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된 HIV 감염인 장애인 등록, 국내 최초 소송 첫 공판

‘HIV 감염인 장애인 인정’ 국내 첫 소송 대구서 시작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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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감염인도 장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대구에서 국내 최초로 HIV 감염인 장애인 인정을 위한 소송 첫 공판이 열렸다. 대구 남구청이 HIV 감염인 여운(가명, 70대) 씨가 신청한 장애인 등록을 절차 문제로 반려했고, 여운 씨는 대구 남구청을 상대로 반려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HIV감염 이후 사회생활 못해
장기간 치료로 많은 합병증도 앓아
2023년 9월 남구 한 행정복지센터에 장애인 등록 신청

여운 씨는 HIV 감염 이후 HIV에 대한 사회적 시선 탓에 감염 전과 같은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병원에 가도 별다른 설명 없이 여운 씨 이름표에만 빨간색 스티커가 붙었고, 입원한 병실에는 다른 사람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례를 경험하면서 여운 씨는 차라리 ‘HIV 감염인’이 아닌 ‘장애인’이라고 불리면 주변의 시선도 누그러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HIV에 감염되더라도 약(항바이러스제)을 복용해 관리하면 타인에게 전파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데도 HIV 감염인으로 불리는 순간부터 사회에서 배제됐다. 여운 씨는 6개월 단위로 면역 수치(CD4, T형 림프구)를 검사하고 있으며 면역 수치도 520cell/㎣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비감염인의 면역 수치는 600〜1,500cell/㎣로 알려져 있으며, 대한에이즈협회는 면역 수치가 200cell/㎣ 이하로 떨어진 감염인을 에이즈 환자로 분류한다.

꾸준한 관리를 통해 면역 수치를 높였지만, 그만큼 잦은 약 복용 탓에 감염내과, 내분비내과, 신경과, 심장내과 등 9가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신체 기능 저하는 여운 씨가 장애인 등록을 원하는 또다른 이유다. 지난 3월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에 따르면 담당 의사는 여운 씨가 대사 질환, 폐색전증,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 등 장기간의 HIV 치료와 관련된 많은 합병증도 앓고 있다고 소견을 밝혔다.

2023년 9월 여운 씨는 대구 남구 한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해 장애인 등록을 신청했지만, 장애정도 심사용 진단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청을 반려당했다. 이에 여운 씨는 대구 남구청을 상대로 반려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여운, “장애인등록 적부 심사했어야”
남구청, “장애 상태 확인할 서류 제출하지 않아 반려”
재판부, “HIV 감염인 장애인으로 인정해야 하는지가 핵심”

17일 오전 10시 40분 대구지방법원 행정1단독(재판장 배관진)은 행정소송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여운 씨 변호인과 남구청 측은 각각 변론 요지를 설명했다.

여 씨 변호인 측은 장애 유형을 정의하는 장애인복지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HIV 감염인의 면역장애의 장애 정도를 판정할 기준이 없는 상황이며, 보건복지부고시에서 장애정도판정기준의 문리적 해석만으로 장애정도를 판정하기 어려운 경우 장애정도심사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게 해 여운 씨 또한 예외적 심사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변호인은 HIV 감염과 마찬가지로 기준이 없어 장애정도 심사용 진단서를 받지 못한 뚜렛증후군, 복합통증증후군 환자가 소송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하고 장애인으로 인정받은 사례를 HIV 감염인 장애 인정 필요 근거로 제시했다. 형식적인 기준이 아닌 신청인의 실질적인 사정을 고려 해야 한다는 취지다.

설령 면역장애 등으로 등록이 어렵다 하더라도 HIV감염에 따르는 각종 합병증, 질환을 감안해 기존 장애 유형을 통한 장애 등록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류를 갖추지 못했다고 반려하지 말고, 최종적으로는 장애인등록 적부를 심사했어야 하는데, 대구 남구청은 이를 지키지 않아 위법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변호인은 “원고는 단순히 등록 가능한 15가지 장애 유형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쉽게 배제할 수 없는 설명하기 어려운 장애를 갖고 있다”라며 “원고가 등록 신청한 장애 유형이 HIV 감염을 원인으로 한다는 사정만으로 장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장애 정도를 나누는 이유는 관리상 편의를 위한 것이고, 장애인으로 등록될 수 있는 자를 그 범위에서 제외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장애의 정도가 시행규칙에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 등록 신청을 거부해서는 안 됐다”라고 지적했다.

남구청 측은 답변서를 통해 장애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하지 않아 반려한 것으로, 이는 민원처리에 관한법률상 적법한 절차였다고 해명했다.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장애인 등록을 신청하려는 사람은 등록대상자의 장애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또한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은 요건이 미비한 민원문서에 대해 일정한 보완 요구를 민원인이 따르지 않을 경우 이를 반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날 남구청 측은 “장애 등록 서비스 신청시 서류가 있어야 국민연금공단에 심사를 의뢰할 수 있다. 서류도 없고 보완도 되지 않아 반려한 것”이라고 말했다.

변론기일에서 재판부는 남구청 측에 “피고는 형식적인 부분만 답변했다. 구체적으로 반박하는 답변을 해 달라”라며 “(원고가 제시한 사례인) 뚜렛증후군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도 HIV 감염인이 실질적으로 장애인으로 인정해야 하는지가 핵심이다. 시행령과 시행규칙 요건을 따랐다고만 하지 말고, 이에 대한 입장을 답변해달라”라고 지적했다.

다음 재판은 오는 5월 29일이다. 재판에 앞서 HIV장애인인정을위한전국연대는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HIV 감염인 장애인정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17일 오전 9시 30분 여운 씨가 대구지방법원 앞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들은 “HIV는 의학 발전으로 지속적 약 복용으로 감염인도 면역력을 유지하며 살 수 있게 됐지만, 장기간 약물을 복용하는 과정에서 만성적 염증, 심혈관, 뇌혈관 질환 등 각종 질환을 얻을 수 있다. 여운 씨도 9개 과 진료를 받고 있는데 그들을 위한 돌봄과 요양의 지원은 전무하다”라며 “HIV를 향한 낙인 탓에 감염인은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제약을 갖게 되는 사회적 장애 상태에도 놓인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번 소송은 한 사람이 아닌 사회에 만연한 차별에 저항하는 일이다. HIV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인정해 차별받고 소외되는 사회의 모든 소수자들도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여운 씨는 “병원에 처음 갔을 때, 링거를 맞았는데 간호사가 빨간 딱지를 붙이더라. 지금 와서 보니 그게 차별이었다. 여러 차별 속에서 살다 보니 차라리 장애인으로 인정된다면 장애인이라 그러지 HIV 감염인이라고 하진 않을 거 같았다“라며 “나 하나가 아닌, 많은 HIV 감염인이 차별받지 않고 편견 없는 사회에서 생활하고 싶다. 그것이 이번 소송의 목표다. 우리 사회 행정이 차별을 두지 않고 감염인을 장애로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