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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일. 고공농성을 시작해, 해가 바뀌고, 푹푹 찌는 옥상의 여름이 다시 찾아오고, 윤석열 12.3 내란이 시민들의 일상을 뒤흔들다가 파면되고, 조기 대선도 끝나가는 6월 1일이 되기까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옥상에 올라간 해고 노동자 박정혜 씨는 원치 않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정혜 씨는 이날부터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고공농성을 이어 온 사람이다.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이란 말이 뼈아픈 건 아래에서 옥상을 바라보는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서울, 경기, 부산, 대구, 울산 등 전국에서 정혜 씨와 함께 이날을 보내기 위해 경북 구미시로 모였다. 이들은 구미역에서 정혜 씨를 만나기 위해 약 12km 거리 4시간 30분가량을 걸었다.
대선을 앞둔 거리, 한국옵티칼로 향하는 길에는 대선 후보들의 현수막이 뜨거운 여름바람에 펄럭인다. 현수막에는 ‘진짜 대한민국’, ‘미래를 여는 선택’, ‘여고 나오신 우리 어머니를 모욕하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다. 한국옵티칼을 언급하는 현수막은 보이지 않는다.

현수막들 아래로, ‘말벌 시민’들이 들고 온 깃발이 휘날린다. ‘마법소녀노동조합 부산지부’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나온 이는 피린(가명, 해운대구, 32) 씨다. 피린 씨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이 쓴 트위터를 보고 부산에서 구미로 향했다. 한국옵티칼 투쟁에 연대하는 ‘희망뚜벅이’에는 이미 몇 차례 참석한 적 있어서, 실제로는 ‘희망 마라톤’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바쁜 걸음을 걸었다.
“불탄 공장 위에 여성 노동자가 아직도 있잖아요. 빨리 내려오게 해드리고 싶은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아서 절망스러워요. 많은 분들이 국회 청원이라도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전에 희망뚜벅이 왔을 때, 제가 비건인데 김진숙 동지가 본인 드시려고 했던 하나밖에 없는 떡을 주셨어요. 환대받는 기분이었어요. 다른 투쟁에도 나가고 있어요. 한 명이라도 더 있어서 힘을 전해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지금 내란으로 인한 대선이잖아요. 그런데 권영국 후보만 농성장을 방문했더라고요. 며칠 뒤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건데, 그 정부에서는 반드시 한국옵티칼 문제를 포함해서 고공농성 중인 3곳(한국옵티칼, 한화오션, 세종호텔)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해요.”(피린 씨)

피린 씨처럼, 고공농성 511일을 맞는 정혜 씨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이들이 구미시의 거리에 줄지어 늘어섰다. 이들은 이번 내란 사태를 계기로 적극적으로 투쟁 현장을 찾아 나서고 있다. 광장에서의 외침이 윤석열 파면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의지다.
달곰이지부 깃발을 손에 든 넴(가명, 대구 서구, 37) 씨는 “이번에 광장에서 알게 된 건, 나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같이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싸움이라는 생각으로 왔고, 같은 생각으로 태경산업, 이수기업, 니카코리아 투쟁에도 함께 했다”며 “한국옵티칼은 한국에서 외투기업으로서 혜택만 받고 책임은 외면하고 있다. 국가 또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국가와 기업이 나서야 한다. 최장기 고공농성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그만큼 버틴 동지를 생각하면 씁쓸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마음을 생각하면 까마득하다”고 말했다.
윤별꽃(가명, 울산, 26) 씨는 “한국옵티칼에는 처음이다. 동지가 외롭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왔다. 어서 이 고생을 끝내고 승리해서 땅을 밟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문제에 꾸준히 지면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정보라(48) 작가도 김진숙 지도위원의 제안을 듣고 뙤약볕 아래에 와서 함께 걸었다. 정 작가는 “옥상 위의 체감온도는 아래보다 훨씬 높다. 저기서 또 여름을 나게 할 수는 없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한국옵티칼 문제는 옵티칼 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외투자본이 온갖 혜택 받고, 나갈 때는 수백 명 실업자 양산한다. 먹튀방지법이 정말로 필요한데 내란쟁이 때문에 그런 걸 논의도 못했다. 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닌 외투자본의 문제기 때문에 반드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희망 뚜벅이를 제안한 김진숙 지도위원도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가 고공농성 문제잖아요. 고공에 있는 분들도 대선에 희망이 컸을 텐데 권영국 후보 빼고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아요. 한화오션 김형수는 하청 노동자 문제, 세종호텔 고진수는 정리해고 문제. 박정혜는 정리해고와 먹튀 외투자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죠. 한 사업장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사회의 문제인데 의제화는커녕 이렇게 언급조차 하지 않는 대선이 과연 올바른가요. 적어도 민생을 이야기하지는 않는 선거죠. 그 대신 치졸한 설화만 난무하는 선거가 됐어요. 박정혜는 이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투쟁을 하고 있어요. 옥상의 더위는 상상도 못 하거든요. 고공농성을 정치가 언급하지 않아서 비통합니다. 그래서, 우리라도 박정혜를 위로하려고, 끝까지 함께 하려고 가고 있습니다.” (김진숙)
이들은 오후 2시 30분께 한국옵티칼에 들어섰고, 정혜 씨가 있는 공장 아래에 둘러섰다. 정혜 씨에게 꽃을 전달하고,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불렀다.
정혜 씨는 “평생 받을 꽃 다 받고 있다. 동지들에게 많이 힘 받고 있다. 하루라도 동지들과 지내면서 웃고 얘기하면서 많은 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고공에 있으면서도 나름 행복하다”며 “응원해 주셔서 감사하다. 동지들이 있기 때문에 저희도 꼭 승리하라 믿을 수 있다. 서로 응원하면서, 하루빨리 이겨서 밑에서 동지들을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한국옵티칼에 도착한 류소연(35, 경기 고양시) 씨는 “내란 사태 이전에는 윤석열 정권에 회의적인 마음은 있었지만 나서지는 못했다. 남태령 집회 경험을 전해 들으면서 사람들과 몸으로 함께 하는 것이 힘을 보태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며 “박정혜 동지를 직접 보면서도 힘내라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저희가 열심히 할게요’라고 했다. 최장기 고공농성을 축하할 일은 아니지만,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설명했다.


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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