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대구를 닮은 디트로이트에서 ‘8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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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ile Road.’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를 도시와 교외로 나누는 도로 M-102의 별칭이다. 이를 경계로 백인과 흑인, 부유층과 빈곤층이 나뉜다. 도로 북쪽은 백인들이 모여 살며 범죄율이 낮다. 하지만 남쪽인 다운타운은 흑인이 많고 범죄율이 굉장히 높다. 미국을 대표하는 래퍼 에미넴이 주연한 <8마일(2002년)>은 이 도로의 특징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영화다.

디트로이트는 한때 산업도시로 융성했지만, 미국 자동차 업계의 불황을 직격으로 맞았다. 기업 줄도산으로 인구는 크게 줄고 비어있는 건물이 많아졌다. 1인당 평균소득은 미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며, 도시 인구의 30% 이상 빈민층이다. 도시가 폐허 수준으로 변하면서 범죄의 온상이 되어 버렸다.

에미넴은 디트로이트의 가난한 백인이었다. 그가 인생 역전을 할 수 있었던 건 힙합계의 살아있는 전설 닥터 드레를 만나면서다. 닥터 드레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에미넴을 발굴해 총괄 프로듀셔를 맡아 앨범을 냈다. 에미넴의 가공할 랩 실력과 재치 있고 뛰어난 가사가 담긴 앨범은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발표하는 앨범 모두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던 에미넴은 자신의 언더그라운드 시절 이야기를 담은 <8마일>의 주연을 맡고 OST 앨범에서부터 프로듀서로도 활약했다. 에미넴의 수식어는 다양하다. 흑인 음악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힙합의 전설 위치에 오른 백인 래퍼, 힙합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2000년대 이후 장르 불문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한 힙합 아티스트, 21세기 통틀어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8마일>은 에미넴의 인기로 흥행 덕을 보자고 만든 기획물이 아니다. 레전드 뮤지션 에미넴의 자전적 영화라는 것만으로 눈길을 끌고 커티스 핸슨 감독의 연출력과 에미넴의 인상적인 연기에 더불어 최고의 힙합 영화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지미 스미스 주니어(에미넴)는 디트로이트 빈민가의 가난한 청년이다. 엄마 스테파니 스미스(킴 베이싱어)는 알코올 중독자로 아들의 개망나니 동창생과 트레일러에서 동거하고 있다. 지미는 가진 거라곤 비닐 쓰레기 자루에 담긴 옷가지 몇 점과 폐차 직전의 고물차가 전부다. 마음 둘 곳 없는 삶에서 지미는 어린 여동생 릴리를 지키고 싶다. 하지만 지미는 엄마의 트레일러에 얹혀살고 있는 형편이다.

지미에게 유일한 해방구는 힙합이다. 에미넴이 그랬듯이 지미는 현실에 대한 ‘분노’를 원동력으로 랩을 구사한다. 래퍼가 되는 꿈을 꾸지만, 연습할 시간도 녹음할 기회도 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우연히 랩 실력을 선보일 기회가 마련됐지만, 긴장한 것도 모자라 관객들의 일방적인 야유 때문에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무대에서 내려온다. 현실로 돌아간 그는 우연히 만난 알렉스(브리트니 머피 분)와 사귀게 된다.

한편 친구 윙크는 인맥을 이용해 래퍼로 데뷔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남에게 의존하고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거란 안일한 기대는 결국 화를 불러왔다. 윙크와 알렉스의 외도를 발견해 윙크를 때려눕히지만, 이 일로 동네 갱스터들에게 집단린치를 당한다. 암울한 일들이 연속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지미는 현실에 두 발붙인 채 공장에 다니며 가장 역할을 하면서, 래퍼의 꿈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디트로이트 최고의 래퍼를 뽑는 ‘랩 배틀’이 열리던 날, 지미는 한 번 도망친 그곳으로 다시 향한다. 자신의 꿈은 스스로 노력하기에 달렸다는 교훈을 지미는 아픈 경험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지미는 자신을 옭아매는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그동안 억눌려왔던 울분을 토해내며 꿈을 향해 포효한다.

미국 디트로이트는 대구와 닮아있다. 한때 대구는 산업도시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섬유산업과 안경산업은 도시를 지탱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하지만 산업 변환의 흐름에 맞춰가지 못하고 쇠락했다. 새롭게 떠오른 주력 산업인 자동차 부품산업도 이내 위기를 겪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구는 전국에서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이 가장 낮지만, 1인당 개인소득은 전국에서 상위권(17개 도시 중 6위)이다. 2018년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에서 공개한 ‘대구지역 1인당 GRDP와 개인소득 수준의 차이 분석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모순된 경제지표에 대해 대구 역외에서 발생한 부가가치가 유입돼 개인의 소득을 증대시킨 때문으로 분석했다. 특히 근로, 재산, 상가 및 주택임대료 등 개인소득이 역외 소득 유입액의 대다수인 80.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가 기형적인 대구의 사정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다. 대구 노동자의 임금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빈곤율도 전국에서 상위권이다. 그런데 대구의 부자 수는 전국에서 네 번째로 많다. KB금융연구소가 펴낸 ‘2018 한국 부자보고서’에 따르면, 수성구는 대한민구 제2 도시 부산의 부촌 해운대구보다 부자가 많았다. 달서구도 전국 6대 광역시 가운데 세번째로 부자가 많다. 국토교통부 자료를 보면 전국 229개 자치구 가운데 외제차 수입 상위 10곳 중 3곳이 대구에 있다. 빈부 격차가 심한 이유를 역외 소득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는 대선 때마다 디트로이트가 위치한 미시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경합주다. 미시간은 몰락한 공업지대를 뜻하는 ‘러스트벨트’의 대표 지역이다. 최근 디트로이트에서 바이오테크, 나노테크, 3D, 폴리머 등 신산업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미 정부의 뒷받침 덕분이다.

대선 후보들은 러스트벨트를 살리기 위한 정책을 펼치겠다고 선언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세계화와 자유무역주의로 피해를 입은 러스트벨트 노동자들은 보호무역주의와 반이민 정책을 주장한 도널드 트럼프를 적극 지지하면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러스트벨트 경합주를 간신히 되찾아오면서 정권을 잡았다.

한국의 정권도 대구의 경제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펼쳐 왔다. 쇠락한 섬유산업을 위해 수천억 원을 들이고 안경산업을 위해 특구 정책을 추진했다. 최근에는 자동차 부품산업을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기로 했다. 디트로이트처럼 대구의 경제도 살아날 수 있을까?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