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찾을 수 없습니다’, 사회적 참사의 집단기억을 소환하는 로맨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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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소재를 로맨스/멜로 장르에 접속하는 과정은 의외로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코미디라면 풍자의 수위 조절을 통해 우회할 여지가 있지만 지극히 사적인 감정의 개인들이 주역인 해당 장르물에선 그 높낮이를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사회 물로 성격을 규정했다면 인물 이야기를 주제에 맞추면 되겠지만, 그 역의 경우에 녹여내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엄하늘 감독의 <찾을 수 없습니다>는 학생영화 중 고난이도의 과업을 달성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2003년 여름, 대구와 경북의 경계에 해당하는 칠곡 어느 학교에 지환이 전학 온다. 옆자리 은아와 지환은 이상은의 노래를 mp3로 함께 들으며 친해진다. 알고 보니 은아도 대구에서 전학을 왔고, 둘 다 어머니를 여읜 처지다. 동병상련 때문인지 소년과 소녀는 단짝처럼 친해진다. 그런 어느 날 은아는 대구 동성로 지하상가로 함께 이상은 CD를 사러 가자고 제안한다.

▲영화 ‘찾을 수 없습니다’ 스틸이미지

#사회적 소재를 화학적으로 결합해낸 멜로영화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전형적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 청춘 로맨스물이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사춘기 시절의 이뤄지지 못해 더욱 아련했던 순간의 감성을 추출해 영구보존해놓은 결정체 같은 작품이다. 이걸 식상하지 않게 깔끔하게 완결 짓는 것만으로도 학생 제작 단편영화로서 합격점을 줄 만하다. 오직 그것만으로 인생영화들을 쏟아내던 이와이 슌지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작품의 강점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영화는 두 주인공이 가까워지게 되는 배경으로 그들에게 슬픈 가정사라는 공통점을 배치하고 한 꺼풀씩 그 비밀을 공개해나간다. 그 퍼즐에는 사회적 참사와 재난이라는 쉽게 덤비기 망설일 수밖에 없는 실제 사건의 기억이 짙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어설프게 소재를 활용하다간 욕먹기 딱 좋은 함정이다.

소녀, 은아는 어머니를 2003년 2월 18일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 역 방화가 원인이 된 참사로 잃었다.

소년, 지환은 동 시기 중앙로역과 연결된 동성로 지하상가 재개발 관련 생존권 싸움 중 어머니를 잃었다.

그렇게 상실감을 지닌 채 살아남은 둘은 함께 그들이 떠나왔던 동성로로 돌아온다. 소년과 소녀는 함께 데이트하고 지하철 참사 현장을 방문한다. 소년은 어머니의 기억이 깃든, 그래서 그동안 찾지 못하던 지하상가의 레코드 가게를 들른다. 그리고 소녀에게 이상은의 cd를 선물한다. 그리고 둘은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한다. 영화 제목 그대로다.

감독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대구를 떠났다. 진로를 영화로 택했는데 지역에는 영화전공학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관련전공에 매진하던 감독은 지역다양성영화 지원사업 프로그램에 선정된 덕분에 자신이 지역에서 보고 들었던 사회적 참사의 기억을 녹여낸 본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흔히 “미장센”이라 불리는, 감독이 영화에 대한 설정이나 연출의도를 은유나 상징으로 표현하기 위한 영상 표현을 정교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미학적 평가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찾을 수 없습니다>는 그저 정교함을 가뿐히 초월해버린다. 그 차원에 도달하리라곤 영화를 처음 볼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사회적 참사의 기억을 소환하는데 공들인 감독의 집념

▲영화 ‘찾을 수 없습니다’ 스틸이미지

감독은 지역적 차원의 집단기억을 소환하고 재현하는 데에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쏟아 부어 (일반적인 학생독립영화 제작여건을 고려할 때)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에 근접한 결과물을 선보인다. 그런 완성도를 끌어낸 감독의 집착을 넘어선 의지에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다. 영화를 본다면 그저 허투루 공허한 상찬을 쏟아내는 게 아니란 걸 다들 납득할 거라 자부한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는 여전히 지역시민들은 물론 반면교사로 한국현대사에 생채기처럼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해당시기 일어난 대구광역시 도심 정비와 재개발 과정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은 어느새 지역에서도 잊혀진지 오래다. 청소년 시절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코팅해 책받침으로 만들거나 최신 대중음악 앨범을 구하기 위해 들르곤 하던 지하상가가 말끔히 정비되고 난 뒤 그 시절 가게주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사라졌다. 동성로 번화가에서 노점 쇼핑을 하거나 군것질하던 때 추억은 어스름처럼 희미하게 잊혀졌다.

본 작품 최대의 장점은 소중하지만, 세파에 휩쓸려 사라져간 사회적 기억을 세대 차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문화적 코드를 부작용 없이 조화시켜낸다는 것이다. 배경인 2003년으로 관객이 시간여행 하듯 영화 속 세계는 세심하고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추억의 와레즈 사이트나 (감독의 개인 소장품 컬렉션이 바탕일 법한) 그 당시 유행하던 문화코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소품들이 꼼꼼히 배치되어 있다. 웬만한 고증 ‘덕후’가 아니라면 적어도 이 영화에서 시대배경 재현에 대해 크게 흠을 찾기는 어려울 수준이다.

여기까지면 감독의 완벽주의 추구가 달성한 성과로 놓으면 족할 일이다. 그렇지만 중앙로역 침묵의 벽 장면을 유심히 본다면 그것이 온전히 영화를 위해 재구성된 것임을 확인하고 경탄하게 될 테다. 약간의 키치적 센스가 부자연스럽지 않게 사회적 참사에 대한 애도의 감정에 섞여든다. 훨씬 많은 자원이 투여된 상업영화들도 자주 길을 잃고 헤매게 마련인데 감독의 집념에 은근히 소름이 돋을 정도다.

▲영화 ‘찾을 수 없습니다’ 스틸이미지

#차세대 유망주들이 구현한 청춘 로맨스의 정수

여기에 섬세한 감정연기를 큰 무리 없이 소화해낸 두 주연배우의 연기력도 합격점 이상이다. 소년 지환 역을 맡은 배우 유재상은 이미 정지우 감독의 2014년 영화 <4등>에서 재능은 있지만, 만년 4등인 수영 선수 ‘준호’ 역으로 쟁쟁한 성인연기자들과 합을 겨루는 주연으로 활약한 바 있다. 소녀 은아 역의 배우 정다은은 2016년 이지원 감독의 그해 독립단편영화상을 석권한 <여름밤>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후 <선희와 슬기>(2018), <비밀의 정원>(2019), <혼자 사는 사람들>(2021) 등 다수의 독립장편영화에서 주연을 맡고 있다. 이 촉망받는 신예 연기자들의 어우러져 비밀스러운 추억의 앨범을 훔쳐보듯 관객을 자연스러운 몰입의 순간으로 이끈다.

그렇게 정교한 조합으로 구조화된 영화는 풋풋한 첫사랑 감성과 함께 애도와 연민의 추념까지 더불어 전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면서도 본 작품은 청춘 로맨스의 기본궤도를 절대로 이탈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분명히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우선순위는 로맨스 장르라는 게 명백하다. 아련한 상실감, 붙잡고 싶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모래시계를 탄식하며 쳐다봐야만 하는 떨림의 감정이 <찾을 수 없습니다>에는 온전히 구현되어 있다. 장르물의 빼어난 완성도에 추모의 집단기억을 소환해내는 두 마리 토끼를 온전히 사로잡는, 이후로도 주목할 만한 후속작업들을 이어가는 중인 엄하늘 감독의 “홈 커밍” 선포식이다.

<작품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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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한국|로맨스/멜로|28분
감독 엄하늘
주연 유재상(임지환 역), 정다은(정은아 역)
출연 윤진(담임 역), 김혜영(지환 모 역)
우정출연 문혜인(기자 목소리)
배급 센트럴파크

2018 19회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대상
2018 17회 미장센단편영화제
2018 6회 인천독립영화제
2018 14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2018 2회 신필름예술영화제
2018 16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2018 18회 전북독립영화제
2018 20회 대전독립영화제
2019 36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
16회 플로렌스한국영화제
21회 숏쇼츠필름페스티벌 & 아시아(일본)

김상목 영화칼럼니스트
spanishbom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