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초점] “그 정도는 다이어트지” 섭식장애의 또 다른 말 /조희수

09:52
Voiced by Amazon Polly

[편집자 주=청년초점은 청년 예비언론인의 눈으로 본 우리 사회에 대한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그 정도는 다이어트지. 너는 내 덕에 살 뺀 거야” 가족 모두가 함께하던 식사 자리에서 아빠가 언니에게 말했다. 이는 “어릴 때부터 틈만 나면 살이 쪘다는 핀잔을 줘서, 과자 하나를 먹어도 칼로리를 계산하며 아빠 몰래 먹어야 했던 게 엊그제 같아”라는 언니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언니는 ‘그 정도는 다이어트’라는 표현에 이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얼굴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특히 무언가 먹고 있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송곳처럼 꽂히는 “지금 니 몸은 너무 뚱뚱해”라는 아빠의 말은 언니의 ‘다이어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언니는 방 곳곳에 먹다 남은 과자를 숨기고, 급기야는 부작용이 심한 식욕억제제까지 처방받아 먹기도 했다. 이 정도로 과한 분투와 자멸의 과정을, 과연 다이어트라고만 불러도 될까?

대부분의 여성은 남성에 비해 다이어트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섭식장애를 앓을 확률도 높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하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섭식장애 진료 인원의 남녀 성비는 약 8대 2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4배 정도 높았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다이어트의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섭식장애의 영역인지다. 우리는 키에서 몸무게를 뺀 숫자가 125에 달할 때까진 살이 찔만한 그 무엇도 먹지 않는 거식증, 굶다가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살충제를 뿌려 버린 음식물 쓰레기까지 건져 먹는 폭식증 등 가장 자극적인 형태의 행위만을 섭식장애 증상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섭식장애의 본질은 먹는 것에 대한 태도와 감정 등에서 통제할 수 없는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칫 다이어트라 여기기 쉬운, 음식 섭취가 두려워 먹기를 피하는 정상 체중의 거식증 또한 섭식장애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대개 섭식장애는 미디어가 과도하게 노출하는 마른 여성의 이미지에 따라, 일부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여성만이 겪는 광증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섭식장애는 일부라기엔 많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미디어 외 수많은 일상의 요인들에 의해 발생한다. 그중 가족도 중요한 요인이다. 특히 가족주의가 짙은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수 있다. 아빠는 이것저것 집어먹으며 정상체중인 언니에게 “살이 좀 찐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키는 166cm, 몸무게는 41kg인, 누가 봐도 저체중인 나에겐 “너무 말랐어. 45kg까지 되면 딱 보기 좋겠다(그 몸무게 역시 저체중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 속에서, 언니의 경우 언젠가부터 식욕이 줄어든 거 같다는 자기최면을 하며 한동안 밥을 굶었다. 나의 경우 마른 몸이 좋다는 가족 내 분위기 속에서, 내 건강을 해치는 저체중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게 됐다.

섭식장애의 범위와 원인에 대한 몰이해는 섭식장애 당사자들의 상황을 악화시킨다. 아빠는 언니의 상태를 그저 다이어트라며 섭식장애의 범위에 두지 않았고, 자신의 발언이 섭식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언니는 친구에게 추천을 받아 다이어트 약, 즉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아 먹었다. 그 약은 심각한 우울감은 물론 불안감, 입 마름, 어지럼증, 불면증 등 부작용이 있었다. 이는 언니만의 상황은 아니다. 2021년 의료용 마약류 취급 현황 통계에서는 식욕억제제를 처방받는 사람이 약 127만 명에 달했다.

우리가 흔히 미디어에서 보게 되는 거식증, 폭식증 수준이 아니더라도 섭식장애는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해들리 프리먼은 『먹지 못하는 여자들』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입원이 필요할 정도의 거식증이 아니라는 이유로 적절한 치료와 검사, 인정을 받지 못해 오히려 평생 섭식장애 재발 위험성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섭식장애의 범위와 원인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가 섭식장애 당사자 스스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몰이해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일례로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5일까지 열린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섭식장애의 다양성을 알리고, 섭식장애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행사였다. 섭식장애 인식 개선을 위한 이러한 시도가 늘어난다면, 더 이상 사각지대에 있는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혼자 병들어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