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임신과 출산은 행복일까? ‘십개월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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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르고 임신한 미래(최성은)는 혼란스럽다. 사연은 이렇다. 며칠째 속이 좋지 않은 게 만성숙취 때문이라고 여긴 미래는 약사의 조언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테스트기를 써본다. 부정하고 또 부정해보지만, 임신테스트기 15개에 두 줄이 선명히 그어져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백현진)는 임신 10주 진단을 내린다. 미래는 임신이 확실하냐고 의사에게 따지다가 절친 김김(유이든)의 손에 끌려 병원 밖으로 나간다.

미래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스타트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총괄하던 앱 프로그램이 투자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회사는 본격적인 앱 개발을 위해 중국 상해로 이전할 계획이다. 스타트업 대표(조형찬)는 회사 이전에 대한 미래의 답변을 기다린다.

미래의 남자친구 윤호(서영주)는 돼지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손성찬)의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선배의 사업에 엮여 청년 벤처를 준비 중이다. 사업 아이템은 스마트폰 거치대. 가업을 이으라는 아버지 기대를 저버린 윤호는 성공의 꿈에 부풀어 있다. 미래는 조심스럽게 윤호에게 임신 소식을 알린다. 윤호는 반가워하며 결혼하자고 조른다. 그런데 미래는 답답하고 막막하다. 전력을 쏟던 일은 이제 겨우 결실을 보게 됐고, 윤호는 가정을 꾸릴 능력이 되지 않는다.

아기의 태명은 카오스(Chaos), 혼돈이다. 출산과 육아, 중절과 낙태 등 모든 상상이 미래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터무니없이 비싼 낙태 비용과 결혼을 종용하는 남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사이 시간은 흐른다. 어느 날 산부인과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 강미(권아름)를 만난다. 만삭의 강미는 아기를 낳으면 행복할 거라고 말하며 무알콜 맥주를 마신다. 강미를 보면서 미래는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출산을 받아들인 미래는 임신부 요가를 다니며 엄마가 될 준비를 한다. 처음 느낀 태동에 혹여나 아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임신부가 된 미래의 삶은 불편하기만 하다. 만삭이 된 몸으로는 주차된 차들 사이로 들어가 차 문을 열기도 어렵고, 출산 휴가는 딱 한 달만 쓰겠다는데도 대표의 표정은 싸늘하다. 정규직 되자마자 출산 휴가 쓰냐며 역정을 내더니 미래를 해고한다.  IT회사에서는 미래의 뛰어난 경력을 인정하면서도 출산해야 하는 미래의 입사를 거부한다.

10개월이 지나고 미래는 출산한다. 세상과 힘겨운 사투 끝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아기와 마주한다. 미래는 아기를 보며 만감이 교차된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 이제 시작해 보자.”

임신과 출산은 반드시 축복이고 행복일까. <십개월의 미래>는 임신과 출산을 무조건 숭고하게만 여겨왔던 사회에 물음을 던진다. 계획에 없던 아이를 가진 미래는 자신이 이제껏 일군 모든 것을 잃었다. 미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출산을 앞둔 여성에게 오직 엄마로서의 역할만 강요하는 세상이다.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윤호 역시 마찬가지다. 윤호는 부모 세대에게 짓눌리며 선택을 강요당한다. 결국 물적 기반을 마련할 길이 요원해 부모가 가진 자원에 의지하게 된다.

저출산 문제는 사회 아젠다로 떠오르면서 사회는 출산과 육아를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장 큰 문제는 미흡한 정책보다 임신과 출산을 향한 편견 어린 시선과 가부장적 문화다. 윤호 아버지의 대사가 단적이다. “아기에게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이제 너희 인생은 너희의 것이 아니야.”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를 기피하는 청년세대 편을 드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됐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체념한 채 살아야 했던 기성세대가 국가의 존망을 내세우는 출산 강요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지난 관습에 얽매여 부모의 삶을 강요하는 프레임에서 탈피해, 저출산 문제에 대해 청년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는 의미다.

<십개월의 미래>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 성적 대립을 넘어 세대 담론을 이끌어낸다. 딱딱할 수 있는 소재를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풀어간다. 서사는 임신 주기로 챕터를 나눠 리듬감 있게 전개한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제법 있고 진지하게 고민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영화가 마냥 우울하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주연배우 최성은은 <시동(2019년)>과 전혀 다른 연기를 선보인다. 전문직이 가장 잘 어울리는 종합예술인 백현진은 낮은 비중에도 미래를 위로하는 몇 마디로 울림을 준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