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한국 최초 우주 SF ‘승리호’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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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블록버스터.’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유행하던 수식어다. 사전적인 뜻은 ‘한국 특유의 형식이나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인데, 실제로는 마케팅적 의미가 짙게 배어있다. 시작은 할리우드의 제작비나 마케팅비에 대적할 수 없던 한국영화계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제작한 영화가 기록적인 흥행성적을 거두면서다. <쉬리(1999년)>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포문을 열면서 국내 영화계에서 편당 제작비가 급상승하고 마케팅도 과감해졌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외형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성공에 가려 철저한 자기반성 없이 유행만 좇아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2018년 31호 씨네포럼에 실린 ‘초창기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작과정 연구(김익상, 김승경)’에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탄생과정은 한국 영화의 획기적인 변화를 위한도전과 성취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점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탄생한 지 20년이 지난 현재, 한국의 상업영화는 종전의 성공 공식을 기계적으로 답습한 영화를 양산해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적혀 있다.

문제의 본질에는 ‘맹목적인 애국 마케팅’이 깊이 박혀 있다. 약소국인 한국에서 ‘강대국의 블록버스터 못지않은 영화를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자긍심이 배경이다. 국내에서 불모지에 가까운 분야를 개척하는데 도전하는 것을 욕할 수 없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오랫동안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고 이를 바탕으로 일궈낸 성공을 베끼는 데만 몰두해, 기반을 다지는 과정은 빠지고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는 영화가 많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가 보여주듯 ‘카피(copy) 할리우드(할리우드 모방)’ 자신감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때”라며 “‘우리가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하고 감격하는 것도 민족주의적 나르시즘을 벗어나지 못한 반응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승리호>는 ‘한국 최초 우주 SF’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할리우드는 1968년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통해 우주 SF를 선보였는데, 한국은 53년 뒤에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나왔으니 기념비적인 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충분히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승리호>를 둘러싸고 호평과 혹평이 엇갈린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승리호>가 공개된 주말 내내 호평과 혹평, 갑론을박이 벌어질 만큼 화제였다.

호평은 몇 가지로 추려진다. 첫 번째는 ‘시각효과’다. 우주선이 위성과 우주 건축물 사이를 질주하는 비행신은 볼 만하다. 우주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는 못했어도, <스타워즈 시리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속도감은 느껴진다. 모션 캡처는 어색하지 않고 광활한 우주부터 승리호 내부까지 CG는 섬세하고 미끈하다. 아시아 최고의 VFX 기술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덱스터 스튜디오 등 모두 10개 업체가 참여하고, VFX 전문가 1,000여 명이 빚어냈기 때문이다. 다만 우주 전투 장면은 할리우드의 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흠이다. 기술력은 따라잡았을지 몰라도 할리우드의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설정은 썩 나쁘지 않다. 익살스러운 로봇이 등장하고 유쾌한 모험 활극 요소는 거칠고 박력 있는 영화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선원을 ‘박 씨’나 ‘삼촌’으로 부르는 호칭과 동네 아저씨 같은 로봇의 말투 등 한국 정서는 이질감이 들면서도 불편하지는 않다. 시각효과, 활극 요소, 한국정서를 떼어내면 단점이 눈에 밟힌다.

시각효과에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서사가 빈약하다. 대안가족과 화합은 어색하지 않지만 이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 못하고 신파적인 사연을 경유해 판타지적 부정을 강조한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한 부성애’를 되찾아가는 설정은 그간 영화에서 흔히 보아온 낡은 장치다. 할리우드 히어로 무비의 전형적 공식에 한국 영화에서 반복돼온 신파 코드를 입힌 것이다. 인물의 상황이나 극의 배경 등을 대부분 말로 설명한다는 점도 단점이다. 상업적이고 손쉬운 결말을 선택한 탓에 영화의 매력이 반감된 것이다.

생각할 점은 <승리호>는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느냐는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를 따라하지 않아도, 예술성만 따지지 않아도 해외에서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린 이미 경험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나 <스타워즈 시리즈> 등 할리우드 전유물로 여겨지던 장르에 도전하는 건 의미 없다. 흉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승리호>가 남긴 건 할리우드의 CG 작업에 견줘 7분의 1에서 10분의 1 사이의 비용이 들었다는 ‘가성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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