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612년, 토지 부당거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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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년 전인 1612년 음력 2월 11일, 김택룡金澤龍은 종 금석金石이 현청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당 토지거래 혐의였다. 근자에 반유실潘有實과 김택룡이 토지 매매를 하면서, 관행적으로 매매 계약서에 금석의 이름을 올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현청의 사령들 역시 실소유주가 김택룡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김택룡을 대신해서 금석을 체포했던 것이다.

금석이 체포될 때까지 김택룡은 이 거래가 왜 문제였는지 알지 못했다. 지난 1월 17일 반유실이 밭을 판다고 해서 노구를 이끌고 가동檟洞까지 직접 걸음을 해서 확인한 땅이었다. 반유실이 3일 뒤인 1월 20일 찾아와서 땅값으로 무명 50필을 제안했고, 김택룡은 소 2마리와 옷 2벌, 그리고 무명 20여 필을 주기로 하면서 성사된 거래였다. 매매 계약서에 해당하는 명문을 꼼꼼하게 작성하고, 공증인까지 두었으니 매매는 잘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런데 이 거래가 문제였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김택룡도 아차 싶었다. 반유실의 땅은 국법으로 매매를 금하고 있는 수군전水軍田이었다. 당시 반유실은 수군(지금의 해군)에 편제되어 군역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장정들은 직접 군인으로 근무하거나, 또는 근무하는 군인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군역을 졌다. 일반적으로 군 복무자(이를 정병正兵이라고 했다) 1인에, 그 사람을 지원하는 사람(이를 보인保人이라고 했다) 2인으로 구성했다. 반유실은 수군을 지원하는 보인이었고, 이로 인해 그의 땅이 수군전에 속했던 듯하다.

수군전은 세금을 내지 않는 땅이다. 세금은 면제해 주되, 그것을 가지고 수군에 근무하는 1인을 지원하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이러한 땅을 자유롭게 매매하면 군역 시스템에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므로, 1425년 세종 때부터 군역에 관계된 땅은 함부로 매매할 수 없도록 했다. 특히 수군은 육군에 비해 고단한 군역이었기 때문에 역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도 많아, 수군에 편제된 사람의 땅도 함께 수군전으로 지정해서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땅을 매입했으니, 국법을 어기기는 어겼다.

그러나 김택룡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도 있었다. 저간의 사정을 확인해 보니, 이 같은 사단 뒤에는 이영선李榮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 반유실의 땅을 먼저 탐낸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인지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이에 앙심을 품고 반유실과 김택룡의 거래를 방해하기 위해 현감과 결탁했던 것이다. 이영선은 반유실이 땅이 수군전임을 알고 매매하려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현감이 가진 권력까지 동원해서 거래를 막았다. 당시 군역 관련 토지 매매는 문제를 삼아야 문제가 되는 거래였던 듯하다. 수군전 매매가 불법이기는 했지만, 관행적으로 법망을 피해 매매는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12일) 반유실은 서류를 갖추어 현청에 출두했지만, 금석은 풀려 나오지 못했다. 일단 수감되어 있는 금석부터 석방시켜야 했다. 사안을 조목별로 정리한 문건과 금석의 석방을 청원하는 편지를 현청에 보내고서야 겨우 금석이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이영선은 현감으로 하여금 김택룡과 반유실의 매매 계약을 무효화하도록 청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제멋대로 김택룡이 땅 대금으로 치룬 소까지 돌려주게 함으로써, 계약 전 단계로 상황을 물리고 있었다. 현감의 권한을 빌어 거래를 무효로 만들고, 이후 자신이 그 땅을 차지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던 것이다.

관권과 결탁한 이영선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며칠 뒤 석방된 금석 앞으로 군령을 전하는 공문서가 전달되었다. 금석이 속오군束伍軍에 편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속오군이 천한 신분에 있는 사람들까지 군인으로 편제하기 위한 부대였지만, 지금까지 군에 속하지 않았던 금석에게 갑자기 징집 명령서가 날아든 것이다. 그 이유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며칠 뒤 안동부에서 실시하는 군사훈련에 참가하라는 명령까지 동반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김택룡은 화를 감출 길이 없었다. 매매가 금지된 수군전을 팔려고 했던 반유실보다, 이영선에 대한 분노가 더 커졌다.

수군전은 제한이 많은 땅이다. 거래 자체가 불법인데다, 관행에 따라 매매를 했다고 해도 잘못하면 소유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영선이 현감과 결탁하면서 이 땅을 차지하려는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1612년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대략 10여 년 정도 지난 시점이어서, 전국적으로 황폐화 된 토지가 채 복구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군역을 지고 있는 논밭은 다른 토지들에 비해 상태가 양호했다. 경작 가능한 땅들이 주로 군역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 기록을 보면, 반유실은 땅을 팔고 군역을 피해 도망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빠른 처분을 위해 시세보다 낮게 가격을 불렀을 터이니, 이영선 입장에서는 헐값에 비옥한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영선은 수군전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 역시 해결할 자신이 있었던 듯했다. 문제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은 거꾸로 문제도 문제가 아니게 할 수 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공정한 심판자여야 하는 권력과의 결탁은 정상적 거래를 막고 자신들만이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수군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반유실의 약점은 이익을 가장 극대화 할 수 있는 포인트였고, 심판자의 옳지 않은 욕망을 채워주어도 충분한 이익이 남으리라는 계산도 했을 터였다. 정보를 가진 자가 ‘공정한 심판자여야만 하는 권력’과 결탁하여 이익을 추구할 때 생기는 상황이다.

땅을 통해 누군가 큰 이익을 꿈꾸게 되면, 약점에 의해 손해를 봐야 하는 반유실 같은 사람이 만들어지기 마련이고, 괜스레 계약서에 이름을 올렸다가 군에 징집당해야 했던 금석과 같은 사람도 만들어진다. 이 역시 결코 낮게 평가될 수 없는 손해들이지만, 공공의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문제가 몇몇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공정한 군역 시스템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거래문화, 그리고 공평한 세금 제도의 붕괴는 그 손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특히 땅에 대한 올바른 가치 판단의 붕괴는 후대로까지 그 손해를 대물림하면서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이번 LH공사 사건이 정말 문제인 이유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