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이원조] (1) 안동 선비 형제가 독립운동을 하면 생기는 일

다이너마이트, 멋쟁이 신사, 사회주의
육사시집, 발문 이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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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

1927년 10월 18일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낮, ‘펑’하는 소리와 진동이 대구 시내를 덮었다. 맑은 가을 하늘이 검게 변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앞에 도착한 벌꿀 상자 4개가 터진 것이다. 은행원은 폭탄인 사실을 알고 상자를 옮겼지만 곧 터졌다. 꿀이 아닌 다이너마이트가 들어 있었다. 사방으로 튄 파편에 창문 70여 개가 깨졌다. 은행원과 경찰 4명이 다쳤다.

벌꿀 상자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순으로 배달될 예정이었다. 조선 물자를 빼가는 본진을 터트리려고 했다.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한 방 먹인 결과였다. 경찰은 주동자를 찾아 나섰다. 평소 예의주시하던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잡아들였다. 성주 출신 유림 이정기(李定基)1를 포함해 모두 9명이 잡혀갔다.

9명 중 3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 이육사’와 형제들이다. 이육사는 6형제였다. 첫째 이원기(李源祺), 둘째 이육사(본명 이원록 李源綠), 셋째 이원일(李源一)이 잡혀갔다. 당시 원기 27세, 원록 22세, 원일 20세였다. 경찰은 상자에 적힌 글씨체가 원일과 비슷하다고 했다. 원일은 당시 서예가로 인지도가 있었다.

▲1960년대 원촌마을 전경

진범은 따로 있었다. 거사를 계획했던 장진홍(張聖旭)2 은 1년도 더 지난 1929년 2월 일본에서 잡힌다. 육사와 원일은 그해 5월, 원기는 10월에 풀려난다. 경찰은 범죄 혐의가 없는데도 세 형제를 곧장 풀어주지 않았다. 이때 육사의 수인번호가 ‘264번’이다.

경찰은 이들이 국내에서 ‘암살단’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오랫동안 암살을 준비했다고 판단했다. 육사는 1926년 중국 북경에 있는 조선군관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첫째 원기도 의열단 단원이었다. 법원은 예심에서 ‘범죄 혐의 없음’으로 면소 결정했다. 암살단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을 잡아들인 경찰이 혐의를 꾸며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육사가 북경에서 국내로 들어온 시기 등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암살단이 실존했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3.

멋쟁이 신사

첫째 원기는 2년 가까운 옥살이로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형제들이 사는 집에는 늘 책이 가득했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퇴계 학문을 공부한 영향인지 모두 글재주가 있었다. 육사와 원일은 출옥 후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취직했다. 나중에는 육사와 넷째 원조(源朝), 다섯째 원창(源昌)이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형제들은 말끔한 신사복에 한손에는 네모진 가방을 들고 다녔다. 어느 날은 베레모를 쓰고 어느 날은 중절모를 썼다.

육사의 딸 이옥비(78) 씨는 어린 시절 삼촌들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다. 이 씨는 “삼촌들이 오면 정말 패션이 다양했다. 다들 멋쟁이셨다”고 떠올렸다.

▲이육사의 딸 이옥비

세 형제가 모두 풀려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넷째 원조가 잡혀간다. 당시 신간회 대구지회 간부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됐는데, 원조는 대구청년동맹 회원이었다. 이때 육사도 신간회, 대구청년동맹 활동을 하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극도로 신경이 과민한 대구경찰이’ 신간회 간부들을 석방한 뒤, 대구청년동맹 회원 5명을 잡아 극비리에 취조 중이라고 보도했다4.

형제들은 걸핏하면 붙잡혀갔다. 육사 형제들은 일제 경찰에게 요주 인물이었다. 의열단 단원에 신간회 회원까지, 육사는 신간회 대구지회 집행위원을 맡고 있었다. 1931년 1월 21일, 레닌이 세상을 떠난 지 7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경찰은 중외일보 대구지국을 갑자기 수색한다. 기자이던 육사와 원일, 신문 배달원 등 4명을 붙잡아 갔다. <동아일보>는 이 예비 검속이 격문사건 때문일 것으로 추정했다5.

광주학생항일운동 후 대구에서도 동맹 휴업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길거리 전봇대에 일본을 비판하는 격문이 붙은 적 있다. 경찰은 이 사건 배후에 항일단체 활동을 하는 청년들이 있다고 봤다. 결국 육사와 원일은 두 달 동안 옥살이를 한 뒤, 별다른 혐의 없이 풀려났다.

사회주의

1933년 육사는 다시 중국으로 갔다. 이번에는 중국 남경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독립운동을 이끌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1934년 안동경찰서가 조선총독부에 보낸 ‘이원록 소행조서’가 흥미롭다. 고향인 안동 경찰에서도 이미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경찰은 육사에 대해 “성질이 음험하고 교활함. 항상 각처를 배회하고 생업에 열중하지 않음. 다만 세평은 본적지에서는 보통임”이라고 썼다. 이어 ‘개전 가능성 유무’라는 항목이 있다. 조선 독립을 위한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가능성이다. 결론은 ‘무’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 경찰 소행조서, 1934.76

육사는 김원봉의 학교를 다니며 독립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국내로 돌아오면 노동자, 농민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할 생각이었다. 졸업 후 활동 계획을 쓸 때는 더 구체적인 계획을 써냈다. 스스로 타지 생활이 잦았기 때문에 직업을 찾아 고향을 떠나온 노동자들에게 혁명 사상을 가르치고, 실천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나는 도회지 생활이 길어서 도회지인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도회지에 머물러 공작을 할 생각이다. 곧 도회지의 노동자층을 파고 들어서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노동자를 의식적으로 지도 교양하고, 학교에서 배운 중·한 합작의 혁명공작을 실천에 옮겨 목적 관철을 기한다. 운운.” – 경기도경찰부, 이원록 신문조서, 1935.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무장한 육사는 김원봉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육사는 김원봉에 대해 “요는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으면 안된다”7고 꼬집었다. 김원봉이 삼민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로 정치적 지향을 바꾸며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거다. 경찰 심문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김원봉을 평소 생각과 달리 더 세게 비난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육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학을 배우며 자란 안동의 선비에게는 고귀한 지조를 버리는 모습은 용납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육사가 김원봉 학교에 다닌 것 때문에 경찰에 불려 다닐 때 원일도 한 차례 불려갔다. 1936년 6월, 대구에 있던 원일이 서울종로경찰서에 잡혀갔다. <조선중앙일보>는 경찰이 남경군관학교 취조 중에 새로운 단서를 발견하고, ‘인테리 청년’ 원일을 압송했다고 보도했다. 또, ‘의외의 좌익결사사건’이 드러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8. 형제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던 걸까.

▲이원일_조선중앙일보, 종로서 대구에서 청년압송, 1936.6.15.

“종로서 고등계에서는 남경군관학교사건을 취조 중 의외 모종 새로운 단서를 잡었음인지 13일 오후에 대구로부터 이원일이란 ‘인테리’ 청년을 검거압래해가지고 긴장의도를 높여 계속 취조중인데 취조에 딿아 의외에 다른 좌익결사사건이 들어날른지도 몰라 각방면의 주목을 끌고 있는 중이다

육사시집, 발문 이원조

첫째 원기는 43세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원기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1944년, 육사도 중국 북경 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원기, 육사는 1990년 의열투쟁을 한 공로로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육사가 떠난 뒤, 남은 원일, 원조, 원창 삼형제는 이옥비 씨의 집에 자주 들러 생활을 살폈다. 어린 딸과 함께 혼자 남은 형수를 가족처럼 챙겼다.

▲왼쪽부터 원창, 원일, 원조 [사진=이육사문학관]

이옥비 씨는 “6.25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삼촌들이 저희 집에 자주 오셨다. 아버지가 해방 전에 돌아가셔서 어머니 위로 차 오셨다”며 “삼촌들이 오면 ‘형수야, 형수가 아니라 이제 누님이다’ 이렇게 얘기하시고, 술, 담배도 가르치셨다. 우리 어머니는 어른들을 모시고 살아서 그런 걸 전혀 못했다”고 말했다.

삼형제는 육사의 집에 남은 습작들을 모았다. 이옥비 씨의 기억 속에 삼촌들은 올 때마다 서류가방을 불룩하게 채워서 갔다. 이 씨는 “우리 삼촌들이 다 신문사에 계셔서 그런데 밝잖아요. 다 글에 능했으니까”라며 “우리 집에 있는 걸 이만큼 가지고 가셨다. 그때 넷째 삼촌이 대표를 했다”고 말했다. 원조는 1945년 12월 17일, 육사의 시 ‘광야’, ‘꽃’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원조가 덧붙인 두 문장에는 함께 조선독립을 꿈꾸다 옥사한 형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가형이 41세를 일기로 북경옥사에서 영면하니 이 두 편의 시는 미발표의 유가고 되고 말엇다. 이 시의 공졸은 내가 말할 바가 아니고 내 혼자 남모르는 지관극통을 품을 따름이다.”9

삼형제는 육사의 시를 모아 1946년 9월 ‘육사시집’을 발간했다. ‘광야’, ‘꽃’을 포함해 ‘청포도’, ‘절정’ 등 모두 20편의 시가 담겼다. 원조가 시집의 발문을 썼다. 원조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 드나들어야 했던 형 육사를 떠올렸다. 뒤늦게 시를 쓰기 시작한 육사가 왜 그렇게 시를 좋아했을까. 시에 독립의 꿈을 그려보고, 불평도 해보고자 했을 것이리라고 원조는 생각했다.

▲이원조_육사문학관에서

원조는 “과연 ‘천년 뒤 백마탄 초인이 있어’ 그의 노래를 목놓아 부를 때가 있을넌지 없을넌지 모르겠다”며 시집 발간에 도움 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발문을 마쳤다. 해방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원조는 여전히 ‘백마탄 초인’을 찾고 있었다. (계속)

도움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
강윤정 전)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부장(안동대학교 사학과)
이옥비(이육사의 딸)
김균탁 안동 이육사문학관
이원성(이육사 형제의 6촌)
최유창(이원조의 이질)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본부
석은동 대륜고 인문사회부장

참고문헌
이원기 독립유공자공훈조서, 공훈록
이원록 독립유공자공훈조서,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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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기·이원삼·이원일 대구지검 형사사건부 1929.12.9.
이원록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929.5.4.
이원삼 대구지검 형사사건부, 1919.12.9.
이원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929.5.4.
이원삼·이원일 대구지검 집행원부, 1931.3.23.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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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95년 ‘애족장’ 독립유공자 서훈.
  2. 1962년 ‘독립장’ 독립유공자 서훈.
  3. 이성우, 「1920년대 이육사의 국내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
  4. <조선일보>, ‘신간위원검거’, 1930.1.17.
  5. <동아일보>, ‘대구서활동 청년4명검거’, 1931.1.22. 보도는 ‘금일 레닌 탄생일’이라고 썼지만, 1월 22일은 레닌 사망일이다.
  6.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안동경찰서, 이원록 소행조서, 1934.
  7. 경기도경찰부, 이원록 신문조서, 1935.
  8. <조선중앙일보>, ‘종로서 대구에서 청년압송’, 1936.6.15.
  9. <자유신문>, ‘광야, 꽃 – 이육사’, 1945.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