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이제는 여성서사, 여성연대 너머로 ‘블랙 위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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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위도우’는 남편이나 가족의 죽음, 성폭행 당한 자신의 복수를 위해 테러에 나선 체첸 여성들을 말한다. 2000년대 초 러시아에서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대항한 북(北)카프카스에서 양성됐다. 이들은 검은색 부르카(이슬람 여성의 전통복식)에 폭탄이 든 허리띠를 몸에 둘렀다. 러시아군에 의해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검은 미망인(Black Widow)들은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2002년 체첸군이 모스크바의 한 극장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일 때 자살 특공대 41명 가운데 여성은 절반 가까이 됐다. 2004년 벌어진 러시아 여객기 연쇄 테러 사건도 블랙 위도우 소행이라고 러시아 측이 밝혔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속 블랙 위도우는 현실과 다르다. 미국 남부에서 서식하는 검은과부거미에서 따온 코드네임이다. 검은과부거미는 교미 후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남편 자식 다 죽이고 유산을 뜯어내는 사악한 여성이나 요부를 부르는 별칭으로도 쓴다. 새까맣고 조그만 몸통에 특유의 붉은색 모래시계 무늬는 위도우의 상징이다.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는 레드룸에서 고도의 훈련으로 길러진 암살자이자 스파이다. 레드룸은 소련(옛 러시아)에서 여자아이들을 유괴한 뒤 전투 훈련을 시켜 암살자로 양성하는 기관이다. 훈련은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공격하도록 하고, 성인이 되면 임무에 지장이 없도록 자궁을 적출한다. 레드룸 출신 나타샤는 잠입, 암살, 저격, 무기 관련 지식, 각종 전술전략과 전투 등에 능하다. 레드룸에 의해 암살 공작을 벌이다가 쉴드에 합류하게 됐다. 나타샤가 처음 영화에 모습을 드러낸 건 <아이언맨2(2010년)>에서다.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비서로 파견된 쉴드 요원이었다.

이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 7편에 등장했지만,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웠다. 뛰어난 스파이라는 것 외에 과거사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호크아이, 클린트 바튼(제레미 레너)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만 전해졌다. 조력자 역할에 그친 나탸샤는 <어벤져스:엔드게임(2019년)>에서 희대의 빌런 타노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다. 이렇게 세상을 떠난 나타샤의 숨은 이야기를 담은 솔로 무비가 개봉했다. <블랙 위도우>다.

영화의 중심은 레드룸이다. 나타샤와 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 멜리나 보스토코프(레이첼 와이즈), 레드 가디언, 알렉세이 쇼스타코프(데이빗 하버)는 레드룸으로 연결된 사이다. 멜리나와 알렉세이는 임무에 의해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어린 나타샤, 옐레나와 가족이 된다. 1995년, 둘은 미 당국에 발각되기 직전 자매를 데리고 쉴드의 추격에서 벗어나 쿠바로 복귀한다. 부상을 당한 멜리나는 병원으로 후송되고 자매는 레드룸에 입소한다.

시간이 흘러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2016년)> 이후 소코비아 협정을 따르지 않은 나타샤는 미국 정부에 쫓긴다. 어벤져스가 해체된 이후 은신처에 몸을 숨긴 나타샤는 의문의 액체가 담긴 택배를 받은 뒤 태스크마스터(올가 쿠릴렌코)의 습격을 당한다. 가까스로 도망친 나타샤는 습격 사건의 배후에 레드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타샤는 옐레나와 알렉세이, 멜리나와 함께 레드룸을 없애기 위해 힘을 합친다.

<블랙 위도우>는 개봉 전부터 화제였고 개봉 나흘 만에 국내에서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넘겼다. 미국에서는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이 성과는 여성서사, 여성연대의 성취로 갈무리된다. 영화의 주연은 물론, 제작과 연출까지 여성들이 도맡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악당도, 영웅도 모두 여성이다. 레드룸의 창시자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는 여성들의 보호를 받는 존재이고, 레드 가디언은 허풍만 잔뜩 낀 얼간이로 그려진다. 남성 영웅의 조력자나 보호해야 할 대상에 머무르던 여성이 영웅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활약을 펼치는 게 영화의 핵심이다.

다만 <블랙 위도우>가 여성서사와 여성연대에 매몰되는 게 아쉽다. 여성서사와 여성연대를 갈구하는 소비의 특징은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나 TV시리즈 등 콘텐츠 산업계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이라는 이유가 따라붙는다. 또 여성이 업계내에서 차별을 이겨내고 다양한 콘텐츠가 생산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명분도 붙는다.

하지만 남성 영웅서사는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새로운 걸 찾는 사람들에게 여성서사가 신선하다는 건 너무 오래된 얘기다. <에이리언(1979년)>에서 외계생명체를 물리치는 영웅은 여성 엘렌 리플리(시고니 위버)였다. 그 후 엘렌 리플리는 강인한 여전사의 대명사가 됐다. <제5원소(1997년)>에서 지구를 구하는 영웅도 여성 리루(밀라 요보비치)이었다. 좀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강인한 전사도 여성 앨리스(밀라 요보비치)다.

<툼 레이더 시리즈>, <킬빌 시리즈>, <이온 플럭스(2005년)>도 여전사가 주인공이었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와 <원티드(2008년)>에선 여성 주인공이 남성 주인공보다 기억에 남는다. 더 이상 히어로물에서 성별이 바뀐 게 새롭지는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남녀 영웅을 수치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대형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거나, 연출자가 여성감독이라는 것 때문에 ‘여성이 주연 한 영화는 성공하지 못한다’, ‘여성 감독은 큰 영화를 끌어나갈 힘이 없다’는 편견은 더 이상 없다. 이제는 여성서사, 여성연대 너머로 가야하지 않을까.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