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나랑 아니면’, 펜데믹에 직면한 노부부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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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2020년 봄, 코로나19에 직면한 어느 노부부 이야기

박재현 감독의 두 번째 단편 <나랑 아니면>은 1년 전, 코로나19 1차 대유행 시절 대구를 배경으로 ‘김수’와 ‘박원’ 노부부의 평범했던 일상에 찾아온 변화를 일상물의 결로 접근한다. 자식들을 분가시키고 둘만 남은 노부부는 예식장 청소로 알바를 해왔다. 하지만 코로나 여파로 예식장은 휴업하고 둘은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영화 ‘나랑 아니면’ 스틸이미지

당연히 코로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들을 비껴갈 리 없다. 노부부에겐 펜데믹이 닥치기 전에도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노인 소외 문제가 심각한 위협으로 닥쳐오고 있었다. 독립한 (부모 도움이 딱히 필요 없어진) 자녀는 노부부의 연락을 피하는 티가 역력하다. 이것저것 일거리를 찾아 문을 두드려 보지만 노부부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폐지를 줍거나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는 스테레오 타입 빈곤 노인은 아니지만 한국사회 노인복지 문제는 주인공에게도 어김없이 닥쳐온다. 하지만 본 작품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이제 속속 등장하고 있는) 영화들과 달리 사회적 쟁점보다는 노부부의 관계와 일상성에 집중하려 한다.

2_사회비판 대신 그들의 소외된 일상을 조명하다

<나랑 아니면> 속 부부의 일상은 지독히 권태롭지만 동시에 평화로움 그 자체다. 하지만 부부의 작은 보금자리 바깥세상은 역병의 혼란 속에서 나날이 팍팍해지고 있다. 마스크를 사볼까 들렀던 약국에선 2년 전 우리가 겪었던 살풍경이 재현된다. 약국마다 KF94 마스크를 구하러 줄을 서고 발을 동동 구르던 끝에 예민해진 우리들의 (지금 생각하면 대체 왜 그랬을까 싶을 만큼) 까칠함이 이제는 쓴웃음을 동반해 펼쳐진다. 노부부 중 아내가 부업삼아 무단살포 전단지 수거를 산보 겸하는 중, 이를 발견한 배포업자와 시비가 붙는다. 여유 있는 이들은 코로나 시기 재택근무가 라이프스타일 변화 문제이지만 일감이 없어진 불안정노동계층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다. 생계에 대한 위기감은 양보와 배려를 소멸시킨다. 그렇게 신경 곤두선 업자의 날선 위협에 바짝 긴장한 할머니는 다행히 큰 봉변 없이 현장을 벗어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각박해진 세태 묘사가 간간이 당시의 풍경을 상기시키긴 하지만 <나랑 아니면>의 초점은 명확히 주인공들의 일상 묘사에 집중된다. 수십 년을 함께한 노부부의 견고하게 축적된 시간, 그 지층의 깊이를 표현하는데 영화는 분명한 기준을 세우고 주력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영화 ‘나랑 아니면’ 스틸이미지

영화는 몇 개의 장면으로 그런 일상의 재구성을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시작과 함께 부부는 늘 지나다니던 동네 시장에서 각자 다른 기회에 새로 등장한 사진인화 트럭을 발견한다. 이 트럭 발견에서 촉발되는 소소한 일화들은 사건 자체로만 놓고 보면 대단한 역할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해당 장면들은 감독이 세밀하게 배치한 노부부 삶의 재현에서 핵심적인 장치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우선 전문 사진가가 아니라도 이제 적지 않은 이들이 DSLR을 소유한 시대이긴 하지만 고가의 전문 카메라는 영화 속 주인공들에겐 여전히 낯설다. 하지만 이제 실버 세대에게도 스마트 폰은 (하다못해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 자녀들의 효심을 측정하는 척도로라도) 보급된 상태. 통화나 문자 외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능은 당연히 폰 카메라로 사진 찍기다. 그러나 저장용량에는 한계가 있고 사진은 그저 용량만 잡아먹어가며 누적되기 십상이다. 그런 소중한 추억의 유실을 막는 도구로써 휴대전화 속 저장된 사진 인화는 노부부에게 작은 위로의 기능을 톡톡히 해낸다.

100세 시대란 말이 공공연히 나오지만 건강하고 여유로운 100세보다는 아프고 여유 없는 100세 시대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무엇보다 사회 주류에서 멀어지고 외톨이가 되는 정서적 박탈감은 경제적 문제가 일정부분 해결되더라도 향후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그저 경조사 사진과 과거 향수를 떠올리는 추억 사진들로만 채워졌던 부부의 보금자리에 그들의 현재가 액자로 추가되는 것은 얼핏 별것 아닌 듯해도 감독이 자신과는 다른 세대에 대해 치밀하게 조사하고 이입했다는 증거로 작용한다.

비록 주인공들은 심하게 빈곤하거나 중병으로 비참한 노후를 보내는 삶은 아니지만 세상은 물론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일상을 오직 서로를 의지하며 보내는 존재들이다. (독립영화에서 흔히 묘사되는 ‘폐지 줍는 노인’과는 현격히 차이 나는) 썩 나쁘지 않은 노년을 보내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그런 그들의 삶을 과연 누가 기억할 것인가는 알 수 없다. 영화 속 사진액자는 그런 그들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증거’로 울림을 가진다.

노부부는 정성들여 식물을 가꾼다. ‘반려동물’에 이어 ‘반려식물’이란 용어가 유행하지만 사실 이건 우리네 조부모 시절부터 이미 존재했던 ‘오래된 미래’의 부활 격에 불과하다. 주인공들은 정성들여 오랜만에 연결되어도 끊기 바쁜 자식들 대신 말은 없지만 항상 곁에서 그들을 지켜주는 식물들을 챙긴다. 어찌 보면 처연한 순간이지만 인간을 넘어선 도시 내 구성원들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영화 ‘나랑 아니면’ 스틸이미지

희미한 가능성의 단초도 보인다. 할머니는 놀이터를 지나던 중 공기놀이를 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누린다. 보고 싶은 손주들 대신이기도 하지만 나이와 관계성을 넘어 다른 세대와 정정당당하게 솜씨를 겨루는 기회이기도 하다. 도시공간의 공동체 측면이 보다 확장된다면 영화 속 주인공 노부부 같은 이들은 사회적 고립에서 조금 더 벗어날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저 향수로만 해석되지 않을법한 장면이다. 이렇게 몇 가지 소소하지만 인상적인 아이템들이 노부부가 존재하는 시공간을 효과적으로 상징화한다.

물론 이들에겐 좌절도 따른다. 그들이 코로나19를 맞아 전화위복 겸 긍정적으로 추진해보려던 작은 꿈은 세상이 아수라장인 가운데 끝내 피어나지는 못한다. 야박한 인심 탓이지만 노부부의 소우주는 꽤 견고하기에 그 작은 좌절에도 헛헛해 하며 흘려보낼 따름이다.

3_대구 독립영화의 다음 세대를 선언하는 서막

2년 전 당시 사회적 고립 속에서 오히려 영화 속 주인공 노부부는 꽤나 잘 견뎌냄은 물론 자신들을 돌아볼 작은 틈도 얻은 것처럼 보인다. 항상 많은 불행 속에서도 누군가는 작은 기회를 찾아내곤 한다. 변화는 그렇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나랑 아니면>은 한국 독립영화가 노인 문제를 다루는 전반적 경향과 정서에선 퍽 의외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전작 <Pizza sucks without U>부터 일관되게 세대를 초월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성에 천착해온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공감과 치유를 희구하는 기호에 발맞춰 숨 쉴 곳 찾는 이들에게 휴식 같은 순간을 제공해줄 테다. 이 영화는 사회적 비판에 날을 벼리다 손을 베이기보단 주변에서 소소한 도울 거리를 찾는 착한 이웃의 마음가짐으로 흘러간다. 작품 속에서 노부부의 송가처럼 들려오는 이문세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 가져다주는 위로의 정서를 꼭 빼닮은 영화다.

▲영화 ‘나랑 아니면’ 스틸이미지

그렇게 소박한 미덕이 돋보이는 영화이긴 하지만, 본 작품을 만든 박재현 감독을 필두로 예전의 도제식 코스가 아닌 지역 최초의 정규 영화수업인 ‘대구영화학교’ 출신들의 본격 활동을 알리는 신호탄으로서 <나랑 아니면>이 갖는 위상과 의의는 작지 않다. 몇 명의 굵직한 이름이 갑자기 증발하면 소멸하는 게 아니라 앞선 세대의 영향을 받아가면서도 자유로운 창작을 펼치는 동 세대 그룹의 존재가 확인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나랑 아니면>의 뒤를 이어 새로운 이름들이 차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차세대 감독들의 선의의 경쟁이 어떤 결실로 맺어질까 흥미롭게 지켜볼 생각이다.

<작품정보>

나랑 아니면 Without You
2021|한국|드라마, 로맨스|34분
감독 박재현
주연 권민경(김수) 오강진(박원)
출연 배지예, 조한탁, 김준수, 김홍완, 박지수, 채승우, 남가원
PD 김재은
촬영/조명 고현석
각본/편집 박재현
음악 전일환
미술 김선빈
동시녹음 권민령
사운드 박철형
배급 포스트 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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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영화칼럼니스트
spanishbom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