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흔들리지 않는 빅터처럼 ‘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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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나보르스키(톰 행크스)는 미국 뉴욕의 JFK 공항에 살고 있다. 벌써 9개월째다. 화장실에서 세탁과 목욕을 하고, 목욕 가운을 입은 채 JFK 공항을 돌아다닌다. 짐 나르는 카트를 정리해 얻은 동전을 모아 햄버거를 사 먹으며 끼니를 때운다. 리모델링 중인 낡은 터미널에서 의자 등받이를 분리해 만든 간이침대로 새우잠을 잔다.

빅터가 JFK 공항에 노숙하게 된 건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다. 동유럽의 소국 크라코지아(가상)에서 부푼 꿈을 안고 미국 땅을 밟았는데, 그 사이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여권과 비자의 효력이 모두 정지됐다. 졸지에 무국적자 신문으로 전락해 뉴욕으로 나올 수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신세가 된다.

공항 환승 라운지에 갇힌 빅터는 그래도 의연하다. 영어 한마디도 못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면서도 공항 직원들과 친해진다. 여행 가이드북을 사서 영어를 배우고, 공항 직원들 사이에서 사랑의 메신저 역할도 한다. 라펠라, 스와치, 디스커버리의 판매직 아르바이트에 도전해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뛰어난 손재주로 공사 현장의 일을 얻고, 그렇게 번 돈으로 휴고 보스에서 슈트를 사 입는다.

빅터는 어느새 터미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된다. 특히 몸이 아픈 아버지를 위해 캐나다에서 약을 구했는데, 필요 서류를 챙기지 못해 체포될 위기에 놓인 러시아인을 도왔다가 영웅으로 떠오른다. 공항의 미관을 해치는 골칫거리로 여기며 어떻게든 그를 쫓아내려는 공항 보안 책임자 프랭크 딕슨(스탠리 투치)의 방해공작도 슬기롭게 대응한다. 심지어 아름다운 여승무원 아멜리아(캐서린 제타 존스)와 짧지만 아름답고 순수한 로맨스도 키워간다.

빅터가 뉴욕에 들른 이유는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골수 재즈 팬이던 아버지는 무려 40년 넘게 미국 유명 재즈 뮤지션들의 사인을 모아왔다. 하지만 색소폰 연주자 한 명의 사인만은 얻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빅터는 마침내 사인을 모두 모으고 집으로 향한다. 이때 영화에서 멋진 재즈가 흘러나온다.

<터미널(2004년)>은 미국 뉴욕의 JFK 공항 터미널을 무대로, 미약한 이방인에 불과했던 빅터가 ‘인간애’를 발휘해 차갑고 배타적인 공항 터미널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는 이야기다. 영화는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영국계 이란인 메란 카리미 나세리가 영국 유학 시절 이란 왕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이란에서 강제추방을 당했고, 1988년부터 꼬박 18년을 드골 공항 대기실에서 먹고 자면서 ‘터미널 맨’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터미널>은 흔히 기다림을 의미하는 공간이다. 여정을 떠날 곳, 또는 여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터미널은 사람의 인생에 비유된다. 터미널이 여정의 출발선이나 도착점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사이 어느 곳에서 헤매야 하는 경우가 많다. 노력은 하는데 언제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고,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바심이 든다. 남들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느낄 때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빅터는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환승 라운지에 여장을 풀고 숙식을 해결하며 하루하루 보낸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아르바이트도 구하지 못하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프랭크가 어떤 수작을 부려도 흔들리지 않는다. 공항 측에서 슬쩍 입국 심사대 문을 열어놓고 밀입국하도록 작당을 해도 빅터는 정당한 입국 자격이 부여될 날을 기다렸다.

결국 빅터는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고 공항 밖을 나선다. 영화를 삶에 비유해 보면 뭉클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영화는 출발한 곳과 도착할 곳, 그 사이 어느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고 자조하는 청춘들에게 위안을 건네는 것만 같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