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숨어드는 산’, 현대사의 블랙홀에서 디스토피아 SF를 시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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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 <파도를 걷는 소년>, <식물카페 온정>을 선보여 왔고 신작 <레이오버 호텔> 공개를 앞둔, 2010년대 이후 ‘대구 독립영화 르네상스’의 출발을 알렸던 최창환 감독의 근작 <숨어드는 산>은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영화다. 이 기묘한 작품은 이후 만나게 될 관객의 세대와 경험에 따라 상이한 수용과정을 거치며 해석될 것이다.

1_87년 6월 항쟁이 사라진 평행세계 이야기

▲영화 ‘숨어드는 산’ 스틸 사진

영화의 시작과 함께 “2020년 여름, 한국은 아직 제5공화국이다”라는 문구가 화면에 등장한다. 그 시대를 경험했거나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역사 팩션 물로 다가갈 것이다. 끔찍하거나 진저리날 불쾌한 기억을 소환할 것은 덤이다. 반면 그 시절을 온전히 소화해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대체역사물을 떠올리며 그의 한국적 변용으로 인식할 법하다. 이 미묘한 결의 차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상이한 감각을 관객 각자에게 부여해줄 것이다.

영화 속 세상은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개발독재정권이 이어지는 중이다.(전두환이 40년째 권좌에 있다는 설정의 논리성에 대해선 넘어가자. 일종의 상징으로 봐주면 족할 일이다) 여전히 밤이 되면 통금이 시행되고 산에는 반정부 세력이 할거한다. 사실상 계엄령에 준하는 체제다. 이런 설정은 독립영화에선 오히려 드물지만 장르 소설에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거나 정치적 판단미스나 우연의 일치로 군사독재가 이어지고 있다는 세계관은 흔하디흔하다.

▲영화 ‘숨어드는 산’ 스틸 사진

대구시경 방첩대 소속 인혁과 상준은 국보법 위반으로 수배 중인 최명훈의 임신한 아내 이수경을 감시중이다. 그녀의 모든 일상은 둘에게 감시와 도청 대상이다. 공안사범의 가족이 겪는 연좌제로 이수경의 삶은 지옥과 같다. 그런 시달림 끝에 그녀는 남편 소재를 알려주겠다고 제안하고 셋은 순천으로 향한다. 인혁은 수경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하지만 수경의 남편을 체포해 자신들은 성과를, 수경은 족쇄에서 풀려나는 소박한(?) 결말을 동상이몽을 하던 그들의 여정은 위기에 처한다.

<숨어드는 산>에는 21세기 이후 한국사회에서 어느새 잊힌 역사의 어두운 기억이 가득 들어차 있다.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산악 베이스 무장투쟁은 1963년까지 존재했다. 불과 반세기 전까지 상당수 산간지역은 총성이 오갔던 것이다. 지리산 빨치산이라는 게 한국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체감한다면 이해가 빠를 테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까지 반정부 세력을 상시 사찰하고 때로는 정권의 여론작업 필요에 의해 “기획수사”라는 명목으로 조작사건을 양산해왔던 공권력의 음침한 이면이 작품 속 주요한 위기요소로 반영된다. 한국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집에서 자다가 밤중에 공권력에 의해 끌려가는 경우는 일반이 상상하기 힘들어진) 민주화된 국면에 이르렀는지 경과의 이해도에 따라 영화의 체감지수는 현저히 차이날 것이다.

2_수배자 가족과 방첩대 형사들의 기묘한 로드무비

인혁과 상준은 지방경찰청 방첩대 소속이다. 형사들이지만 이들은 민생치안에 종사하지 않는다. 반정부 수배자의 가족이란 이유로 임산부를 하루 종일 감시하고 보고하는 게 일과의 전부다. ‘방첩’이라는 생소한, 뜻을 알고 나면 살벌한 용어를 이해하면 그들의 업무와 성격을 이해하게 된다. 적국의 간첩에게서 국가와 사회를 방어한다는 의미다. 과거 독재정권의 상투적 표현, ‘방어적 민주주의’를 지탱하던 거대한 외부의 적, 북한이 존재하기에 온 사회는 ‘멸공’이 (마치 나치독일 시절 ‘하일 히틀러!’를 연상시키듯) 안부 인사처럼 통하는, 그 가상의 적과 닮은꼴이 되어 있다.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된 사회의 풍경이 흑백의 칙칙한 화면에 가득히 펼쳐진다.

▲영화 ‘숨어드는 산’ 스틸 사진

두 형사는 ‘기획수사’를 진행 중인 본청 특설대 요원들과 순천에서 마주친다. ‘특설대’라는 이름에서 몇몇은 역사 속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하던 간도특설대를 떠올릴 테다. 항일 무장 세력을 같은 조선인들로 제압할 목적으로 조직된 특수임무부대로 독립군 탄압에 혁혁한 실적을 내던, 친일인명사전에 일반대원까지 등재될 만큼 악명을 떨쳤던 존재다. 박정희나 백선엽 같은 만주군 출신 한국군 인맥의 기원이기도 하다. 그들이 신분세탁을 위해 내세운 논리가 자신들은 오직 공산당 계열 게릴라들과만 싸웠다는 반공투사 주장이었음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본 작품의 설정 차용은 명칭만으로도 어떤 기시감을 불러올 테다.

대구에서 셋의 기묘한 여정이 닿는 곳은 순천, 이어서 함안 일대다. 여수•순천 반란사건과 빨치산 투쟁의 중심지였던 공간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차례로 거치는 셋의 여정은 명민한 관객이라면 하나의 지도를 머릿속에서 상상하게 만들 테다. <숨어드는 산>은 해방전후부터 불과 한 세대 전까지 지속되어온 반공을 내건 독재체제의 기억을 소환하는 디스토피아 장르물의 형식을 취한다. 몇 개의 상징적 용어와 장치들이 강렬한 연상 작용을 관객의 뇌리에 호출하고, 저예산 한계를 최소화하기 위한 흑백 촬영은 영화제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 외국 실험영화들의 스타일과 연결된다. 리얼리즘 접근이 위주인 한국의 독립영화들에서는 드물지만, 장르적 접근법이 활발하게 통용되는 해외에선 흔한 방법론이다. 그 결과 일부 소품 외에는 천연덕스럽게 현재 배경 그대로인데도 평행세계를 구현해낼 수 있었다.

▲영화 ‘숨어드는 산’ 스틸 사진

3_한국 독립영화에서 보기 드문 대체역사물의 등장

영화는 정교한 디테일보다는 몇 개의 중심축과 장치를 기반을 둔 설정을 펼치며 관객 개별적 상상을 유발하려는 접근법을 취한다. 한국현대사의 암울한 이면, 모두가 잊고 싶어 하지만 현재에도 엄연히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구체제의 기억을 영화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라는 존 그리샴의 책 제목을 살짝 비틀면 ‘그래서 그들은 산으로 갔다’는 논증의 과정으로 전환된다.

극중 명훈의 어머니가 수경에게 말하듯 산은 공권력이 함부로 발붙이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 반란자들의 영역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에서의 빨치산 투쟁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실제로 한국의 반체제 투쟁 또한 한국전쟁 이후 도시 내 반정부조직이나 비합법시위 조직에 집중했었다. 국토 대부분이 산간지대라지만 대규모 무장 세력이 유지되기엔 (반달곰을 방사해도 안정된 생활권 영역 확보가 힘든 것과 동일한 이유인) 너무 비좁고 자원획득이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든 이들도 그런 고증에 얽매이기보다는 상상적 공간으로 ‘산’을 상징했을 테다.

▲영화 ‘숨어드는 산’ 스틸 사진

최창환 감독과 수차례 협업해왔던 김시은 배우가 담당한 수경은 기이한 존재다. 중국 동포출신인 그녀는 대개 민주화-반정부운동가의 부부라면 실제로도, 그리고 상상적으로도 지지와 협력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오히려 가상의 시대적 비극을 온몸으로 상징하는 존재에 가깝다. (영화 바깥 현실에선 공안통치가 횡행하는) 중국의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은 스크린 바깥에서 이를 응시하는 관객에게는 기묘한 역설로 다가온다. 모든 독립영화 감독이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한다는 강길우 배우가 맡은, 수경을 향한 연민에 빠져버린 인혁은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양심에 흔들리는 모순적 개인을 표상한다. 그의 동정심은 모호하고 복합적인 욕망과도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별 캐릭터로서 그의 연민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모호한 편이다) 이한주 배우가 담당한 그의 파트너 상준은 범죄적 체제가 선량한 개인을 어떻게 물들이는가를 보여주는 예시와도 같다. 영화 속에는 그런 캐릭터들이 그 말고도 여럿 등장하고 있다.

체제에 대한 비판적 주체성 없이 그저 소박한 행복과 체념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사회적으론 다수다. 일제강점기 때나 군사독재 시절이나 그랬을 테다. 하지만 권력의 흑막은 끊임없이 가상의 적과 그 위협을 만들어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체제다. 오직 자기 필요에 의해 권력의 변덕이 휘두르는 칼날은 어디로 춤출지 모를 일이다. 그때마다 평범한 이들은 납작 엎드려 제발 그 광풍이 나와 주변을 피해 가기만 기다린다. 내 이웃이 졸지에 반정부사범으로, 간첩으로 몰려 풍지박산이 나도 재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며 안도한다. 이게 바로 독재의 시민 길들이기 동서고금의 진리다.

▲영화 ‘숨어드는 산’ 스틸 사진

여행을 떠난 세 사람은 그 잔혹한 신과 같은 권력의 공포에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차례로 휩쓸려간다. 그들 각자가 처하게 될 운명과 판단은 상징적으로 다른 유형을 취한다. 주인공들 각자의 결말은 개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살아간 특정 집단의 방향성에 가까운 형태일 것이다. <숨어드는 산>의 결말은 그래서 영화를 본 관객의 세계관에 따라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과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 사이에서 가변적인 엔딩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개봉을 준비하는 본 작품이 과연 2020년대의 관객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작품정보>

숨어드는 산 A Hiding Mountain
2020|한국|드라마|105분
감독 최창환
주연 김시은(수경 역), 강길우(인혁 역), 이한주(상준 역)
출연 변중희(순덕 역), 홍상표(중석 역), 한해인(해수 역), 이송희(갑보 역)
우정출연 곽민규(검문병 역), 정수지(윤정 역)
PD 윤 진
촬영 전상진
녹음 박송열
각본 및 편집 최창환
제작 포레스트 필름
제작지원 울주세계산악영화제, 한국영상위원회

2020 5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
2022 한국영상자료원 로컬시네마: 대구×경북 기획전

김상목 영화칼럼니스트
spanishbom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