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오직 한소희의 노력만 남은 ‘마이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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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버(undercover)는 신분위장을 말한다. 홍콩 느와르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평가를 받는 <무간도(2002년)>에서 언더커버가 소재로 사용됐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우후죽순 쏟아진 홍콩 느와르는 삼합회나 흑사회 같은 범죄조직에서 벌어지는 뻔한 폭력물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범죄조직원들의 의리를 묘사하는데 그쳐, 건달을 멋지게 그려내는 폭력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간도>는 기존 홍콩 느와르와 다르게 액션보다 심리전에 주력했다. 경찰의 스파이가 된 폭력조직원과 폭력조직의 스파이가 된 경찰의 이야기를 통해 긴장감을 극도로 높였다. <무간도>는 거장 마틴 스콜세이지가 <디파티드(2006년)>로 리메이크해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편집상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미스터 소크라테스(2005년)>와 <신세계(2012년)>, <불한당(2016년)>, <프리즌(2017년)>이 언더커버를 소재로 반영했다. 특히 <불한당>은 “나는 시체랑 악수 안 한다”는 <무간도>의 유명 대사를 오마주했다.

하지만 언더커버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용하면서 식상한 소재가 됐다. <마이네임>은 얼개가 그간 수없이 봐온 언더커버 소재 범죄 누아르 그림자가 어리며 기시감마저 든다.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쫓아 범죄조직에 가담한 주인공, 복수의 실마리를 찾아 신분을 숨기고 경찰에 위장 취업, 범죄조직과 경찰 간 신경전, 남녀 주인공이 티격태격하며 결국 사랑하는 전개, 복수만 좇아온 주인공의 후회 등의 전개는 서사적 진부함을 뛰어넘지 못한다.

고등학생 윤지우(한소희)는 마약사범으로 수배된 아빠 윤동훈(윤경호)을 원망한다. 경찰은 집과 학교 앞에서 지우를 감시하고 친구들은 지우를 마약사범의 딸이라고 괴롭힌다. 지우의 생일날, 동훈이 집으로 찾아오지만, 정체를 숨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지우는 아빠의 친구이자 동천파 두목 최무진(박희순)에게서 아빠를 죽인 범인이 경찰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범인을 찾기 위해 동훈이 몸담았던 범죄조직 동천파의 조직원이 된다. 남자만 가득한 동천파 훈련소에서 고된 훈련과 시련을 딛고 실력자로 거듭난다. 5년이 지난 뒤 신분을 감추고 경찰이 되고 마약수사대에 잠입한다.

김진민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언더커버 장르라는 게 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가 적기 때문에 새로워지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엄청나게 새로운 것을 하고자 하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이 장르가 가진 기본적인 부분을 충실히 따라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언더커버 소재의 매력은 신분을 들킬 위기가 반복되면서 발생하는 긴장감에서 나온다. 서로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상대방의 정체를 알았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주인공의 정체가 아슬아슬하게 감춰지거나 발각되는 과정을 주된 재미로 삼는 이유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언더커버의 매력은 느낄 수 없다. 드라마는 중반까지 지우와 무진이 순수한 의리와 우정을 나누고, 희생과 헌신의 결단을 하며, 서로에게 이타적인 마음을 쓰는 모습이 그려진다. 무진은 오른팔 정태주(이학주)보다 지우를 신뢰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처한 지우를 구해낸다. 지우 역시 무진을 믿고 따른다. 동훈의 절친, 복수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해준 것이 신뢰의 바탕일 것이다. 지우가 불면증에 좋다며 카모마일 차를 담은 텀블러를 무진에게 건네고 무진이 그 텀블러를 손에 든 장면이 지우와 무진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 중 하나다.

그런데 중반 이후 무진과 지우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부터는 관계 묘사가 어설퍼진다. 뻔한 반전이 벌어지는데 갈등조차 없이 결말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무진은 피도 눈물도 없는 범죄자인데 지우를 대하는 모습에선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런 무진은 반전 직후 지우를 이용하려는 악당을 바뀐다. 인간적 호감을 저버리기 힘든 일말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고 단지 무진을 악당으로만 설명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지우와 무진이 서로를 믿거나 불신하는 계기가 되는 단서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제시되지만 전혀 참신하지는 않다.

지우의 경우 범죄조직에 가담하는 과정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강해져야 한다는 당위에 지우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보여줘야 한다.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범죄조직에 가담하게 된 지우의 복잡한 내면을 충분히 표현했다면 이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배우 한소희의 액션에만 치중한다. 여성 원톱 누아르에 기대되는 전복적인 재미를 기계적으로만 구현한다. 이 탓에 한소희의 액션 외에는 내세울 게 전혀 없다. 촬영 3개월 전부터 액션 스쿨에서 훈련을 했다는 한소희의 연기에는 처절한 액션을 온몸으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액션신에서는 카메라의 다양한 움직임, 조명에 힘을 준 화려한 색채가 눈을 사로잡는다.

만듦새의 부족함도 아쉽다. 도강재(장율)가 지우에게 마약을 먹이고 겁탈하려는 이유가 단지 지우에게 졌다는 것 때문인 게 작위적이고, 습격당한 동천파가 강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건 납득되지 않는다. 혼자 마약소굴을 소탕하는 무위를 가진 지우가 전필도(안보현)와 함께 맞서는데도 고작 10명의 조직원을 당해내지 못하는 점과 차기호(김상호)가 지우의 존재를 모른다는 점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 밖에 개연성은 빈약하고 대사는 공감되지 않는다. 반전을 곁들인 결말에서는 맥이 빠질 정도로 긴장감이 떨어진다. ‘복수’에 초점을 맞췄으면 반전과 파국 역시 훨씬 개연성 있게 마무리돼야 했다. 오직 배우 한소희의 노력만 보인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