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장애인은 자유롭게 볼 수 없는 ‘영화’…결국 ‘소송 제기’

시·청각장애인은 ‘정해진 극장과 시간대’에 ‘정해진 영화’만 볼 수 있어 시각장애인에겐 ‘화면해설’이, 청각장애인에겐 ‘자막’ 필요

23:17

시각장애가 있는 김준형 씨는 지난해 서울 내 규모가 큰 영화관을 찾아가 매표소에서 표를 끊으며 화면해설 여부를 문의했다. 그러나 김 씨는 영화관으로부터 “매주 셋째 주 화요일 오후 영화관람데이가 있다”며 그날 오면 화면해설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나 직장에 다니는 김 씨는 그 시간대에 영화를 볼 수 없었다. 김 씨는 “화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소리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면서 “감동적인 장면에선 같이 감동하고 웃기는 장면에선 같이 웃고 싶다”고 토로했다.

청각장애가 있는 함효숙 씨 역시 마찬가지다. 2011년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영화 도가니는 청각장애학생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권침해 사실을 그린 영화로 총 관객 460만 명이 보는 등 사회적 이슈가 된 영화였다. 이후 실제 배경이 된 사회복지법인 우석 내 시설이 폐쇄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이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했던 청각장애인들은 영화를 볼 수 없었다. 한국영화엔 ‘한글자막’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1년 당시 함 씨도 영화 도가니가 농인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으며 대사를 수화로 한다는 소식에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었다. 그러나 수화대사는 극히 일부분이어서 함 씨는 결국 90분 동안 스크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영화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함 씨는 “CGV에서 영화관람데이를 하면서 한 달에 한 번 한글자막이 있는 영화를 상영하긴 하지만 일정을 맞추기 어렵고 대부분 집에서 먼 극장에서만 하니 너무 불편하다”면서 “비장애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극장에서 볼 수 있는데 왜 농인들은 정해준 시간에 정해진 영화만 봐야 하나. 그거라도 해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시·청각장애인들이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공간과 시간대에 볼 수 있게 해달라며 법원에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시·청각장애인들이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공간과 시간대에 볼 수 있게 해달라며 법원에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러한 현실에 분노한 시·청각장애인들이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공간과 시간대에 볼 수 있게 해달라며 법원에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장애인정보문화누리, 법무법인지평 등은 17일 서울 종로 CGV피카디리1958 영화관 앞에서 시·청각장애인들에게 문화향유권을 보장하라며 차별구제청구소송 제기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이는 헌법 제11조, 장애인 권리에 관한 협약 제30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4조 등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제15조에 따라 300석 이상 규모의 영화상영관은 2015년 4월 11일부터 장애인이 문화예술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장애인은 비장애인처럼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공간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자유롭게 볼 수 없다. 이는 시·청각장애인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시각장애인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화면을 음성으로 해설해주는 ‘화면해설’이, 청각장애인은 ‘자막’이 필요하지만, 현재 이를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곳은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각장애인의 경우, 자막이 제공되는 외화영화만 볼 뿐 정작 한국영화는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각 영화사업자마다 한 달에 한 번 ‘장애인 영화관람데이’라는 이름으로 베리어프리 영화를 상영하고 있지만, 이는 한정된 영화관에서 정해진 시간대에 정해진 영화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원고로 참여한 시각장애인 2명에겐 화면해설을, 청각장애인 2명에겐 한글자막과 FM시스템을 제공하여 원고들이 한국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원하는 상영시간에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는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많은 문화를 접하고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영화를 시·청각장애인들은 즐기지 못한다”면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시대의 문화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기도 한데 영화를 보지 못하는 시·청각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고 이는 결국 소외와 차별로 이어진다”라고 지적했다.

이번 소송을 맡은 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이미 미국에선 장애유형에 맞는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에선 소니가 제작한 특수안경을 통해 청각장애인은 자막을 제공받을 수 있고 시각장애인도 화면해설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다”면서 “한국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 때 자막해설을 제공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재왕 ‘희망을 만드는 법’ 변호사 또한 “이 소송은 시·청각장애인만을 위한 게 아니다”면서 “이 소송의 수혜자는 한국어를 잘 못 하는 외국인, 어르신 등도 될 수 있다. 이들도 화면해설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송의 의미를 전했다.

김성연 장추련 활동가는 “현재 영화관들은 겨우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있는 ‘장애인 관람데이’을 운영하나 이는 장애인을 관객이 아닌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면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50% 할인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이는 생색내기에 불과할 뿐 시·청각장애인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게 더욱 시급하다. 현재 영화산업이 2조를 넘기고 있기에 이러한 정당한 편의제공은 ‘과도한 비용’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기사제휴=비마이너/강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