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의 줌in줌人] (71) 통곡의 벽에서

18:47
통곡의 벽에서, Momo 이민호, 2016.04.18.MON
통곡의 벽에서, Momo 이민호, 2016.04.18.MON

2003년 발생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기리기 위하여 중앙로역 대합실에 통곡의 벽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신문 기사를 통해 보았다. 참사로 친구를 잃은 나에게 그 소식은 매우 선명하게 다가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세월호 분향소를 지키기 위해 대구백화점 앞으로 향하던 중 잠시 통곡의 벽에 들렀다.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보존해놓은 잿더미 가득한 벽면에 누군가 “미안하구나”라고 적어놓았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이 매우 무거워졌다. 하지만 길을 지나는 이들은 ‘봄’의 기쁨에 취하여 축제를 벌이는 것 같았다.

희생자의 이름을 적어 놓은 벽면에서 친구의 이름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선명히 새겨진 이름 석 자를 통해 참사가 벌어진 13년 전 시간으로 생생히 돌아갈 수 있었다.

보슬보슬 비가 내렸던 2003년 2월 18일 화요일 늦은 밤. 지인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라디오를 통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소식을 접했다. 주변 지인들의 생사를 확인하였는데 모두 무사하다고 하여 안도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친구 하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믿기지 않아 한달음에 경북대학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짙은 연기 사이로 친구의 영정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빈소 한 켠에는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을 지은 아니,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부모님께서 조문객을 맞고 계셨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죄송스러워 머리 숙여 묵념했다.

슬픔이 산화되어 장례식장 내부 공기는 매우 무거웠다. 그 때문에 숨쉬기가 매우 힘들었으며, 이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황망한 죽음 앞에서 밥이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와 버렸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쭈뼛쭈뼛 앉아 있던 친구들은 “이게 무슨 일이고? 이게 말이 되나”라고 말하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친구의 친지들도 담배 연기만 내뿜으며, 침통한 얼굴로 주변을 서성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슬픔이 가시지 않았고, 어머니와 나는 떠난 청춘을 애도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며칠 후 친구를 잃은 어머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절로 가버리셨고, 친구의 가정은 가정의 기능을 모두 상실했다고 전해 들었다. 어머니께서는 “내 겉으면 같이 따라 죽었을 뿌끼다”라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훔치셨다.

그때의 그 슬픔, 그때로 모두 끝나버릴지 알았지만, ‘세월호 사건’이 또 다른 슬픔을 부활시켰다. 불과 2년 전이었던 4월 16일 오늘 진도 앞바다가 수백의 꿈과 함께 ‘세월호’를 집어삼켰다. 아니 무능한 우리 정부가 침몰시켰다고 말해야 옳다.

2년이 지난 오늘 그때 느꼈던 믿을 수 없음과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되살아났다. 아직도 차가운 바다를 헤매고 있을 청춘, 그 청춘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 기능을 상실했을지 생각해보면 가슴이 슬프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머리와 가슴이 가장 멀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머리와 가슴이 가장 가까워질 수 있음”을 “이성”과 “감성”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부디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의해 그곳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혼’이 치유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통곡의 벽에 새겨진 “소중한 임들이여! 우리 삶 속에서 다시 태어나소서”라는 주문을 통해 희생된 ‘혼’들이 이곳으로 잠시 돌아와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 문제로 치부하는 이들의 ‘머리’와 ‘가슴’을 가깝게 해주길 바란다. 아울러 미래의 누군가가, 과거의 슬픔을 불러오지 않기를 나처럼 ‘슬픔으로 시간여행’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