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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회사원 ‘인식’은 최근에 아들을 잃었다. 성실한 그에게 회사 상사와 주변 지인들은 위로를 전한다. 그는 고등학생 딸과 치매 기운이 있는 노모와 함께 산다. 할머니를 살뜰하게 돌보던 아들이 떠난 후, 노모의 증상은 심해지기만 한다. 자식을 잃은 상실감에다 일에 바빠 소원하던 딸과의 거리감도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과묵한 인식은 자식 된 도리에 아빠 노릇, 직장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몇 겹의 압박에 시달리는 중이다.
주변에선 그런 인식에게 노모를 요양원에 보내면 어떻겠냐고 권한다. 처음엔 어찌 그럴 수 있냐며 펄쩍 뛰는 인식과 딸 ‘서진’이지만, 출근과 등교를 해야하는 그들 가족이 할머니를 온전히 보살피기엔 한계가 역력하다. 숙모가 당분간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에 시어머니를 봐준다고 하지만, 통 미덥지 못한 데다 못내 부담스럽기만 하다. 마침내 인식은 노모를 요양원에 보낼 것을 결정한다.
거부감을 드러내던 딸도 조금씩 아빠의 설득에 마음을 돌린다. 주변에서도 이만하면 자식 된 도리는 충분히 한 거라며 인식을 위로한다. 요양원 입실 날짜가 다가오자 그는 노모에게 ‘외출’을 권한다. 세 식구는 서로 다른 의미로 ‘할머니의 외출’을 기다린다.
급속히 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노인 돌봄의 무게
도시화와 핵가족 현상은 전통적으로 가족 내부에서 책임을 지던 노약자 돌봄의 난이도를 과거 시대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끌어올렸다. ‘라떼’ 운운하는 건 사회적 변화에 눈과 귀를 닫겠다는 무지와 오만에 불과하다. 세상은 변했고, 같은 행위라도 조건은 하늘과 땅 차이로 변한 것이다. 과도한 압축 성장으로 인해 불과 한 세대 앞뒤로도 대화와 사고방식이 단절되곤 하는 현재 한국 사회 실정이 결합해 ‘노인 소외’는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중이다.
노인 빈곤이 OECD 가입국 중 가장 심각한 수준이고,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속도 역시 전대미문으로 빠르기에 이제 노인 부양 문제는 매번 선거마다 세대 갈등을 불러오며 주요 쟁점화한 지 오래다. 대중교통 무임승차 건은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올 때마다 격한 논란의 중심거리가 된다. ‘폐지 줍는 노인’이란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틀딱’이란 묻지 마 특정 정치세력 지지층으로 비난의 핵심으로 거론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가운데 경제적 궁핍은 물론, 기술 지체 현상 탓에 키오스크나 온라인 활용 어려움 같은 디지털 난민화도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이 세대를 위한 사회적 배려와 공공서비스는 여전히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사실이다. 몇 가지 상징적인 혜택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노인 세대 친화성을 등한시하는지는 조금만 진단해 봐도 파악할 수 있다. 가족과 대화가 단절되고, 경제적 여유나 사회적 지위와 결부된 제한적 관계망에 갇혀 도시의 폐쇄적 구조 안에서 고립되어 간다. 계급적 지위와 보유자산 여부가 노후 생활을 좌우함을 깨달은 세대는 평생 직장과 부동산 자산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흥미로운 건, 세태 변화를 모르지 않더라도 현실과 사고의 ‘갭’이 발생하는 점이다. 가족 내에서 행복할 수도, 입지나 발언권도 축소 일로건만 여전히 돌봄과 부양은 가족에게 의지한다. 자식이 요양원 입소를 권하면 펄쩍 뛰며 자신을 버릴 셈이냐고 역정을 부리는 풍경은 어렵잖게 주위에서 엿볼 수 있다. 과장 조금 보태면, ‘고려장’ 보내듯 치워버리려는 불효막심한 후손 취급이다. 이는 뿌리 깊은 유교적인 전통과 사회복지 공공서비스에 관한 사회적 불신 두 측면 모두에서 기인한다.
자식 세대 역시 노인 돌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부모를 ‘시설’에 보내는 데 대해 꺼림칙함을 느낀다. 주변의 평판과 친척 내의 비난이 두렵고,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에 워낙 예민한 한국 사회 특성도 한몫 단단히 맡는다. 단순히 의식주 편의를 벗어나 가족과의 정서적 단절 및 소외가 두려운 노인들의 원초적 공포도 만만한 과제는 아니다. 하지만 통계상 가족 내 거동이 불편해 수발을 들어야 할 구성원이 1명만 있어도 돌봄을 책임지는 다른 구성원 1인이 하루 평균 기본 5시간은 소요해야만 한다. 종종 노인이나 장애인 가족 돌봄에 지친 가족이 본인 혹은 동반 자살을 택하는 안타까운 뉴스는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촉매다.
여타 영화들과는 다른 각도를 조명하는 고유의 결
돌봄이 필요한 구성원을 가족 내에서 책임지고자 한다면, 이중고를 감수해야 한다. 경제적 부양 + 정서적 피로다. 처음엔 당연히 가족 된 의무로 당연하다는 듯 떠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정 형편이 웬만큼 여유가 되지 않는 한, (즉 외부 인력을 고용해 활용할 수 없는 한) 돌봄을 도맡은 개인은 마치 전이되듯 부담감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고통을 호소했다간 효행을 다하지 않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 내색하지 못한다. 그렇게 고통은 안좋은 방향으로 묵히고 숙성된다.
이젠 미디어와 대중매체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해당 사안에 접근하는 시도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할머니의 외출>은 통상적인 접근법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선보인다. 주인공의 가족이 누구나 겪을 법한 현실 제약을 초월한 대상은 아닐지언정, 스테레오 타입으로 소재가 되는 경제적 어려움이나 세간의 공분을 유발하기 좋은 악인 캐릭터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한, 오히려 상대적으로 아주 상황이 나빠 보이진 않는 형편의 구성원 조합이다. 쉽게 주제의식을 드러내거나 선악을 명확히 해서 선명하게 이야길 풀려는 유혹과 확연히 다른 태도다.
감독이 부각하고자 하는 의도는 명확히 유사한 소재 작업들과 차별화한다. 이 영화엔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좋은 ‘먹잇감’이 될 대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개성 때문에 관객은 영화가 조명하려는 주제가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성찰하는 과정을 경유해야만 한다. 영화를 통해 관객 누구나 익숙한 극장 바깥 현실 풍경을 반복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없는 대신, 우리가 흔히 문제라 여기지 않거나 은연중에 외면하고픈 이면을 굳이 끄집어내 함께 생각해 보자는 제안인 셈이다.
인식은 객관적으로 선량하고 모범적인 시민이다. 형네가 있음에도 치매를 앓는 노모를 돌보고, 회사와 주변 지인들의 신뢰도 두텁다. 짊어진 일이 많아 자상한 아빠 노릇은 잘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가 자녀 부양에 소홀했다는 징후는 달리 느껴지지 않는다. 아들의 이른 죽음에도 그의 책임이 있으리라 보이진 않는다. 아내의 존재감이 부재한 집 안에서 그가 두 남매와 노모를 챙겨온 고생길이 만만하지 않았을 거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뒤늦게 얼굴을 비치는 숙모네가 도덕적으론 소홀하다고 비판을 들어야 한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인식과 다른 가족이 치매 걸린 노모를 돌보는 잔혹사 때문에 끝내 어쩔 수 없이 요양원행을 택하는 환경결정론으로 이야기가 치닫지도 않는다. 관객에게 인식과 서진은 물론, 주변에서 그들에게 조언 그룹으로 자리한 이들이 건네는 ‘현실’적인 덕담과 권유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은 묘한 이물감을 경험할 테다. 그런데 막상 하나씩 상황을 따지고 분석하면, 달리 그들이 매정하거나 도리에 어긋난 주장과 결단에 기운 것도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더불어 합리적인 선택이라 해도 좋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왜 이를 지켜보는 관객은 마음이 편치 못한 걸까?
관객 각자를 심판대에 세우는 이 영화의 마력
상업영화는 대개 현실의 고단함과 피로를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일탈’의 기회를 (대가를 치르고) 영화를 보는 동안 제공해준다. 이는 전혀 나쁜 평가가 아니다. 대중문화산업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의도가 조금이나마 더 짙게 반영되는 독립예술영화, 또는 ‘작가주의’ 영화에선 오히려 ‘역전’ 현상이 발생하곤 한다. 영화가 현실의 문제와 연동하고, 망각 대신에 더 긴밀하게 성찰을 확장하도록 견인하는 방향을 취한다. 세상 사는 것도 피곤해 죽겠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더 머리가 지끈거릴 수 있겠지만, 현재의 삶과 거창하겐 인생과 영화가 교차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셈이다.
<할머니의 외출>은 명백하게 후자의 방식을 택했다. 그런 특성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인식의 가족이 노출하는 현실적 선택이 필연적으로 풍기는 위선의 냄새를 포착하고, 당황하고 만다. 화면 속 주인공의 판단을 편하게 관전하는 게 아니라, 나라면 대체 어떻게 할까? 내가 저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고뇌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를 팔짱 끼고 품평하며 판사로 행세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판단의 책임을 분담해 치러야 하는 배심원의 책무가 대신에 부여된다.
주인공은 후배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다. 요즘 요양원은 세간의 평판처럼 강제수용소 같은 곳이 아니라, 오히려 집보다 더 편안하고 안정되게 모실 수 있는 공간이기에 그곳에 할머니를 입실시키는 게 전혀 도덕적으로 비난을 들을 일이 아니란 것이다. 소문난 효자로 평판이 자자한 인식의 마음속 장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시간을 내어 소개받은 시설을 찾아보니 답답한 아파트에 하루종일 연금된 신세인 지금보다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안심이 된다.
그러나 신입 간호사가 마치 인식의 속내를 대변하듯 조심성 없이 꺼내는 맞장구에 그는 평소에 보여주던 모습과 달리 애써 화를 터뜨린다. 자신은 부모를 현대판 ‘고려장’으로 요양원에 방치하고 나 몰라라 하는 자들과는 다르다는 항변이다. 마치 영화를 보다 뜨끔한 관객의 심정을 화면 속에서 그가 대신 떠맡은 격이다. 충분히 장기간 노모를 돌봐왔고, 상당한 비용을 부담하며 안심할 만한 시설에 위탁하는 게 비난을 들을 일이 아니란 증명을 받고픈 주인공의 민낯이 공개적으로 표출되는 드문 순간이기도 하다.
이 가족 내에서 이미 부재한 아들이 상당 기간 할머니 돌보기를 자기 일이라 여기며 수행해 왔다는 건 인식이 갖고 다니는 아들의 수첩을 보면 알 수 있다. 인식도 소진도 여태까지는 할머니를 보살피는 게 자신들의 1순위 과제는 아니었던 것. 그들은 갑자기 닥친 지금 상황이 곤혹스럽기만 하다. 물론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 효심을 의심할 순 없다. 둘 다 가능한 범위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연민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할머니 돌봄에 희생할 각오까진 되어 있지 못하다. 명분과 속내 사이에서 그들이 보이는 혼란이 어찌 결론이 날지는 머지않아 명확해진다.
재조명이 시급한 감독의 첫 번째 출사표
영화는 수면 아래에서 조성되는 ‘우리 시대의 비극’을 선연하게 그린다. 파국적 사건과 돌발 상황을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서서히 올라오는 긴장감, 선악의 잣대로 단칼에 구분하기 힘든 등장인물 각자의 개성, 특별한 개인의 사정이 아니라 한국 사회 평범한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화두 제시로 <할머니의 외출>은 티나지 않지만, 굵직한 궤적을 아로새긴다.
직전 작품이자 감독의 이름을 독립영화계 유망주로 끌어올린 단편 <맥북이면 다되지요> 덕분에 약간은 오독이 불가피해진 작가로서의 태도를 부명히 드러낸 작업으로서 이 영화의 가치는 확연하다. 첫 작업에서 일정하게 고려한 블랙 코미디 요소에서 관객은 ‘블랙’보다는 ‘코미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감독의 색깔을 그런 방향으로 규정하고 싶어했다. 감독이 견지하던 주제의식과는 동떨어진 기대치가 증폭된 것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자신이 그리고 싶은 세계의 풍경과 주제를 두 번째 작업에서 확연한 색채로 쐐기를 박으려 했던 것같다. 전작에서 툭하면 등장하던 조크는 소거된 대신에 몇 차례의 암전이 결정적 분기점에서 고의적으로 맥을 툭 끊는다. 이는 연출력의 부족함이 아니라, 전환의 찰나에 관객이 각자의 상념을 펼칠 찬스를 제시하고자 함이다. 왜 지금 흐름을 단절하는 건지,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짚어보라는 뜻밖의 친절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외출>은 의도적으로 흑백 화면을 택했다. 독립영화에서 주변 배경 고증의 난이도를 줄이거나 혹은 현실과의 괴리감 형성을 위해 종종 활용하는 기법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선 그런 전형성보다는 마치 심리 드라마, 혹은 실내 연극을 보는 것과도 같은 효과가 우선이다. 그런 고려가 결부되어 영화는 단막극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상영시간 또한 국내 영화제에서 환영은커녕, 어찌 처리할지 곤혹스러운 1시간에 맞춰졌다. 창작자라면 이게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 금방 깨달을 테다. 여러모로 도발적인 시도가 가득한 작품이다.
감독의 출사표는 한동안 전작의 분위기를 기대하던 이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이후 감독이 계속 선보인 후속 작업은 보고 있으면 뒷맛이 쓰고 개운하게 잘 봤다는 감정과는 동떨어진 ‘이상한’ 것들로 채워진다. 모두가 타인에게 분노를 발산하고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데 몰두할 때, 감독은 우리 내부의 위선과 비겁함을 후벼파듯 끄집어내, 표정 관리가 곤란해질 만큼 악동처럼 집요하게 도전했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정진은 단순한 냉소나 조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성질이었다.
그렇게 세간의 기대가 점점 사그라들 즈음, 감독의 뚝심은 마침내 개봉을 앞둔 본격 장편 <여름이 지나가면>으로 한 다락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많은 독립영화 감독이 재기발랄한 연출과 고발적인 소재로 두각을 드러내지만, 호흡의 깊이나 세계관의 제약으로 주저앉곤 한다. 그러나 장병기 감독은 본인이 세상에 전하고픈 이야기를 요란한 미끼 상품이나 호객 행위 없이 우직하게 부딪히는 정공법에 충실했다. 그렇게 깨어지며 불안의 밤을 오랜 시간 거쳐 긴 호흡과 선연한 생채기를 남기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현한 감독의 용맹과감한 첫 번째 출사표는 지금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하다.
<작품정보>
할머니의 외출
2019|한국|드라마|60분
감독/각본 장병기
촬영/조명 최창환|PD 김현정|편집 장병기|미술 채미영|동시녹음 박철형
연출부 이세령|제작부 이다운|촬영팀 김만준
출연 임형국(인식 역), 권잎새(소진 역), 송광자(할머니 역), 이미정(숙모 역),
임호준(관호 역), 박지수(회사원 역), 이세령(신입간호사 역)2019 19회 전북독립영화제,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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