 온데간데없고
화살처럼 몸을 튕겨 마당으로 들어왔다
마루 밑에 숨을까, 집 뒤란 땅굴 속에 숨을까, 궁리를 했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어째야 할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감악산 당산나무 쪽으로
사람들이 희끗 희끗 눈발처럼 올라가고 있었다
그곳으로 무조건 달렸다
다리는 가시에 찔리고 발은 돌부리에 채여서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죽을힘을 다해서 마을 사람들을 따라잡았다
당산 옆 후미진 골짜기로 가는 대열에 합류했다
사람들은 피에 얼룩진 나를 가까이 하지 않고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는 청연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산바람은 잠시도 쉬지 않고 몰아쳐
너무나 춥고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음력 정월 초나흘의 해는 짧기도 하여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마을 사람들은 가족끼리 모여앉아 이불을 두르고도 춥다고 하였다
나는 외따로 홀로 앉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서럽고 외로웠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정신은 희미해져오는데
사람들은 여기 있다가는 얼어 죽겠다면서
나 혼자 남겨놓고 모두 어디론지 가버렸다
어둡고 무서운 감악산 깊은 산속에 나는 버려졌다
당산에는 귀신도 호랑이도 있어
한낮에도 담력이 약한 사람은 얼씬도 하지 않는다
캄캄한 당산 옆 산속에서 혹독한 추위에 나 혼자 남았다
데려가 달라고 애원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저승의 문턱에서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별빛을 보며
올라온 길을 더듬었다
조심조심 기어본다
바스락 소리에 산짐승인가 놀라기도 하고
가다가 무릎이 아프면 걷고
발바닥이 쓰라리면 주저앉고
피눈물을 흘리며 산을 내려왔다
마을 뒤 바위에 걸터앉아 갈 곳을 생각해 본다
‘너무 추워서 산에서 밤을 보낼 수 없는데, 어디로 가야하나.’
마을에는 군인들이 득실대고 잡히면 죽일 것 같은데
그때 검은 물체가 휙, 하고 지나갔다
호랑이나 늑대인 줄 알고 기겁을 했는데
마을의 작은형의 친구, 김점외의 아버지였다
그는 담요를 몸에 두르고 바위틈에 숨었다
무서운 곳에서 아저씨를 만나니 반가웠는데
아저씨는 바보스러운 분이다
여기 있다간 얼어 죽기 십상이니
아저씨 보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졸랐다
그때였다
“손들엇!”
싸늘한 쇠붙이가 가슴을 찔렀다
아저씨는 바위틈으로 숨었으나
두 명의 군인은 아저씨를 끌어냈다
군홧발로 개머리판으로 아저씨를 무자비하게 짓이겼다
아저씨는 실신했다
군인들이 물었다
“이 새끼, 니 아버지냐?”
“아니요. 이 동네 사는 아저씨라요.”
“넌 왜 여기에 있냐.”
“사람들 따라서 피난을 가다가 갈 곳이 없어서요.”
“이것들 빨갱이 첩자 아냐?”
나는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처치하고 가자.”
이젠 죽었구나,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군홧발이 사정없이 배를 찼다
나는 뒤로 나자빠졌다
배가 아파 쩔쩔 매는데
“이 새끼야, 일어나!”
다시 군홧발이 들어오더니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아,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다
등이 시리다
하늘엔 별이 반짝였다
나는 내동 마을 뒤 천수답 고랑에 처박혀 있다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띵하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논에 있는 흙을 끌어다가 상처에 발랐다
피는 멎지 않고 따갑기만 했다
엉금엉금 기어서 고랑의 얼음을 깼다
얼음이 별빛에 반짝였다
반짝이는 별빛이 어머니의 눈물 같다
손과 얼굴을 대강 씻었다
손가락이 빠질 듯 손이 시렸다
지금 나는 청연의 산속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조차 잃어버렸다
군인들도 마을 아저씨들도 없다
집으로 갈까, 지금쯤 아버지는 와계실까,
춥다, 너무 춥다,
마을로 들어가면 군인들한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작정 마을로 들어와 동청(마을회관) 앞까지 왔다
군인들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동청에서 내동 우리 집과
청동 사는 작은 고모님 집과의 거리가 비슷하여
아버지를 만나면 청연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야 될 것 같아
고모님 집으로 갔다
고모님 대문에는 군인이 한 명 서있었다
웬 놈이냐고 물을까 봐 주춤했지만 군인은 말이 없었다
마루로 올라가서 방문을 여는 순간
더운 열기와 소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댓 명의 군인이 저녁식사를 막 끝내고 쉬고 있었고
방 가운데 밝혀놓은 석유 등잔불은 심지가 너무 솟아
그을음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별안간 꼬마가 나타나 방구석에 털썩, 주저앉으니
군인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고양이가 생쥐를 다루듯이 요리조리 살폈다
“너, 어디서 왔어?”
“여기가 고모님 집이라요.”
묻는 말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야 할 것 같았다
“밤에 왜 왔나?”
“아버지가 아침에 아저씨들 짐 지고 갔는데, 오시지 않아서 고모님이 계신 줄 알고 왔어요.”
“너희 식구들은 다 어디 가고?”
“아무도 없어요.”
“어머니는 있을 것 아니냐?”
“죽었어요.”
“누나는 어디 가고?”
“없어요.”
“이모는?”
“없어요.”
“형들은 있을 것 아니냐?”“없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셋이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어제 군인 아저씨들 짐 지러 갔고 어머니는 3년 전에 아파서 죽었어요.”
셋이서 살다가 아버지와 둘이 산다고 했는데도 “누나와 이모는 집에 있지, 어디 갔지?”
없다고 해도 자꾸 묻는다
아까 총소리 들었냐고 하기에
모른다고 했더니
벽에 세워놓은 총을 들어 보이며
거짓말하면 쏘아 죽이겠다는 시늉을 했다
아버지가 국군 짐 지고 갔다 해도 빨갱이 짐 지고 갔냐고 묻고
형은 없다고 했는데 빨갱이냐고 묻고
누나는 빨갱이 밥해주러 갔냐고 물었다
혹시나 딴 소리가 나올까 유도를 해도
대답이 똑같으니 고놈 똑똑하단다
머리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처음에는 어두침침해서 모르다가 정색을 하며
왜 피가 나느냐고 묻는다
오다가 담벼락에 부딪혔다니까
불쌍해보였는지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안 먹었다고 하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소고깃국에 김치를 내놓으며 먹으라고 했다
밥 냄새가 너무나 고소하여 한 숟갈 입에 넣었는데
목구멍이 받아주지를 않아서 멍하게 바라만보고 있으니
먹으라고 재촉을 하였다
소고깃국을 못 먹는다고 하니
건빵 한 봉지를 건네주었다
아버지 얼굴이 떠올라서
집에 가서 아버지께 보이고 먹어야 한다니까
악마 같은 자들도 부모 생각이 나는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총을 쏘았고 화약 냄새가 났는데 / 여기가 저승일까 / 내 뺨을 만져보았다 / 살아있는 건 분명하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생존자 김운섭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장이 합동묘역 알림글을 살펴보고 있다. . (사진=김성경 제공)

잠시 후 그들은 코를 골았고
나는 벽에 기대어 깜빡 졸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다
“야, 임마!”
내 잠꼬대가 심했는지 깜짝 놀라며 군인들이 깨었다
그때부터 나는 자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림자 길게 흔들리는 석유등잔불만 바라보며
‘심지를 낮추면 기름이 덜 들 텐데.’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였다
기름을 아끼려고 불을 잘 켜지 않던 어른들 생각이 났다
따뜻한 방이어서 잠이 쏟아졌다
자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새우잠이 들었다
잠결에서도 밥 냄새와 쇠고깃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느새 날이 샜는지 군인들이 식사를 끝내고 마당으로 나갔다
밖은 캄캄한데 마당 가득 군인들이 모여들었다
아버지가 혹시 군인들 짐꾼 속에 있을까 밖으로 나오니
어젯밤에 끈질기게 물어보던 군인이 방에 있다가 나중에 가라고 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맨발로 마당에 내려섰다
얼음을 밟는 것처럼 차가와 마루로 다시 뛰어올랐다
마루 밑을 뒤지더니 어른이 신던 헌 짚신을 꺼내주었다
군인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서 집으로 왔다
짚신이 있어 다행이었다

어둠이 묽어질 무렵 대문을 들어섰다
보초병이 서있는데도 무조건 마당으로 들어갔다
별안간 군홧발이 엉덩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나는 마당 가운데로 엎어졌다
짚신과 건빵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엉덩이가 아파서 쩔쩔매고 있는데
총구로 머리를 쿡쿡 찌르며
“이거 빨갱이 새끼 아냐?”
방에 있는 군인이 오라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엉금엉금 기어서 건빵을 집어 들고
마루로 올라 방문을 잡고 섰다

“어린놈이 어찌 이렇게 일찍 왔나?”
“여기가 우리 집이라요.”
“가족들은 다 어디 가고 너 혼자 어디 갔다가 와. 임마.”
“아버지가 어제 아침에 아저씨들 짐 지고 가서 오시지 않아서 고모님 집에 있다가 와요.”
“니 어머니는 어디 가고?”
“죽었어요.”
“누나는? 형은? 고모는? 이모는?”
“없어요.”
“아버지, 어머니, 나 셋이 살았는데 어머니는 삼 년 전에 죽었고 아버지와 둘이 살아요.”
나 보고 저 새끼 수상한 놈이라고 했다
방에 있는 여자 옷은 누구 옷이며
굴속에 있는 떡과 유과는 누가 만든 것이냐고 다그쳤다
‘이제 죽었구나.’
고모님 집에서 군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져본 것 같다
집 뒤란에는 저장용 땅굴을 10미터 정도 파서
설에 만든 떡과 유과 등을 넣어두었는데,
굴속의 떡은 이웃집에서 갖다 놓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어머니 옷은 추울 때 내가 입는다 했다
믿으려 하지 않고 수상하게 보았다
건빵을 보여주며 군인아저씨가 준 것이라 해도 믿지 않았다
문초는 살벌했다
군인들이 너무 난폭하게 족치니
군인들 밥을 해주러 잡혀온 오례마을에 사는 당고모님(5촌 고모)이 아는 체 하지 말라며 부엌에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모른척하고 서있을 때
대문에 서있던 보초가 출발이라고 외쳤다
“쏴버리고 가자.”
“철커덩, 탕!”
화약 냄새가 얼굴을 확, 스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루 천장에 붙은 파리똥이 희미하게 보였다
기절을 한 것이다
저승의 문턱을 네 번이나 갔다가 오는 순간이었다
일어나 앉아 총알이 몸 어디를 뚫고 지나갔는지
찾아보아도 피가 나는 곳이 없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분명히 총을 쏘았고 화약 냄새가 났는데
여기가 저승일까
내 뺨을 만져보았다
살아있는 건 분명하다
너무 추웠다
마당에 내동댕이쳐있는 건빵을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따스했다
아랫목은 뜨거워 발을 댈 수도 없었다
건빵을 뜯어먹을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아버지와 같이 먹기 위해 살강에 올려놓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잠이 들었다
눈을 감으면 자꾸 죽는 꿈을 꾸어서 깊이 잠들지 못했다
차라리 죽으면 편할 텐데,
이리 많은 고통을 겪느니 죽는 게 나을 텐테,
하지만 죽는 것이 겁이 난다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 저 눈이 작은형과 나와 여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먹는 흰 쌀밥이었으면,
배가 고프다

■ 다섯 번째 저승 문턱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기도 하지만
고래 심줄처럼 질기기도 하다
질긴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쨌든 먹어야한다
정월 초하룻날 포식을 하고 탈이 났는데
이제껏 변변한 밥 한 끼 먹지 못했다
마을은 비어있고 생각나는 사람은
먼 길이라 갈 수 없는 모지랑 할머니뿐이다
어제 가려다가 군인들 때문에 가지 못했다
따뜻한 방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눈은 발목까지 빠지게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할머니 집을 행해 맨발로 뛰었다
방문 앞에서 발이 시려 팔딱 팔딱 뛰었다
할머니는 퍼뜩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어디서 잤느냐?”
“밥은 먹고 다녔냐?”
“니 아버지는 어제 군인들 짐 지고 가던데 만났나?”
“아이고, 얼매나 배가 고프겠노.” 하시면서
윗목에 밀쳐놓은 밥상을 끌어당겨
꽁꽁 언 밥을 김치하고 먹으라며 주셨다
먹지 못하고 멍하니 내려다보는데
밖에서 느닷없이 “정추 띠기!” 하고 불렀다
안동 김 씨의 맏며느리이기도 하고
어른들과 친히 지내는 어머니 친구 분이
동생 또래의 아이를 업고
보따리를 이고 피난을 가면서 할머니를 부른 것이다
“와요? 어디로 가요?”
나는 잘 듣지 못했는데
외가 방향으로 간다고 한 모양이다
“그러면 야 좀 데리고 가소. 퍼뜩 따라 가거라!”
하늘은 잔뜩 흐려 함박눈을 쏟아붓는데 맨발이다
그토록 아끼던 건빵을 집에 두고 왔는데
발은 시리고 배는 고파 죽을 것 같았다
눈 위를 걸어가다 죽으나 굶어서 얼어 죽으나
매 한가지일 것 같았다
내 목숨은 이제 하늘에 맡겨졌다

할머니의 성화에 아주머니를 따라 나섰는데
발목까지 빠지는 눈은
맨발을 칼로 도려내듯이 시리고 아팠다
내동 마을을 벗어나면
사천 냇물에 노둣돌이 띄엄띄엄 놓여있다
건너편 오른쪽으로는 청연으로 가는 길,
바로 올라가면 갓짐재로 가는 오르막길,
두 갈래 길이 나있다
그 갈래 길 언덕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기에 소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소나무 밑에는 눈이 없었다
발이 아예 없어지는 것 같이 시려서
죽을 것 같았다
죽어도 더 이상은 갈 수 없었다
흙바닥에서 단련된 맨발인데 눈 위에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너무 발이 시려서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나무 밑에서 죽을 것처럼 날뛰니까
저만큼 가던 아주머니가 되돌아오셔서
“아이고 어쩔까나. 얼매나 발이 시렵겠노.”
봇짐에서 버선 한 켤레를 꺼내주며
“이거라도 신어 보거라.” 하셨다
버선을 낚아채듯이 받아서 얼른 신었다
버선을 신으니 신기하게도 발이 시리지 않고 편했다
그러나 낡은 버선이라 얼마 못 가서 바닥이 다 닳았다
발바닥은 얼어서 감각이 점점 둔해졌다
발등만 덮고 있는 너덜너덜한 천 조각에
눈이 똘똘 맺혔다
그것이 발바닥에 밟히니 벌이 쏘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이를 악물며 참았다
지긋지긋한 어제 그곳을 다시 지나가는데
죽은 사람들이 눈에 덮여있었다
그 위를 까마귀 떼가 새까맣게 앉아
시체들의 눈알을 파먹고 있었다
어머니와 작은형과 동생도 저기에 있다
그런데 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무섭다
어머니가 시체 더미에서 나와서
내 발목을 잡아당길 것만 같았다
나는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머니와 형과 여동생이 이승을 떠난 지 겨우 하루 만인데
무서워서 온몸이 졸아들었다

청연에서 남상면 무촌리 매산 마을로 가는 내리막 산길에는
큰 소나무들이 울울창창하여 늘 어두침침했다
산짐승이라도 나올 것 같아 무서웠다
발바닥은 감각이 거의 없었고 힘도 빠져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아주머니 뒤만 졸졸 따라가다가
매산 마을 옆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곳은 신원과는 달리 길에 눈도 없고
강풍에 눈보라만 휘날릴 뿐이다
발에 걸려있는 버선을 벗어던지고 잠시 쉬는데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사르르 땅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듯했다
이틀 동안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기만 하였다
굶는 데는 이골이 났으나 추위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숨을 돌린 아주머니는 얼른 가자고 성화를 내는데
나는 서서히 천야만야한 절벽 아래로 빠져들고 있었다
“야야, 어서 일어나거라.”
“너거 외갓집 다 왔다. 퍼뜩 가자!”
아무리 깨워도 꼼짝을 안 하니까 아주머니는
“아이고, 어쩔거나. 다 와서 죽을랑가배.”
벗어던진 버선으로 눈을 끌어와서 덮어주셨다
“까마귀가 안 달려들어야 할 낀데. 밤이 되면 산짐승이 해코지할 낀데.”
아주머니는 혼잣말을 하시며 사라졌다
6.25 이후에 하도 사람이 죽어서
저승사자가 바빴는지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잊었는지
다섯 번이나 저승의 문턱까지 가서 또 살아났다
너무 울어 눈물도 말라붙었다
먼 산에서 까마귀들이 미친 듯이 울었다

남상면 무촌리 외가 마을이 멀리 보였다
춥다
발바닥이 쓰리고 아프다
일어설 수가 없다
엉금엉금 기어간다
저 멀리 어느 아주머니가 오고 있다
어젯밤에 군인들이 묵었던 고모집의
고종사촌의 형수씨였다
내동에서 무촌리로 피난을 왔다가
피난을 아직 덜 온 내동 식구들의 마중을 나오는 길이었다
앞서간 아주머니를 만나서
내 얘기를 듣고 달려오시는 길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만나 것 같이 반가웠다
형수씨는 나를 들쳐 업었다
형수씨의 등을 따스했고 참 포근하였다
어제 청연골에서 죽은 사람들 이야기와
밤에 형수네 집에서 군인들과 같이 보낸 이야기를 해주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군인들을 만나면 죽이니
절대로 가지 말라 했다
형수씨는 나를 외가 앞 신작로에 내려놓고 되돌아갔다
멍청하게 서있는 나에게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고맙다는 말이나 잘 가시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 외갓집
고종사촌 형수씨의 모습이 저 멀리 사라졌다
신작로에서 20여 미터 되는 외가 마당에 멍하게 서있었다
추위 탓인지 난리 탓인지 거리에도 인적이 끊어졌고
외갓집 식구들도 문을 꼭꼭 닫고 있었다
누구를 찾을 기력도 없어
마당 가운데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외숙모가 물 사발을 들고 부엌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외숙모는 밥을 빌러 온 거지인 줄 아시고
요새는 시도 때도 없이 온다며 타박을 하셨다
“외숙모님!”하고 불렀다
외숙모님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아니, 네가 운섭이 아니냐. 아이고, 이 사람들아, 운섭이가 왔다.”
방안에 모여앉아 우리 걱정을 하시던 외갓집 식구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아버지도 거기에 계셨다
기진맥진한 나를 아버지가 안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피투성이가 된 내가 나타자자
외갓집은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버지 품에 안겨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바탕 오열을 토해내고
나는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와 외삼촌 두 분은 논들에 방치되어 있는
세 식구의 시신 처리를 의논하셨다
하늘이 돕지 않았더라면 어찌 살아났을까
외숙모가 물을 데워주셨고
눈물을 흘리시며 피범벅이 된 옷을 벗기고 씻겨주셨다

정신이 들자 총알과 개머리판에 맞은 상처 때문에
머리가 무척이나 따갑고 아팠다
총알이 옆구리를 스친 상처도 아팠다
발도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큰외삼촌은 총알이 조금만 더 깊게 스쳤더라면
살지 못했을 거라고 좋은 운을 타고난 아이라고 기뻐하셨다
요즘 같았으면 버렸어야할
피 묻은 옷을 다시 입히려고
외숙모님이 무촌 천변에서 빨래를 했는데
냇물이 핏빛으로 붉게 변하더라며 끔찍해하셨다
그때부터 외갓집에 살았는데
외할머니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셨다
외사촌은 남자 둘, 여자 셋이었다
그들과는 가끔 다투었는데
내 편은 외할머니뿐이었다

청연 마을 논들에 방치되어있는
어머니와 작은형과 여동생의 시신을
아버지와 외삼촌 두 분과 큰형이 숨어 들어가서 찾아내었다
주변 산에 매장을 하고 군인들이 무서워 통곡도 하지 못했다
땅이 얼어 작은형과 여동생은 깊이 묻지 못해
훗날 여우가 파먹었다고 하였다
그해 정초부터 봄이 오는 삼사월까지는 무척이나 길었다
어머니가 있는 외사촌들이 부러웠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어머니와 작은형과 여동생이 그리울 때는
무촌 앞 신작로에 앉아 감악산 너머에 있는
아득한 집을 그리며 한없이 울었다

▲”어머니가 있는 외사촌들이 부러웠다 /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 어머니와 작은형과 여동생이 그리울 때는 / 무촌 앞 신작로에 앉아 감악산 너머에 있는 / 아득한 집을 그리며 한없이 울었다” (사진=pixabay)

■ 봄은 왔는데
혹독한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하였다
사는 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했다
나는 아버지와 집으로 왔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집은 그대로인데 아래채 방에는
우리 식구들의 양식이 들어있었고
마구간에는 소가 한 마리 있었다
하필이면 포탄이 아래채로 날아와서 잿더미가 되었다
집 뒤란의 굴속에 넣어두었던 떡국거리와 유과도
사방으로 흩어져있었다
이제는 어머니도 여동생도 작은형도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다
집에는 먹을거리도 하나도 없다
살아남은 세 식구의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큰집이 있는 청용마을로 아버지와 나는 거처를 옮겼다
큰형은 혼자 사는 둘째 고모 집에서 일을 해주며
밥을 얻어먹었다
어리광을 부릴 나이인데 나는 이때부터 풀이 죽어
남의 눈치만 보고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살아야했다

같은 또래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학교 들어갈 나이가 두 살이나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학교에 보내줄 생각이 없으셨다
좀 더 크면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서
먹고 살게 할 작정이었던 것 같다
난리에 지칠 대로 지쳐서 몸도 뼈와 살가죽만 남았다
약골로 태어나 일도 못하는데
남의 집 머슴을 가면 일에 치여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끓었다
산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데
내 마음은 엄동설한이다
사람들은 날 보고 천운을 타고났다는데
삶의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다

■ 탄량골, 박산골의 호곡성
군인들은 우리 가족을 죽인 청연에서뿐만 아니라
탄량에서 100명, 박산에서 517명, 기타 노지에서 18명
닥치는 대로 양민을 학살했다
1951년 2월 10일 아침 내동을 떠난 군인들은
신원면 소재지로 들이닥쳤다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로 끌고 갔다
대현리, 와룡리 주민 일부는 연행 도중에
탄량골 하천변에 밀어 넣고 학살하였다
중유리 주민들은 오는 길이 달라서 학교로 바로 끌려왔다
탄량골 학살은 생존자인 임분임 아주머니에 의해서 알려졌다
대현리, 와룡리 사람들이 탄량골 앞에 왔을 때
10여 명의 군인들과 마주쳤는데
그 속에는 지서주임과 앞면이 있는 경찰도 끼여 있었다
주민들은 은인이나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는데
그들의 행동은 달랐다
걸음이 더디고 꾸물댄다며
“처치해버리자”고 귓속말을 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군인들은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주민들을 탄량골 계곡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주민들 주위를 빙 둘러서더니
군인과 경찰, 방위대 가족들은 나오라고 했다
문동한 씨는 군경가족도 아니면서 손을 들고
가족을 이끌고 나갔다
그때 대현리에 사는 문판대 씨는 손을 번쩍 들고
“대장님, 죽어도 말 한 마디만 하고 죽읍시다. 국민이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 있소.”
“탕!”
대답 대신 총알이 날아갔다
“탕!”
문 씨의 딸이 맞고 쓰러졌다
동시에 콩을 볶는 듯이 총알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100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논바닥이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들은 총살로 그치지 않고 시신 위에 마른 솔가지를 올리고 불을 질렀다
생존자 임분임 아주머니는 옷에 불이 붙었으나
죽은척하고 참고 있다가
군인들이 떠난 다음에 불을 끄고 살아남아
탄량골 학살을 증언하고 군인들의 만행을 고발하였다
문충현 씨는 양부모와 아내가 그 자리에서 희생되었는데
아내는 몸의 앞부분이 다 타버렸다고 그때의 참상을 전한다

▲”군인과 경찰, 방위대 가족들은 나오라고 했다 / 문동한 씨는 군경가족도 아니면서 손을 들고 / 가족을 이끌고 나갔다 / 그때 대현리에 사는 문판대 씨는 손을 번쩍 들고 / “대장님, 죽어도 말 한 마디만 하고 죽읍시다. 국민이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 있소.” / “탕!” / 대답 대신 총알이 날아갔다” 거창군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자료=거창군)

탄량학살을 저지른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대대장 한동석 소령은 미쳐 날뛰었다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주민 8백여 명을
신원초등학교 2개 교실에 감금하였다
또한 권도술, 이방화, 이상재, 이경수, 이창화, 박동운, 이소갑, 이금중 외 2명을 포함,
장정 10명을 차출하더니 학교 뒷산에 큰 구덩이를 파게 하였다
교실에 가두어놓은 주민들을 그곳으로 끌어내
죽여서 파묻을 작정이었다
땅이 얼어서 인력으로는 불가능해서 포기하였다고
권도술 씨가 전했다
그들은 어차피 죽을 것,
자기 무덤 자기가 팔 수 없다며
구덩이 파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교실에 감금된 주민들은 추위와 공포에 질려있었고
군인들은 긴 막대기를 들고 들어와
칠판을 쾅, 쾅, 치면서
군가 불러봐라, 인공가 불러봐라, 하며
주로 아이들과 여자와 노인들을 적성분자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젊은 여자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서
욕정의 도구로 삼았다
여자들의 흰 광목 치마가 벌겋게 물들었다
권도술 씨는 구덩이 파는 작업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
옆으로 빠져 남의 집으로 들어갔다
빈 가마니에 닥치는 대로 물건을 채워가지고
군인들 심부름 가는 척하며 아랫동으로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돌이 갓 지난 조성제는 학교 교실에 부모와 갇혀 있을 때
너무 울어서 시끄럽다고 쫓겨났는데,
덕분에 두 모자는 살고, 아버지는 빠져 나오지 못해 죽었다
탄량골에서 군경가족이라고 죽음을 면한 문홍한 씨 가족은
그 와중에 부인이 아이를 낳으려고 진통을 했다
국군 가운데도 선한 군인이 있어
교장 사택으로 옮겨 사내아이를 순산하였다
그 군인은 밥과 소고깃국까지 가져다주며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며
산후를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문 씨의 부인은 학살 이후에도
그 군인을 잊지 못한다는 말을 마을 사람들에게 하다가
유족들에게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한날한시에 이렇게 운이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 교실에서 악몽 같은 밤을 보낸 수백 명의 주민들은
박영보 신원면장과 신원면 지서의 박대성 주임이 나타나자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주민들은 이제 집으로 가는가 싶어 안도했다
하지만 박영보와 박대성은 마을 사람들을 싸늘하게 외면하였다
군인들은 군인과 경찰, 방위대 가족만 나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가니
웬 군경가족이 이렇게 많냐며 교실 문을 막아버렸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살 길로 갔고
교실에 갇힌 사람들은 추위에 떨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잠시 후, 군인들은 그들을 학교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이제 드디어 집으로 가려나 생각했던 사람들을 박산골로 내몰았다
계곡 위에는 기관총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을 든 군인들이 계곡을 내려다보며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남녀노소 530명이 박산 계곡을 까마득히 메웠다
총구가 불을 뿜었다
폭음이 터져 나왔다
따다닷! 따르르! 따르르르!
태풍같이 몰아치는 총알은
계곡물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다
살점이 튀고 피가 솟구쳤다
창자가 터지고 머리가 박살났다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계곡은 피를 안고 흘렀다
군인들의 광란은 계속 되었다
그 많은 사람을 살육하고도
뽑아 놓은 장정들에게 마른 나무를 해오게 하여
나무를 시신 위에 깔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휘발유를 머금은 마른 나무는 517명의 시신을 한꺼번에 삼켰고
살이 타는 냄새가 온 면을 뒤덮었다
아, 그리고는
마른 나무를 해온 열 명의 장정들을 총으로 쐈다
사정거리 안에 있던 장정들이 쓰러졌다
군인 가까이에 있던 문홍준 씨와 신현덕 씨는
군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문홍준 씨와 신현덕 씨는 조상 묘를 명산에 써서 그런지,
운이 좋아서인지,
잠시 전의 끔찍한 살육을 보지 못한 것으로 군인들과 약속하고
군인들의 짐꾼 노릇을 하다가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신현덕 씨는 살육을 지켜본 이후 외지로 나가
다시는 신원 땅에 오지 않고
울산 어딘가에 살다가 작고했다
문홍준 씨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박산골의 살육은 개미 한 마리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총으로 쏘고 불로 태웠지만
그 속에서도 생존자는 있었다
인간의 목숨은 이리도 질겨서
억울한 죽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정방달 씨 총알은 바위가 막아주었다
작은 불은 모래가 막아주었고
큰 불길은 바위가 막아주었다
불이 옷에 옮겨 붙으려 하면 모래로 몸을 덮었다
아들 정영규 씨의 증언에 따르면
정방달 씨는 그때 받은 충격으로 오래 살지 못하고
금방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 많은 1951년이 가고 / 1952년 봄이 왔다”거창양민학살사건 위령제(사진=거창군)

■ 새로운 삶
살육을 당하고 집들은 불탔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일이 생길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집이 불에 탄 사람들은 움막을 지었다
남의 집 문간방을 빌려 눈비를 피하며
자갈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질긴 목숨이었고 모진 세월이었다
식구가 반으로 줄은 아버지와 나는
당분간 큰집에서 보내야했다
큰아버지 내외분 슬하에는 2남 3녀가 있었다
큰 사촌누님은 산청군 차황면으로 시집을 갔고
큰 사촌형님 내외 슬하에는 1남 2녀가 있었다
우리 두 식구를 더하니 12명의 대식구가 되었다
설날에 어머니와 왔던 큰집인데
며칠 사이에 상황이 크게 달라지게 된 것이다
우리의 더부살이가 길어질 것 같으니
밥상머리에 앉으니 큰집 식구들의 눈치가 보였다
어려운 시절 보릿고개에 항상 배가 고팠다
냇가에 핀 버들강아지를 따먹었다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도 벗겨서 달큼한 물을 빨아먹었고
산과 들을 맨발로 돌아다녔다
살육의 시간을 뒤로한 채
봄이 가고 가을이 갔다
아버지와 나는 한마을에 혼자 사는 고모님 집 옆방으로 옮겼다

추수가 끝나고 고모님 두 분이
내동 마을에 혼자된 아주머니를 새어머니로 모셔왔다
새어머니는 재가해 오기 전에 부부 금슬이 좋았는데
슬하에 딸 하나를 남기고 남편이 병으로 일찍 죽었다
아들을 보는 게 소원이어서 재가해오셨다
인정 많고 너그러운 분인데
나는 어머니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청연골에서 죽은 어머니의 참혹한 모습이 떠올랐다
까마귀에 눈알이 파 먹히고
여우에게 몸을 뜯긴 어린 여동생이 꿈에 자주 보였다

한 많은 1951년이 가고
1952년 봄이 왔다
11살의 늦은 나이에 신원국민학교에 입학했다
6.25와 거창학살사건으로 학교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45년생이 입학하는 나이인데
39년생도 같은 학년으로 다녔다
마을도 뒤죽박죽 학교도 뒤죽박죽이었다
난리에 많은 아이들이 죽었는데도 아이들은 두 반이나 되었다
나는 입학이 3년이나 늦어서 세 살 아래인 아이들과
동창이 되어서 공부를 했는데
나보다 세 살이 많은 동급생들도 있었다
학교에 책값이나 공납금을 낼 일이 있는데도
아버지는 돈을 주지 않았다
수없이 눈물을 흘리고 선생님한테 손바닥도 많이 맞았다
6학년 1학기 서울 큰형님 댁으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
5년여의 시간 동안 눈물로 학교를 다녔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5학년 선배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를 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외지에서 부임해 와서 사택에서 살림을 했다
그 선생님의 땔나무를 해대던 생각이 난다
겨울이면 날씨도 추운데 방과 후에
산으로 땔나무를 하러 가는 게 죽도록 싫었다
빨갱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벌목해놓은 산으로 가서
5학년 선배들과 나무를 해서 집으로 오면 어둑해지곤 했다
아버지는 학교 끝나고 바로 집으로 오지 않는다고 꾸중을 하신다
그럴 때마다 엄마 있는 애들이 부러웠다
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었다
엄마, 엄마, 엄마, 혼자서 숨죽여 엄마를 불렀다

■ 박산골의 시신 수습
3학년이 되던 해 봄,
박산골에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54년 4월 5일 청명 한식을 맞이해서
박산계곡에 방치되어있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유족들이었다
3년여를 방치해놓은 517여 구의 시신 수습이 시작되었다
살은 녹아내리고 뼈만 남아
남녀 시신을 구분할 수 없었다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가는 뼈는 어린아이로
성별을 구분했다
억장이 무너지고 구곡간장이 녹아내리는
유족들의 오열 속에 화장을 하였다
박산에 남자와 여자의 묘를 만들었다
보통 봉분보다 두 배 가량 큰 묘였다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홍동골로 옮겨 이미 암매장을 했기에
어린아이의 묘는 비(碑)만 만들어 세웠다
신윤철 씨는 유족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부친의 시신을 찾았는데
시신의 주머니에서 부친의 도장과 손칼이 나왔기 때문이다
원통하게 죽은 시신이라도 찾은 유족은 다행이어서
선산에 매장을 하였다
517명 희생자의 유족들은 억울하고 분해서
하루 종일을 울었다
박산도 감악산도 눈을 감고 피울음을 울었다

▲훼손된 박산골의 위령비. 5.16군사정권은 위령비의 글자를 정으로 쪼개 동강 내어 땅에 파묻었는데 1988년 2월 15일 다시 파냈다. (사진=김성경)

■ 에필로그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청연에 피는 진달래는 우리 엄마 넋이로다
내동에 피는 개나리는 우리 여동생 넋이로다
감악산 새소리는 우리 작은형 넋이로다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억울하고 원통해라
청연의 푸른 들은 눈을 뜨고 다 보았다
흰 눈 위에 뿌려진 붉은 피를
인정사정없는 개머리판과 군홧발을
총칼에 찢기고 터진 살점을
총알에 반쪽이 날아간 어머니의 얼굴을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70년의 원통한 세월을
누구에게 돌려받아야 하나
내동의 들판이여!
청연의 냇물이여!
나에게 말해다오!
핏빛으로 물드는 박산의 단풍이여!
이제는 말해다오!

나비야, 청산 가자
청연의 범나비 너도 가자
우리 엄마 무덤가에 핀 양지꽃 만나러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잎 속에 자고 가자
낯선 꽃이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나비야, 청산 가자
언 땅에 파묻은 우리 여동생 만나러 가자
눈 쌓인 응달에 제비꽃이 피었거든
여우가 파먹은 우리 동생 넋이니
날 저물면 제비꽃에 오래오래 자고 가라

나비야, 청산 가자, 나하고 같이 가자
가다가 날 저물면 고목에 자고 가자
고목이 싫다 하고 뿌리치면
달과 별 병풍 삼고 풀잎은 자리 삼아
찬이슬에 자고 가자

나비야, 거창 가자
여우가 파먹은 우리 작은형
야윈 뼈 찾으러 가자
박산에 누워있는 위령비 일으켜 세우러 가자
국회에서 잠자는 ‘배상특별법’ 깨우러 가자
썩은 역사 갈아엎고 원혼의 눈물 닦아주자
나비야, 거창 가자
나비야, 거창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