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과 함께] ⑧ 줄어드는 삶을 지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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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허가제 15년이다. 미얀마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목동 빗물 배수시설에서 일하다 죽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을 자기 뜻대로 옮기지 못한다. 숙식비 강제 징수, 임금 체불과 최저임금 위반, 열악한 근로 환경, 욕설과 인권 침해를 견디다 못해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노동조합’을 찾는다. 고용센터, 출입국사무소, 고용노동부 모두 그들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1이다.

▲[사진=성서공단노조]

스리랑카에서 온 차민다는 4월부터 대구 성서공단노동조합(이하 STU2)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산업연수생으로 2003년에 들어와, 17년째 한국살이다. 한국말을 잘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의 고충을 상담하는 일을 맡았으니 더 잘해야 한다. 김용철 상담소장과 함께 노동권 상담을 위한 고급 한국어를 공부한다. ‘임금 시효, 각종 수당, 비인간, 양심, 영세’의 뜻과 예문을 공부하다가 머리가 아파올 즈음 김용철 소장은 외친다. “오늘 여기까지 합시다!” 수업 참관을 하다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드니 사무실 벽에 걸린 전태일의 초상이 눈에 들어온다.

삼동친목회의 ‘인간 선언’
1970년 9월, 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옆에 끼고, 짧은 스포츠머리에 빵모자를 쓰고, 검정바바리를 걸친 채 평화시장에 돌아왔다. 수도원 공사장에서 쓴 일기에서 ‘완전에 가까운 결단’에 이른 그는 단호한 입술로 나타나 사람들을 만났다. 이직률이 높은 평화시장은 1년 전의 경계심을 풀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태일은 왕성사에 재단사로 취직한다.

9월 16일 밤 ‘바보회’는 ‘삼동친목회’로 새출발한다. 은호다방에 12명이 모였다. 바보회 6명과 새로 뭉친 6명이었다. 삼동친목회는 민원을 접수하고 열악한 환경을 호소하던 활동에서 한 걸음 전진하기로 뜻을 모은다. 시청, 노동청이 있지만 사실상 귀를 닫고 있다는 것을 1년 전에 확인했기 때문에 모임 분위기는 한층 더 냉철하고 성숙해 있었다. 새 친구들은 ‘체격 좋고 괄괄한 정의파’들로 한껏 분위기는 고무되었다. 현실을 폭로하고 공동 행동을 결의했다. 남은 설문지 200장을 치밀한 작전으로 돌려 126장을 회수한다. 100장 뿌려 30장 걷은 작년에 비하면 통계의 값어치도 훨씬 커졌다.

하지만 삼동친목회는 여전히 바보였다. 의지는 높았지만, 근로감독관의 노회한 회유와 거짓 약속, 정보과 형사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꾸민 친절에 번번이 속아넘어간다. 태일은 형사가 도와주는 줄로만 알고 계획을 자세히 상의했는데, 집회를 막기 위한 캐내기였다. 노동청, 경찰서, 관청은 영화 트루먼쇼나 연극 무대의 세트처럼 가짜였다.

보름만에, 태일은 왕성사에서 해고되었다. 업주는 동료들을 옹호하는 태일의 능동적 태도를 불쾌해하다가 질병 조퇴를 꼬투리로 잡아 무급 해고했다. 10월 7일 경향신문에 평화시장 기사가 나자 삼동친목회의 활동은 소문을 타고 번진다. 시장은 고된 노동의 피로감 사이로 변화의 기대감에 점차 술렁인다. 얼마 후 태일과 삼동회원들은 왕성사로 가서 밀린 임금을 요구해 5,000원을 받아낸다. 다른 회원들이 임금을 제대로 못 받을 경우에도 역시 함께 가서 임금을 받아내고는 하였다. ‘서로 뭉치면서 똑똑해져’ 혼자서는 못할 일을 해내는 기쁨을 나눈다.

삼동회의 단체 행동은 착취 공장에 대한 항거이자, 브레이크 없는 평화시장의 질주를 멈추는 ‘인간 선언’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업주들은 공장에서 그들을 깡패들이라고 부르며 접촉을 막는다. 이후 ‘깡패 취급’이 ‘인간 선언’을 조롱해온 수십 년의 역사는 잠시 건너뛴다.

섬유회사 정원의 나무와 임금 문제
경북 고령 쌍림공단 대한섬유 정문 앞에 STU 활동가들과 이주노동자들이 달려가 항의한 것은 지난 6월 21일 정오의 일이다. 스리랑카, 네팔의 젊은 노동자들이 STU 조끼를 입고 차에 오를 때, 밀린 임금을 받으러 가던 태일과 삼동친목회원들의 힘찬 어깨와 높은 이마가 겹쳐보였다.

‘새벽부터 일 시키고 월급 안 주는 대한섬유 문 닫아라!’ ‘공짜노동 시켜놓고 돈 떼먹는 사장을 구속하라!’ 사회자 차민다의 목소리와 손끝이 하늘을 찌른다. 사람들은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피켓을 높이 든다. 현수막을 펼친 스무 명 목소리와 행진은 점심 폭염과도 다투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산재 치료 중이거나 해고되어, 또는 지역을 옮겨 새 공장을 알아보느라 시간이 났다. 남일 같지 않은 억울함에 함께 길을 나선 것이다.

▲[사진=성서공단노조]

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먼 STU 사무실까지 와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필리핀 여성들이었다. 사장은 이주노동자를 15명까지 쓸 수 있게 자기 회사를 ‘대한섬유’, ‘디에이치’, ‘텍스코’로 쪼갰다. 수습 기간을 최대 적용하고 계약서에 명시된 시급이 아닌 싼 일당의 도급제로 바꾸어 인건비를 추가로 아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년간 생산량을 이유로 새벽 3시부터 공짜 강제 노동을 시켰다. 필리핀 여성 4명이 받은 임금은 최저임금의 절반 수준이다. 꼼꼼한 출퇴근 기록으로 산정한 4명의 체불임금을 합하면 4천만 원이다. 회사는 집회가 거듭되자 ‘왜 새벽부터 일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딴청을 부렸다.

필리핀 여성들은 공짜노동과 관리자들의 욕설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김해로 옮겨 일한다. 고용노동부는 ‘고용제한조치’를 내리지 않고 노사 주장이 다르니 합의를 보라한다. 회사는 집회 참가자들을 채증하고 STU에 헐값의 합의금을 흔든다. 회사 앞뜰에는 족히 수억 원은 되어보이는 각종 소나무와 정원수들이 수려한 외모를 뽐내며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체불임금 4,000만 원3은 그 정원에 들인 돈에 비하면 얼마나 될 것인가.

평화시장 사장들의 신당동 호화주택에도 저 나무들이 있었겠다. 그것은 직원들의 삶을 희생시켜 얻은 초과 이윤을 독차지한 문란한 욕망의 흔적이다. 평화시장 초창기부터 하루 16시간씩 건강을 잃어가며 헌신적으로 일해 온 박명옥은 요정에서 몇 십만 원짜리 술을 먹고 한 해에 빌딩 하나씩 늘려간다고 자랑하는 사장들을 여럿 보았다. 그들은 밤 11시 넘게 일하는 여공들한테 삼립빵 하나 사지 않았다4. 업주들의 늘어나는 재산이 노동자들의 몫이었음을 박명옥은 청계노조 활동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임금은 정해진 날짜에, 본인에게, 전액 지급되어야 한다. 평화시장에서 이 원칙은 공공연히 무시5되었다. 사장들은 보증금처럼 10~15일치의 첫 월급을 ‘깔고’ 주었다. 그들은 이를 그럴듯하게 ‘임금예치제도’라 불렀지만 회사를 많이 옮길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도급제 일터에서 직원들의 발목을 잡는 악덕 관행이었다. 큰맘 먹고 공장을 옮기면 저당 잡힌 돈을 떼이기 일쑤였다. 여러 번 찾아가도 돈을 받아내기가 어려워 제풀에 나자빠지기 쉬웠다.

▲12월 16일 세계이주노동자의 날, 이주노동자 집회가 대구시 중구에서 열렸다

임금 체불 또한 잦았다. 체불은 생활 구석구석을 주저앉힌다. 노동자는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참아야 한다. 손꼽아 기다리던 명절, 고향에 갑자기 못 가게 된다. 최소한으로 버티던 생활비를 마른 수건 짜듯 더 줄여야 한다. 도시락을 안 싸고, 콩나물 5원어치 사는 횟수를 줄인다. 일하다 남은 천으로 옷을 지어 입고, 자취방을 빼서 공장 다락에서 숙식하거나, 왕복 버스비 20원이 아까워 걸어서 출퇴근하기로 결심하고, 달력에 적어둔 ‘목욕탕’과 ‘샴푸’에 연필로 Χ표를 친다. 한 달 내내 일하고도 빚을 내러 집을 나서기도 해야 한다. 또는 숙식과 월수가 보장된다는 업소 전단지를 떠올리며 한참 고민을 하기도 한다.

2017년 이후 이주노동자들의 사정 또한 그렇다. 예전에는 숙식이 제공되었지만 이제 그나마 적은 월급에서 20~30만 원씩 미리 떼어가는 숙식비 징수 지침은 사실상 임금 전액 지급에 반하는 임금 체불6이다. 업주의 허락 없이는 공장을 옮길 수 없는 고용허가제는 매달의 손해와 굴욕을 참고 일할 수밖에 없게 한다.

노동조합은 가로수 그늘 아래 모인다
물론 평화시장과 성서공단은 다르다. 평화시장에는 일자리가 많았다. 국내 기성복의 70%를 생산했고, 의류 산업은 상승세였으며, 경제성장률이 매년 두 자리에 육박하는 동아시아 전체의 호황이었다. 하지만 분배는 없었다. 업주들은 부를 독점했고 군사 정부는 그 뒤를 봐주며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끝없이 동원했다. 물가, 지가는 폭등해 빈부 격차를 늘렸다.

반면 ‘대구 경제의 엔진’으로 불리던 성서공단은 장기화된 세계 경제 불황의 제조업 끄트머리에 있다. 중층 하청구조 속에 자동차 부품, 기계, 섬유 제조업의 영세성과 공단 이탈은 가속화되고 일자리는 최근 몇 년 급감했다. 업주들은 상시적 경영 위기를 호소하지만 사실 숨통을 트일 요령이 있다. 사람을 줄이고 노동 강도를 높이고 상여금을 축소 폐지한다.

정부는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해 임금 인상 효과를 ‘순삭’해 버렸다. 재계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국회의원들은 잇달아 최저임금 차등안을 공격적으로 발의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6조에 명시된 ‘성, 국적,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없이 균등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흔들어댄다. 그나마 지켜지지 않는 이주노동자의 최저임금을 아예 깎으려는 것이다. 노동자의 안전을 대비하고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법안들은 강제 취침 중이다.

이렇게 보면 평화시장과 성서공단의 구조는 노동자의 삶을 돌보지 않는 면에서 비슷하다. 호황 속에는 미루어지던 분배가, 불황 속에서는 고통 분담으로 가장 먼저 노동자들을 찾아온다. 늘 먼저 쪼그라드는 것은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이다.

영세 하청업체의 계약직, 이주, 여성노동자들은 소득이 주도하는 성장을 맛보지도 못한 채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감수하며 다시금 서로 뭉칠 수 없는 피곤한 시간을 살고 있다. 노동자들의 유일한 숨통은 힘을 모으는 것인데, 노조 가입률은 바닥을 친다. 노동조합 사무실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기만 하다. 사업주의 숨통은 트여 있고 노동자의 숨통은 막혀 있다. 그런데 개개인의 쪼개진 삶과 여론의 왜곡, 편견 속에서도 ‘노동조합’이 이어지는 것은 왜일까. 인간 서로를 아끼는 전태일, 청계노조, STU의 전통 속에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태일은 한미사 재단사 시절, 피를 토한 동료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잠 안 오는 약 부작용으로 동료가 앞이 안 보이고 손이 굳어 울면 달래고 약국에 다녀왔다. 병원비 모금 전단지를 복도에 붙이기도 한다. 이런 행동으로 사장의 눈 밖에 났다. 사장은 폐병 걸린 직원을 해고하고, 오히려 야유회에서 그 직원이 아이를 돌보던 일을 떠올리며 아이에게 병이 옮지나 않았을까 제 자식만 걱정하는 인간성 상실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

태일이 떠나고 친구들과 이소선 어머니는 청계노조7를 만들었다. 청계노조 설립 후 생긴 복지의원은 노동청의 지원 중단으로 폐쇄되었다가 청계노조의 노력으로 다시 열렸다. 건강 진단, 무료 진료로 그 동안 돌보지 않던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의 건강을 비로소 챙기게 된다. STU 사무실에는 수요일 저녁마다 무료진료소가 열려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건강을 챙긴다. 영세, 이주 노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태일은 건강하고 ‘인간다운 삶’을 갈망했다. 근로 실태 설문조사 11번 질문은 “당신 교양을 위한 서적은?”이었다. 공부를 통해 인간다운 도약을 꿈꾼 태일 자신의 대답은 ‘볼 시간이 없다’였다. 청계노조는 노동교실을 열어 배움을 열망하는 노동자들의 닫힌 눈을 열었다. 노동교실에는 수많은 소모임이 생겨 살아 숨 쉬었다. STU는 이주노동자 문화교실을 열어 영상을 찍고 탁구와 기타를 치며, 뜨개질을 하고 서툰 한국어로 노동자의 권리 선언문을 낭독한다.

STU의 헌신적인 정주 한국인, 이주 활동가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노동자들의 점점 줄어드는 삶을 지킬 방법을 연구한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정원의 조경수를 가꿔 아름다움을 소유할 때, 노동조합은 거리의 가로수 그늘에 모인다. 그래서 그날, 대한섬유 길 건너 은행나무 그늘에서 우리는 땀을 식히고 물을 나누어마셨던 것이다. 가로수는 친구가 많고 풍성한 그늘을 자랑한다.

  1. 성서공단노동조합 김희정 위원장과의 인터뷰에서 인용.
  2. Sungseo Industrial Complex Trade Union
  3. 고용노동부에서는 최초 계약서와 달리 다른 업체에서 일을 시키고, 시간급이 아닌 도급제로 바꿔 임금을 떼어먹은 업체에 ‘고용제한조치’를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측 주장이 다르다는 논리로 합의를 종용하여, 노조측 산정 4,000만 원 가운데 2,500만 원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4. ‘청계, 내 청춘’, 안재성, 돌베개, 87쪽 내용 참조
  5. 시다들에게는 직접 월급을 주지 않고 미싱사가 받은 돈에서 나눠주었다. 게다가 공임 단가를 업주 마음대로 정하니 전액이 얼마인지도 알 수 없었다.
  6. ‘이주노동자 월급에서 빼가는 숙식비, 직장 못 옮기게 가로막는 고용허가제’, 평화뉴스, 한상균 기자, 2019.8.20
  7. 당시 권력의 편에 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어용 노조로 존재하던 노동조합 아래 들어가지 않고 회사와 정부의 집요한 탄압과 방해를 견디며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8시 퇴근 투쟁, 와이셔츠 공장 6시 모터 끄기 운동, 임금 체불 해결, 퇴직금 투쟁, 시다 임금 인상 투쟁 등 전태일에 이어 ‘인간 선언’에 온힘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