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영화감독에게 분신 같은 작품이 공개되는 첫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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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d by Amazon Polly

6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영화로 인해 벌어진 상황

20대와 30대 중간에 걸친 나이로 보이는 여성이 큼지막한 LCD TV 모니터를 더운 날씨에 낑낑대며 운반하는 중이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덩치가 큰 TV를 보호 덮개도 없이 들고 옮기느라 주름 가득한 우거지상에 땀은 줄줄 흐른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 간신히 도착한 그녀는 주소를 두리번대며 확인한 후 막 문을 닫으려는 엘리베이터에 간신히 들어간다. 같은 층에 내린 후덕한 체구의 남성과 그녀가 향하는 번지수는 공교롭게도 같다. 알고 보니 방문하려던 선배네 집에서 함께 사는 사람, 즉 선배의 남편인 것.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둘은 함께 들어가게 된다.

한창 손님맞이 채비에 분주하던 선배 언니는 모임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왜 이리 일찍 왔냐며, 저 커다란 TV는 대체 왜 들고 온 것인지 궁금해한다. 물론 주인공에겐 비밀 계획과 깜짝 이벤트가 있긴 하다. 실은 그녀는 영화감독 지망생이고, 선배는 6년 전 주인공이 연출한 장편 <사랑의 보풀>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촬영 후 감감무소식이었고, 선배와 연락도 자연스럽게 뜸해졌다. 선배가 여러 차례 연락해도 잘 받지 않던 그녀가 오랜만에 집을 찾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바로 그 문제의 작품이 뒤늦게 영화제에 초청받아 첫 상영을 앞둔 것이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그런데 선배 언니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는 영 다르다. 혹시 자신이 등장한 분량을 삭제할 수 있냐고 묻거나, 너무 오래 지나 기억도 잘 안 난다는 반응이다. 남편과 곧 해외 이주를 앞두고 새 삶을 꾸리느라 자신과 함께 도원결의하듯 영화 열정을 불태우던 선배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기껏 TV 짊어지고 온 건 외장 하드에 고이 간직된 가 편집본을 선배에게만 보여주고 싶었던 건데, 일부러 다른 지인을 피해 한참 일찍 왔건만 배우자가 함께 있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기대했던 상황과 천양지차다.

영화를 보여달라고 성화를 부리는 선배 부부와 대화를 나누며, 주인공이 영화에만 오로지 몰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초면인 선배 남편은 서먹한 분위기를 풀고자 자신도 영화에 관심과 조예가 있다는 걸 어필하려 노력하지만, 그녀는 싸늘하게 되받아치며 영화는 유튜브나 다른 영상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자부심을 열정적으로 피력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마지못해 불청객 관객을 추가해 <사랑의 보풀>을 재생하기에 이른다. 과연 선배는 완성된 영화에 만족할까?

‘영화감독’이라는 특별한 생물종의 진면목

주인공 ‘정현’은 시작부터 평범한 또래와 동떨어진 언행이 확연하다. 자기만의 관심사에 몰두하는 바람에 타인과 대화가 영 부자연스럽다. 조금만 관찰한다면, 정현은 자기 계획한 대로만 움직이려 한다는 걸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자신이 주목한 상대에게 뭔가 전하고픈데, 중간에 끼어드는 타인은 견디기 힘들어할 정도로 불편하다. 그게 선배의 남편일지라도 말이다. 사회생활 좀 해본다면 아무리 초면이라도 적당히 예의는 차려가며 처신하는 게 상식일 텐데, 정현의 태도는 뭔가 석연치 않다. 아무리 봐도 선배의 남편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주연 배우를 빼앗아간 원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런 속내이다 보니 선배의 남편 ‘석진’이 친근한 태도로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애써 늘어놓는 잡담에 가시 돋은 반응으로 일관한다. 중간에 낀 선배 ‘다린’이 민망해질 정도다.

아주 어린 나이도 아닌데 왜 정현은 그런 소아병적 태도를 보이는 걸까? 그녀에겐 자신과 선배가 공유하는 영화만이 중요해 보인다. 그 영화에 자신이 들인 정성과 노력은 마치 본인의 일부를 떼어내 농축한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과 자랑 섞인 자부심을 담아 그동안 (영화제에 초청받지 못한 자격지심에) 애써 외면하던 다린의 연락에 마침내 응답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도입부에서 낑낑대며 텔레비전을 짊어진 정현의 행색은 그녀의 속마음과 비교하면 별것도 아닌 셈이다. 그런 감회어린 순간에 석진은 불청객이자 훼방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다린의 반응은 정현의 기대와는 판이하다. 게다가 다린은 정현이 스스로 영화와 쌍방향으로 사랑하며 대화하는 관계라 자부하는데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녀의 선언이 과잉된 선민의식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자신은 오직 영화만을 위해 살며 생각하고 노력한다는 정현의 선언은 말 그대로 ‘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과 다름없다. 자신은 또래의 평범한 친구들과 달리 영화란 예술에 몸과 마음 모두 전력으로 바치며 오직 영화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그 성스러운 여정에서 이탈해 평범한 남자와 소시민이 된 선배가 원망스러워 미칠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런 난장판이 벌어지는 걸 보고 있자면, 어느새 영화제에서 너무 흔하게 접하게 되는 영화학과 졸업작품의 망령이 스멀스멀 밀려든다. 영화가 좋아서 인생을 걸어보려 노력했지만, 뜻한 바와 다르게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자조하는 군상들로 가득한 세계의 풍경이다. 오로지 영화학과 출신이나 영화 관계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풍경을 상영관 안에서 어리둥절한 관객과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은 ‘또 맨날 보던 현실의 반영이냐?’ 넌더리를 내는 영화인들의 상반된 반응이 극명하게 구분되는 그런 풍경이 소환된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이런 ‘학생영화’는 대개 한때 유행을 타고 전국에 50개는 족히 넘는, 대부분 수도권에 몰린 영화학과 출신들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영화학과 정규과정도 없는 지역에서 활동하던 감독의 신작에서 왜 굳이 이런 흐름에 편승한 것과 같은 풍경이 나타난 걸까? 이건 어떤 징후의 차원인 것인가. ‘대구 영화’ 하면 근래 몇 년 동안 떠올리는 인상과는 퍽 거리감이 느껴지는 묘사가 <월드 프리미어> 전반의 정서를 지배하는 수수께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비밀을 풀기 위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정형화된 영화계 공식 안에서 길을 잃은 청년 영화인의 초상

영화 속 감독 정현은 장장 6년 걸려 (아마도) 첫 장편 영화 완성 직전에 도달했다. 영화제에도 초청을 받았다니 기대와 걱정이 소용돌이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몰아치고 있을 테다. 처음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뻤을 테다. 하지만 제작과정에 돌입하면서 상상을 초월한 온갖 사건과 사고들,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촬영에 인간애를 상실하면서 매달려 간신히 완성한 다음엔 자신과 고독한 싸움인 편집과 후반 작업이 뒤를 따른다. 이제야 세상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 내걸고 공개할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해도 다음 단계의 난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거푸 쳐들어온다.

그 1차 관문이 바로 영화제의 부름을 받는 통과의례다. 누구나 부산국제영화제, 칸영화제에서 자신의 작품이 초대되어 주목받고 싶다. 하지만 눈높이를 낮추더라도 일단 어디건 초청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공식적으로 자신의 영화가 세상에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영화제 행사가 진행되는 번듯한 극장에서 공식 상영되는 과정 전후로 내 영화가 인터넷에서 검색도 가능해진다. 이제 어디 가서 ‘감독’이라 말해도 먹히는 최초 단계인 셈이다.

기왕이면 영화제에서 반응이 좋아 상을 타거나 다른 영화제의 호명으로 거듭 연결될 기회도 얻고 싶다. 그렇게 자신의 수고에 정당한 보상을 쟁취한 뒤엔, 다음 작품을 위한 제작 지원이나 투자를 받고, 장편이라면 배급사와 연결해 극장에서 정식 개봉에 이르는 여정이 대개 1편의 영화가 걷게 마련인 공식 코스가 된다. 영화 속 정현은 바로 이 긴 여정에서 결정적 분기점 직전에 간신히 닿은 것이다. 여기까지 6년 걸렸다. 실제 제작 준비과정까지 치면 1, 2년은 간단히 추가될 테니, 정현의 인생에서 <사랑의 보풀>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쐐기로 손색이 없는 비중이다. <반지의 제왕> 속 마왕 사우론과 절대 반지의 관계처럼.

이쯤 설명을 읽다 보면, 영화 속 정현의 안하무인 자기중심 태도가 조금은 이해도 될 법하다. 선배에게 열정적으로 영화와 자신의 신성한 관계를 강조하지만, 정작 잔뜩 긴장한 나머지 술에 몰래 의존하거나 자기 영화 주인공에게 처음으로 영화를 보여줄 때 중압감에 시달리는 속내마저 딱할 정도로 인간적이다. 다린은 그런 정현이 속상하면서도 안쓰럽다. 왜 저렇게 외통수로 집착하는 걸까? 물론 자신도 한때 그랬으니 심정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 있을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바퀴벌레 나올까 겁내며 돈 없고 가난한 삶을 무작정 지속할 수 있는 걸까? 요즘처럼 온라인에 남들과 비교하며 부를 과시하는 콘텐츠가 넘치는 세상에서 언제까지 인내할 수 있을까? 다린은 자신이 안타깝게 포기한 순간을 회상하며 티격태격하지만 너무나 아끼는 후배이자 ‘동료’ 정현을 설득하려 애쓴다. 영화가 너무 좋아 죽고 못 살던 초심이 어느 순간부터 아집으로 기울어진 건 아닌지 염려가 된다. 정말 영화를 사랑한다면 과도한 집착 대신에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을 때 하면 될 일 아닌가. 백세 시대에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기회는 돌아올 수 있음을 인생 선배인 다린은 정현에게 설파한다.

1997년생 단편영화 감독의 심리를 분석해볼 시간

그러나 젊은 정현은 아직 곧이곧대로 선배의 애타는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린이 참지 못해 지적하는 삶의 각기 다른 조건, 가족 부양이나 노후준비 같은 당면 과제를 본격적으로 접한 적 없기에 부리는 치기로도 보인다. 관객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그런 주인공의 외고집을 관찰하며 중간 판단을 내리기 시작할 테다. 석진처럼 그냥 재미있는 영화 틈나면 보고 기회되면 영화 게시판에 후기도 남기면 족하다고 여길 대다수 관객에겐 정현의 고집은 억지로 비칠 구석이 적지 않다. 다린처럼 일정한 접촉면과 공감대가 있는 이라면 복잡한 심경이 될 수밖에 없다. 정현과 같은 부류라면 혹자는 동병상련, 혹자는 자석의 같은 극이 서로 밀어내듯 몸서리를 칠 내용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월드 프리미어>는 김선빈 감독의 6번째 단편영화다. <돌고래 마라톤> (2020), <고백할거야> (2020),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 (2021), <소녀탐정 양수린> (2023), <수능을 치려면> (2023)에서 이어진 최신작이다. 대구영화학교 2기 출신으로 동 세대 지역 감독 중에도 뚜렷한 실적과 반응을 이끌며 다수의 영화제에 초청되고 수상실적도 적지 않다. 흔히 ‘대구 독립영화’를 언급할 때 연상하는, ‘사회적 주제를 사실적으로 담담히 표현하는’ 경향에 묶이지 않고 코미디 정조와 장르물 방식을 결합해 독자적 위치를 형성하는 창작자이기도 하다.

그런 감독의 위상은 영화 속 정현과는 사뭇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예전 작업 스타일과 단절된 것까진 아니지만, <월드 프리미어>는 분명히 차이나는 질감을 가졌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전적인 사연을 수록한 작업에도 손대게 마련인데, 감독은 이미 2021년 코로나 시기 영진위 제작 지원으로 완성한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에서 잘 풀리지 않는 감독 지망생을 소재로 구사한 바 있으니 굳이 이 시점에 직선적으로 청년 영화인의 고뇌를 전면에 내세운 사연이 뭔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게다가 영화 속 정현에 현실의 감독을 단순 대입하기엔 분명히 어폐가 있어 보인다. 적어도 매번 신작을 선보일 때마다 큰 상은 몰라도 영화제는 남부럽지 않게 순회하는 경력의 감독이니 말이다. 그래서 흔히 ‘오너캐’라 불리는, 감독 자신의 반영으로 정현을 받아들이기엔 과도한 자기부정 또는 자조적 태도 아닌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영화 안과 밖의 감독은 어떤 연관성으로 묶일 것인가?

차이라면 하나 확연히 있긴 하다. 정현은 장편을 완성해 영화제 상영을 앞둔 상태다. 반면에 김선빈 감독은 단편은 상당한 주목과 반응을 얻었으나 아직 장편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선보인 적은 없다. 대개 누구나 떠올리는 공식처럼, 단편으로 일정하게 영화제와 평단의 조명을 받으면 당연한 통과의례처럼 장편 제작에 도전하는 국내 영화계 풍토에서 이제 현실의 감독이 당면한 과제가 된 상황이다. 감독이 속으로 짊어지고 있을 중압감이 거울 반영으로 <월드 프리미어> 속 정현 캐릭터로 형상화된 것이라면 본 작품의 일탈, 혹은 외도는 그런 창작자의 내적 고뇌로 해석하는 데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물론 감독이 실제로 장편 출사표를 던졌다는 전제 아래 성립될 풀이이긴 하다.

그렇다면 <월드 프리미어>는 김선빈 감독의 작품 연보에서 일정한 예외 사례로 분리 추출해 바라봐야 할 테다.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가 코로나 시절 창작활동이 예정대로 진행되기 어려운 조건에서 소품 형태로 제작된 것과 동일한 범주로 본다면 감독이 장편으로 전환을 준비하며 당면한 숙제를 투영한 작업으로 논리적 적합성이 충분히 갖춰진다.

분신과 같은 영화가 처음 공개되는 순간의 매혹을 전하다

다시 <월드 프리미어> 작품 속으로 돌아가자. 우여곡절 잔뜩 겪으며 결국 <사랑의 보풀>은 비공식적인 ‘월드 프리미어’를 진행하게 된다. 영화제를 다녀보면 자료집이나 홈페이지에서 접하곤 하는 그 ‘월드 프리미어’다. 다수의 영화제가 자신의 상영작 중 상징이라 할 경쟁 부문에 ‘프리미어’, 즉 최초상영 기준을 걸곤 한다. 자기 영화제의 권위와 수완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의 일환이다.

몇 가지 구분 기준이 편의상 나뉘는데, 말 그대로 세계 최초 공식 공개는 ‘월드 프리미어’, 자국 외 최초면 ‘인터내셔널 프리미어’, 한국에서 첫 상영이면 ‘코리안 프리미어’ 식이다. 당연히 ‘월드 프리미어’가 가장 높은 수준의 가치와 상징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칸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은 반드시 월드 프리미어 기준을 고수한다.

그만큼, 감독이 자신의 분신과 같은 신작을 어디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낼지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절대다수 감독에게 월드 프리미어 선택권은 없다. 배우가 아무리 연기력을 뽐내려 해도 감독과 제작진의 선택을 받아야만 기회가 열리듯, 감독도 마치 심판관이 된 것처럼 신예 영화인에게 내려지는 영화제의 선택에 좌지우지되는 신세다. 누구나 소위 3대 영화제에 자기 작품을 공개하고파도 현실은 칸-베니스-베를린은 고사하고, 부산이나 전주국제영화제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화에 인생을 걸고자 하는 이들에게 영화제는 품은 뜻을 펼치기 위한 과정 일부가 아니라 마치 전부가 된 것처럼 군림하게 된다. 주객전도가 달리 없다. 기왕 영화제에 걸려야 한다면 크고 주목받는 자리에 걸리고 싶다는 욕망이 비 틈을 파고든다. 그렇게 자신이 노력과 열정을 쏟아부어 관객과 소통하고픈 열망은 어느새 남들 기준에 따라 좌우되며, 온라인 공간에서 허깨비처럼 떠돌며 소모되는 무슨 무슨 등급 기준처럼 전락하고 말았다. 정현이 처한 주화입마 위기, 다린이 지적하던 강박증의 근원은 그런 현상을 충실히 반영한 바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처음엔 원하지 않았을 형태로 <사랑의 보풀> ‘월드 프리미어’ 시간이 깃든다. 영화 내내 짓눌린 듯 찌푸리거나 공허한 눈빛으로 일관하던 정현의 표정이 바뀐다. 영화 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과거 추억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어 있다. 처음 영화를 보게 된 이들은 호기심 속에 낯선 풍경을 풀이하려 애쓴다. 비로소 되찾은 영화 열정과 반가운 재회가 어둠 속에 깔린다. 영화와 함께하는 인생의 다음 단계를 앞둔 1997년생, 서른을 앞둔 지역 창작자의 자기 위로이자 내적 반영으로 <월드 프리미어>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아는 감독 ‘김선빈’의 작품 세계와 원심력으로 연결된 소품으로 바라볼 만하다.

물론 모든 걸 긍정적으로 이해하진 않는다. 영화 속 정현에겐 결핍된 지점이 명백하게 존재한다. 주인공은 과잉이라 할 정도로 열광적인 영화 지상주의자로 형상화된다. 영화가 아니면 삶은 의미가 없다는 각오로 무장한 정현이지만, 작품 내내 그가 소중히 여기는 영화에 무엇을 녹여내려 하는지, 영화는 어떠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시각과 주제의식은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만 전해질 뿐이다. 과연 그가 (그리고 화면 밖 현실의 감독이) 자아실현 외에 어떤 목적으로 타인과 소통 수단을 영화로 설정하고 매달리는지 실체는 모호하기만 하다. 그런 작가의 시각, 세계관의 정립 문제가 지금 현실의 영화창작세대에게 언제가 되건 찾아올 근본적인 숙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감독의 이후 작업에서 영화제 선택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세상에 보여주고픈 방향을 설정하는 과업은 우회할 수 없는 문제가 될 테다.

<작품정보>

월드 프리미어
World premiere
2025|한국|코미디
미개봉|34분|전체관람가
감독/각본 김선빈
PD 황영|촬영/조명 전상진|동시녹음 송현직|조감독 박찬우|
스크립터 장현빈|미술 김은영|음악 동경하다, 이선경, 한서진
주연 정회린(정현 역), 김연교(다린 역), 문상훈(석진 역)
출연 조영근(성우 역), 장병기(진영 역), 윤 진(사장 Voice 역),
김노일, 김지윤, 남가원, 성광제, 양지은, 이다운, 이석현, 전여울,
전혜림, 정채은, 조윤영, 채승우, 한승아, 황 영(이하 관객 역)
제작 아늑한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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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2025 12회 춘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김상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