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심판 미리보기] 죽은 노무현이 산 박근혜 잡을까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판결문으로 미리 보는 박근혜 탄핵

16:22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참여해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가결됐다.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서 사본을 전달받는 순간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된다. 대통령 직무는 황교안 총리가 대행한다. 헌법재판소는 국회 탄핵소추안 의결서 정본을 전달받은 때부터 탄핵심판 절차를 밟는다. 헌법재판소는 어떤 판결을 내릴까.

2004. 5. 14. 2004헌나1.

2004년 5월 14일 우리나라 헌법 재판 역사상 이정표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헌법재판에 부여하는 사건부호 중 ‘헌나’는 탄핵심판사건에 부여하는 부호다. 우리나라 헌법재판 역사상 ‘헌나’ 사건부호가 부여된 판결은 이것이 유일하다. 2004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탄핵심판 판결이 나왔다.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은 이제 최대 180일간 헌법재판소 심리 과정을 거친다. 전문가들은 노 전 대통령 탄핵심판 판결이 박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거로 내다본다. 거의 유일한 참고사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헌재는 판결문을 통해 일종의 대통령 탄핵 기준을 서술했다.

▲2005년 9월 7일,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회담을 갖고 있다. [사진=노무현재단]

당시 헌재가 노 전 대통령 탄핵을 기각한 이유는 노 전 대통령이 흠결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헌재는 국회가 의결한 탄핵소추안의 탄핵 사유 중 3가지는 법률 위반 또는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했다고 인정했다.

헌재는 20가지가 넘는 탄핵 사유 중 2004년 2월 18일과 24일 기자회견서 노 전 대통령이 한 발언이 공직선거법상 공무원의 정치중립의무를 위반했다고 인정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4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해 공무원의 정치중립의무 위반 논란을 야기했다.

이를 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중립의무 준수 요청을 하자 노 전 대통령은 “관권선거 시대의 유물”이라고 중앙선관위 결정을 폄하했다. 헌재는 노 전 대통령의 이 행위를 두곤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현행법에 문제가 있더라도 헌법과 법률을 준수해야 할 대통령(판결문에는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로 표현)이 공개적으로 기존 법률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헌법과 법률을 존중하는 태도로 볼 수 없다고 해석했다. 문제가 있다면 위헌법률심판 등 정해진 절차에 따라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또, 측근비리의혹과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한 것도 헌법수호 의무 위반으로 봤다. 재신임 국민투표를 헌법에서 허용하지 않는데도 이를 제안한 것은 위헌적인 행위를 제안한 것이기 때문에 헌법수호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노무현 탄핵 기각, 일부 법 위반과 헌법수호 의무 위반 인정
그런데도 탄핵 기각, 헌법질서 파괴할 만큼 ‘중대하지 않아서’

▲2004년 5월 14일, 탄핵 기각 결정 후 대통령 집무실로 복귀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사진=노무현재단]

헌재는 대통령이 법을 위반했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의무를 저버렸다는 점을 일부 인정했지만 탄핵은 기각했다. 대통령 탄핵으로 국가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헌재의 설명이다.

뿐만 아니라 헌재 판결문을 보면 탄핵심판이 공직자의 권력남용으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제도로서 기능하지만, 파면 결정을 할 경우 대통령에게 부여한 국민의 신임을 박탈해버리게 된다는 점도 중요한 기준으로 봤다. 판결문은 탄핵이 “국민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게 부여한 ‘민주적 정당성’을 임기 중 다시 박탈하는 효과”를 가진다며 탄핵 여부 결정에 신중함을 엿보였다.

때문에 헌재는 대통령 탄핵을 위해서는 대통령이 위법 행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위법 행위의 ‘중대성’도 중요한 탄핵 요건으로 제시한다. 이 중대성은 두 측면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탄핵심판제도의 존재 이유인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중대한 법 위반을 한 경우고, 두 번째는 대통령이 갖는 민주적 정당성을 배신하는 행위, 즉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를 했을 경우다. 국민 신임을 배반한 행위 역시 판결문의 맥락을 살펴보면 중대성이 인정되어야 할 것으로 해석된다. 다음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 판결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대통령의 파면을 요청할 정도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중대한 법위반’이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행위로서 법치국가원리와 민주국가원리를 구성하는 기본원칙에 대한 적극적인 위반행위를 뜻하는 것이고,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란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중대한 법위반’에 해당하지 않는 그 외의 행위유형까지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행위 외에도,  예컨대 뇌물수수, 부정부패, 국가의 이익을 명백히 해하는 행위가 그의 전형적인 예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대통령이 헌법상 부여받은 권한과 지위를 남용하여 뇌물수수, 공금의 횡령 등 부정부패행위를 하는 경우, 공익실현의 의무가 있는 대통령으로서 명백하게 국익을 해하는 활동을 하는 경우,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하여 국회등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을 침해하는 경우, 국가조직을 이용하여 국민을 탄압하는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경우, 선거의 영역에서 국가조직을 이용하여 부정선거운동을 하거나 선거의 조작을 꾀하는 경우에는, 대통령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고 국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리라는 믿음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대통령의 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거나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배신하여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상실한 경우에 한하여, 대통령에 대한 파면결정은 정당화되는 것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판결문 中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대통령의 헌법 및 법률 위반의 중대성을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는 부분이다. 판결문은 대통령이 헌법상 부여받은 권한과 지위를 남용해 뇌물을 수수하거나, 공금을 횡령하는 등 부정부패행위를 하고, 국회 등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 등을 사례로 들면서 중대한 헌법 및 법률 위반 사례로 꼽고 있다.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중대한 법위반’ 그리고,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

▲지난 12월 1일 대구 서문시장 화재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을 심리하는데도 이 두 가지 기준을 두고 탄핵 여부를 결정한 공산이 크다. 국회 탄핵소추안도 이를 고려한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소추안은 박 대통령이 어떻게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는지 설명한 후, 따로 ‘중대성의 문제’를 다시 설명하기까지 했다. 2004년 탄핵소추안에는 없던 항목이다.

국회 탄핵소추안은 고위 공직 인사를 좌우하고, 사기업으로부터 갈취하듯 기부금을 출연받는 등 최순실 일당이 이른바 비선실세로서 국가 권력을 사익추구 도구로 이용하는데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다고 주장한다.

이미 검찰이 최순실, 안종범, 정호성, 차은택, 송성각 등의 공소장에 박 대통령을 사실상 ‘공범’으로 적시한 것처럼 입증이 어렵진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검찰은 이들의 범죄행위가 대통령 지시 또는 대통령과 공모하여 이뤄졌다고 공소장에 적시하고 있다.

헌재가 사례까지 들어놓은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에서도 박 대통령은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7일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최순실 측근 고영태는 약 4,500만 원에 달하는 대통령 가방, 옷 비용을 최순실이 지불했다고 밝혔다. 최순실이 박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보다 더 중대한(권한과 지위를 남용한) 뇌물죄 혐의는 미르재단, K스포츠 재단 설립 과정에서 드러난 수억 원대 대기업 출연금이다. 검찰은 뇌물죄 혐의 적용에 주저했지만, 국회는 탄핵소추안에 이를 뇌물죄 혐의로 적시했다. 형사소송법을 준용해 탄핵심판이 이뤄지는 만큼 검찰 수사와 별개로 여기에 대한 헌재의 판단도 나올 걸로 보인다. 국회 탄핵소추가 검찰 기소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 2차 청문 과정에서 차은택, 여명숙 등 증인으로부터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해 헌법기관의 권한을 침해한 행위를 뒷받침하는 증언도 확인됐다. 차은택이 추천하는 사람이 국무회의를 구성하는 국무위원(장관)이 됐고, 최순실 일당의 치부에 걸림돌이 되는 공직자들은 인사 조처 됐다.

12년 전 헌재, “국민의 헌법의식이 이제야 비로소 싹트기 시작”
80%에 육박하는 국민 탄핵 여론···가장 무시할 수 없는 변수

▲헌법재판관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반향으로 서기석, 안창호, 강일원, 조용호, 김창종, 김이수, 박한철, 이정미, 이진성 재판관 [사진=2015년 헌법재판소 홍보책자]

일각에서는 해당 사건들에 대한 사법부 판단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 탄핵은 부당하다거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 판결문을 보면 “탄핵소추의결서에서 그 위반을 주장하는 ‘법규정의 판단’에 관하여 헌법재판소는 원칙적으로 구속 받지 않으므로, 청구인이 그 위반을 주장한 법 규정 외에 다른 관련 법규정에 근거해 탄핵의 원인 된 사실관계를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혀서 해당 사건들의 사법부 판결 여부와 상관없이 탄핵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는 국민적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매주 주말마다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을 들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약 80%가 탄핵에 찬성한다. 시민 수천 명이 국회 탄핵 의결 전날 밤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노숙하며 탄핵을 요구했고, 당일에도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탄핵 가결을 외쳤다.

짧은 민주정치의 역사 속에서 국민의 헌법의식이 이제야 비로소 싹트기 시작하였고 헌법을 존중하는 자세가 아직 국민 일반의 의식에 확고히 자리를 잡지 못한 오늘의 상황에서, 헌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확고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 탄핵심판 판결문 중 일부다. 어쩌면 이때부터 싹튼 국민의 헌법의식이 헌법을 존중하고 수호하기 위해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헌법재판소도 이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