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촛불열전] (7) 만능 농사꾼 김상화

"성주 촛불은 시작, 앞으로 수많은 불합리와 싸울 것"

18:17

[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매주 월, 목요일 연재한다.]

매일 저녁 열리는 사드배치 철회 촛불집회가 끝나고 성주읍내를 진전하다 김상화(36) 씨를 자주 마주쳤다. 2009년 귀농한 그는 얼큰하게 취한 채 자주 눈에 띄었다. 성주 자치 조직 활동에 왕성하게 참여하느라 술자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상추를 재배하는 농사꾼이다. 술자리에서 절도 있게 술잔을 꺾으며 잔을 받는 모습에서는 수완 좋은 장사꾼 면모가 보였다.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원회에서 초기부터 활동하며 이제는 ‘동남청년단’ 청년으로 온갖 궂은일에 나서는 모습에서는 전업 활동가 느낌도 났다. 그리고 어딘가 모를 선비의 모습도 느껴져, 가끔 성주 토박이로 느껴질 정도였다.

▲2016년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송년 술자리 후 뒷정리를 하고 쓰러진 김상화 씨

김상화 씨는 사드 투쟁 현장에서 가장 앞선 곳에 있었다. 소성리 집회에서는 할머니들 앞에 섰다. 집회만이 아니다. 김세환 전 성주 부군수의 땅투기 의혹을 집요하게 캐냈고, 사드 배치의 행정적 문제점을 잡으려 살피다 사드 부지 소규모 환경영향평가 착수 사실을 어느 기자보다도 먼저 밝혀내기도 했다. 대구공항 이전 설명회에서는 이전 반대 측 대표로 발표했다. 타향 출신임에도 성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훗날 김상화 씨의 선조를 알고 보니, 그의 모습이 선조를 닮은 듯했다.

그의 증조부 故김점학 씨는 일제강점기 신간회 조직활동에 나서 국내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증조부에 대한 기록은 국가보훈처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 신간회 대구지회 간사,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 대구중등학생 비밀결사 활동 중 체포 등으로 실형을 살았지만, 2008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받았다.

‘옛날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서로 반목(反目)하고 있었는데 지금이 되어 양자가 합동한 이유는 현재 조선의 사정은 외래의 자본에 압박받고 중산 계급 이하는 급속도로 경제적인 파멸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한 이해관계는 조선 전 민족이 똑같은 입장이다···대 자본가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민중은 이 때문에 직업을 잃고 더욱 빈궁에 빠졌다. 이에 우리들은 합동하여 자본가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30년 재판 기록에서 故김점학 씨의 검찰 신문 당시 진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방적 사드 배치에 저항하고 나선 성주 상황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일까. 검찰과 판사 앞에서도 움츠리지 않았을 故김점학 씨의 모습이 김상화 씨에게도 이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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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기를 즐겼다. 할머니가 자주 챙겨주는 요구르트와 초코파이도 좋았지만,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교장 선생님이던 할아버지는 댁에 들를 때마다 장기나 한판 두자며, 장기판을 앞두고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훈장 선생님처럼 엄격했던 할아버지는 내게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증조부 이야기도 자주 하셨는데, 나이를 먹고 나서 증조부의 자취를 되짚어보며 나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달성군 옥포면에서 태어난 증조부는 문희갑 전 대구시장 다음으로 재산이 많은 천석꾼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서며 형편은 전보다 나빠졌지만, 증조부의 정신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까지 이어졌다.

바르게 살고자 했던 어른들로부터 여러 가치관을 배웠다. 학교에 다니며 어머니가 구해다 주는 책을 탐독하며 착실하게 공부했다. 중학생이 되자 운동하는 친구들을 사귀며 공부보다는 운동에 빠졌다. 키도 큰 편이라 농구에 소질이 있었는데, 대학생이 되어 농구 경기에 출전해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트로피는 할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렸다. 일제강점기 청소년 농구 대표로 전국체전에 나갔으나 편파 판정으로 결승전에서 일본 고교 팀에 패했던 할아버지는 치매를 앓으면서도 기뻐하시는 듯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나는 대학 시절 동아리도 다섯 개나 했다. 운동을 열심히 하며 교우관계도 좋아, 단과대 학생회장도 맡았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돼볼까 해서 경영학과에 진학했는데, 막상 대학생이 되어 보니 학교에서 얻은 행복감도 좋아 대학교에서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졸업 후 곧바로 전문대 교직원으로 취직했다. 취직 후 마주한 대학은 내가 알던 대학 세계와 달랐다. 총장과 이사장, 그 친족과 교수진들의 가장 밑바닥에서 사무를 봐야 하는 교직원으로서 조직 생활에 희망을 느끼지 못했다.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사회로 팔아넘긴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1년을 채우기 전에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 학교 선배와 이야기하며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농업계 회사에 다니는 선배는 대구의 섬유산업도 무너지는 걸 보라며, 농업은 무너지지 않는다며 농업을 권유했다. 당시 금융업에 나선 친구를 보며 농사지을 생각을 굳혔다. 그 친구는 펀드매니저로 떼돈을 벌더니 금세 벤츠를 뽑았다. 벤츠 뚜껑을 열고 자랑하는 친구 앞에서 나는 그건 운이라고,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간다고 말했다. 한국에도 미국발 금융위기가 영향을 미쳤다. 결국, 그 친구는 벤츠를 팔고 증권회사를 그만뒀다.

2009년 귀농을 마음먹고 성주군 가천면 마수리로 들어왔다. 성주는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가야산자락 포천계곡(성주군 가천면) 안에 집을 하나 더 마련해, 그곳으로 틈만 나면 나와 동생을 보냈다. 고향 생활을 알려주고 싶으셨을까. 잘 모르겠지만 애착이 갔다. 성주는 대구와 여러모로 다른 곳이었지만, 적응이 어렵지는 않았다. 붙임성 좋게 솔선수범했더니 그만큼 고령의 주민들도 마음을 열었다.

다만 처음 짓는 농사는 쉽지 않았다. 부가가치가 높은 특수작물을 해야 성공하겠다고 생각해 생와사비 재배에 도전했다. 생와사비 하나는 6년근 인삼 한뿌리보다 비싸다는 말을 들었다. 못해도 투자비는 회수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첫 수확 후 1년간 딱 한 명이 샀다. 판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비싼 값에 배웠다.

2011년 대가면 대천리로 이사했다. 그곳은 상추터였다. 이번에는 만전을 기하며 작목반에 가입했다. 작목반 회원들에게 상추 농사를 배웠다. 납품 물량을 채우기 어려울 때는 작목반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와사비와 상추 재배에서 한국 농업의 문제를 체감했다. 생산비 보장이 안 됐다. 도매시장에 출하했을 때 kg당 생산비 2천 원이던 상추 값은 500원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밤낮없이 일해 직거래를 시작했다. 대구에 품질 좋은 상추를 공급하다 보니 거래처가 늘며, 사업이 안정권에 들었다.

농촌생활도 빠르게 적응했다. 쉽지만은 않았다. 농촌사회는 여러모로 달랐다. 농촌은, 적어도 성주는 조직사회였다. 농사에서 크고 작은 마을 행사, 정치, 자치행정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일이 조직 중심으로 굴러갔다. 와사비 재배할 때 많이 느꼈던 것인데, 군에서 하는 보조사업을 예로 봐도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조직은 비교적 접근이 쉬웠다. 대학 시절 동아리 들듯 여러 조직에 들었다. 의용소방대, 농업경영인회, 자율방범대, 귀농인연합회까지. 젊은 사람이 부족한 농촌에서 의용소방대 활동은 힘들었지만, 인정받았다.

듣기로 성주는 소방관이나 경찰 1인당 책임질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했다. 산불이라도 나면 젊은 사람들이 진화작업에 나선다고 했다. 2013년 겨울, 수륜면에 산불이 나자 마을 사람들이 모조리 나와 밤샘 진화작업에 나섰다. 연기를 잔뜩 마시고 새벽에 내려와 보니, 소방대장 사모님이 돼지고기에 막걸리를 준비해뒀다. 술잔이 돌 때 기회를 잡아 인사와 함께 건배를 외쳤다. 이후에도 단체에서 필요한 역할, 특히 어른들이 하기 어려운 컴퓨터 작업 같은 일을 도맡았더니 수월히 성주 사회에 섞일 수 있었다.

내부에서 보니 ‘조직사회’는 더욱 뿌리 깊었다. 자치조직이라지만, 군청 대소사에 동원될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군청은 작은 행사도 관성적으로 조직의 힘을 빌렸고, 조직은 군청 일에 나서는 만큼 여러 편의를 받는 듯했다. 여하튼 조직사회의 정점은 선거 때 드러났다. 기초의원, 광역의원, 군수나 대부분 관변단체 선거에서도 드러나기로, 출마자가 가장 먼저 찾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조직이었다. 그리고 그 조직은 내부 회원에게는 물론 지역사회에서 암암리에 여론을 조성했다. 대구와 달리 자치조직의 힘이 강한 것은 순기능도 있었지만, 개인으로서는 불합리한 조건이었다. 민주주의 측면에서 악조건이었다. 이런 성주의 특징은 2016년 8월 22일 성주군수가 사드 배치 제3부지를 발표하고 나서 여실히 드러났다.

▲백철현 군의원과 악수하는 김상화 씨

제 멋대로 사드배치
군청 행정 안에 성주군민 없었다

사드 배치는 발표부터 성주군의 민심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진행됐다. 7월 13일, 국방부의 성주 성산포대 사드 배치 공식 발표를 앞두고 성밖숲에서 열린 범군민 궐기대회에 참가할 때만 해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작목반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고 무작정 아내와 함께 나갔다. 나처럼 영문모르고 온 사람이 많아 보였다. 군중 앞에서는 미사일 모형이 불타고 혈서도 나왔다.

그날 오후, 국방부 발표를 보고는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긴장감을 가지고 15일 황교안 국무총리와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성주 방문에 맞춰 나갔다. 그들은 이미 뉴스에서 들은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이대로 보낸다면 저들이 마치 성주군에서 무난하게 설명회를 마쳤다고 보도할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이 그렇게 판단했는지, 계란과 물병도 날아갔고, ‘원점 재검토’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꽁무니를 내빼는 총리와 장관을 쫓는 시간이 긴박하게 흘렀다. 경찰이 만든 틈을 통해 탈출하는 그들을 보고 나는 성주여고 쪽 도로로 가서 차를 막았다. 억울하다고, 제대로 말이라도 하고 가라고 외쳤다. 총리, 장관이라는 자들이 앵무새처럼 쓸데없는 말만 읊으려면 도대체 왜 온 거란 말이냐. 셀프감금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어이없는 행정은 군도 마찬가지였다. 8월 22일 김항곤 성주군수는 사드 배치 지역으로 성산포대가 아닌 제3부지를 검토하라고 국방부에 요청했다. 그날은 법도, 헌법도, 도의도 없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군수의 기자회견장에 참여하려는 군민을 군 공무원들이 벽을 쌓고 막았다. 성주에 정착하며 사귄 공무원도 더러 눈에 띄었다. 작목반 일로 군청을 방문할 때마다 봤던 담당자도 서 있다.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의 의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공무원은 군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누굴 위해 우리를 막고 있나. 군수가 사드를 성주군 다른 곳에 배치해달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나 보려고 하는 군민들을 군청이 막는다. 너희들이 여길 왜 막고 있는 것이냐. 군민에게 할 짓이냐. 그들은 못들은 채 복지부동이었다. 번갯불에 콩 볶듯 기자회견이 끝나고 나서 배은하(42) 투쟁위 대변인이 펑펑 울며 말했다.

“주민의 뜻과 다른 군수의 오늘 기자회견은 무효입니다! 군민들은 40일간 싸우고 있는데 사드를 유치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성주 사드 배치 저지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나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불통 군청 원인은?
부군수 점찍어 싸움 나서다
사드 투쟁, 지역 적폐 민낯 드러냈다
실패 두려워말고 싸워야

공무원들이 무엇 때문에 이정도까지 군민들과 척을 지려는 것일까. 고민을 거듭했다. 군청 조직도를 봤다. 유일하게 군수의 인사권이 안 먹히는 사람이 있었다. 김세환 (전) 부군수였다. 부군수는 경북도청에서 김관용 도지사가 파견하는 사람이었다. 알고 지내던 공무원들을 탐문했다. 부군수가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제3부지 찬성 집회를 지원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 단체들 호소문도 부군수가 만들어줬다는 말도 나왔다. 21일 <뉴스민> 보도를 보니 국방부 기획조정실장은 투쟁위의 제3부지 요청 건의 기자회견문 문구에 개입하다가 부군수실로 도망갔다. 왜 부군수랑 붙어먹을까. 정보공개청구를 해 봤다. 군청 폐쇄 이후 천막 철거 행정대집행 관련 공문, 경찰병력 동원 요청 공문 등 주요 공문들이 군수가 아닌 부군수 전결로 처리돼 있었다. 군수보다 부군수가 어긋난 행정의 핵심인 것일까.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나중에는 경상북도 공무원의 예천군 땅 투기 문제가 벌어졌는데, 부군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도청에 민원도 넣고 경북도청까지 가서 기자회견도 열었다. 하지만 부군수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썩 통쾌한 결과는 아니었다.

사드 투쟁 과정에서 군수를 주민소환하자는 의견도 왕왕 터져 나왔다. 다른 사례처럼, 주민소환이 실패한 후 상황 악화를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주민소환 운동에 빠르게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빠르게 추진했다면, 성공 가능성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실패하더라도 배우는 것이 분명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아쉬움이 남는다. 정치에 나서는 사람들은 군민이 머뭇거리다가 포기하는 모습보다 주민소환 운동에 적극 나서는 게 오히려 경각심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군청에서 군의회, 지역 정당까지 촘촘히 얽힌 이 성주에서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라는, 당선 후에는 거칠 것 없다는 태도에 일침을 가할 수 있지 않았을까. 군의회를 보라. 의원 8명 중에 누구 한 명이라도 사드 제3부지 요청 건의에 반대한 사람이 있었나. ‘결사반대’하라는 것도 아니고, 반대 입장을 내는 의원 단 한 명이 없다니. 그러니까 군수가 군청을 폐쇄하면 군의회도 뒤따라 폐쇄하는 거다.

주민소환제에 아쉬움이 남고, 민원 제기나 정보공개청구에 매달렸던 이유는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 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성주는 물론 한국 사회에서 주권자가 행정에 참여할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면서 정치와도 멀어진다. 이제 투표밖에 남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모두 선거 전에는 나라 최고의 일꾼이다. 머슴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 많던 일꾼은 오간 데 없고 배신자만 남는다. 나 같은 농사꾼에게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어야 하고, 더욱 많아져야 한다. 의회조차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성주군에서 군민이 직접 의사를 표현할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사회 분위기는 크게 변했다. 정치인들이 두려움을 느꼈다. 앞으로는 성주에서도 잘못된 정치인의 자격을 군민 힘으로 박탈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성주에서는 사드 사태 이후 정치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생각한다. 행정관료와 정치인의 실체가 드러났고, 그들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졌다. 사드 투쟁은 제도적이진 않지만, 민의를 강하게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주민들이 이렇게까지 촛불을 들고 반대했기 때문에, 아직 사드가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대구공항 이전 후보지로 성주가 거론됐으나, 이제는 군민 반대로 물 건너갔다. 성주 촛불 이후 새누리당이 쪼개졌고, 박근혜가 탄핵됐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의견을 표했을 때, 작지만 사회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른다. 결과가 어떻든 분명 성주는 바뀐다.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불합리한 일들을 지켜보고, 역할을 찾을 것이다.

▲군공항 반대 발표에 나선 김상화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