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중고, 폴’, 인생의 다음 단계로 전진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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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d by Amazon Polly

‘지역영화’, 혹은 ‘로컬영화’란 무엇일까? 참 모호한 질문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일부인 블록버스터 영화 <블랙 팬서>의 일부가 부산 해운대에서 촬영했다고 해서 해당 작품을 ‘부산 영화’라고 칭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특정지역에서 촬영하거나 풍경이 담겨 있다고 ‘지역영화’라고 부르긴 애매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저 ‘중앙’, 서울이 아니라 텅 빈 느낌의 ‘지역’에서 만드는, 좀 더 ‘열화’된 것 같은 느낌의 영화가 지역영화인 걸까? 그렇다면 너무 비하적인 표현이 될 테다.

‘지역영화’라는 개념은 완성된 영화 형태라기보단 일종의 ‘지향’, ‘운동’ 개념에 가까울 수 있다. 처음부터 영화가 특정한 지역에 모든 걸 맞춰서 창작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렇게 만든 영화의 수용범위 문제도 있다. 자신의 영화가 특정 지역에서만 온전히 이해되거나 수용 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이며 영화작업에 나설 창작자는 극히 드물 테다. 그러나 그저 뛰어난 풍경이 아닌, 해당 공간이 품은 시간과 역사가 영화 속에서 중요한 비중 혹은 결정적 요소를 차지하고, 지역 영화인들의 작업이 특별한 차별성을 띤다면 ‘지역영화’ 경향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구분할 수는 있겠다.

그런 측면에서 <중고, 폴>은 제작진의 전후 행보로 보나, 영화 속에 담긴 세계로 보나 제법 그 범주에 잘 들어맞기에 ‘지역영화’로 호명될 만하다. 물론 이 영화에선 ‘대구‧경북’이라는 지명 한번 언급되지 않지만.

1_버려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착에서 출발하는 영화

철민은 오늘 이사를 한다. 대충 짐정리를 마쳤지만, 냉장고가 문제다. 모텔에서 일박하거나 고시원에서 생활해본 이들이라면 익숙할, 1도어 소형 냉장고. 냉동실 분리가 안 되고 큰 건 안 들어가는 애매함의 극치. 게다가 오래 썼는지 덕지덕지 스티커가 붙어 있는 모양새다.

▲영화 ‘중고, 폴’의 한 장면

그는 손수레에 냉장고를 싣고 털털 소리를 뒤에 단 채 재활용 가게로 향하지만, 퇴짜를 맞는다. 육교를 오르다 냉장고를 놓쳐 덜컹덜컹 계단 아래로 추락하는 꼴을 보기도 하는 짜증나는 여름날이다. 철민은 왜 이 중고냉장고에 골머릴 싸매는 걸까.

김은영 감독과 황영 PD의 협업으로 완성한 <중고, 폴>은 아마 이제는 꽤 지명도가 생긴 오동민, 원진아 배우의 초창기를 볼 수 있는 희소성으로 주로 기억될 작품이다. ‘아니 이 배우들이 이런 작품에도 출연했었어?’ 같은 말이 따라붙기 ‘딱’인 작품이다. 하지만 만약 두 배우 출연작이 아니었다면?

물론 본 작품의 캐스팅은 지금 기준으로 봤을 땐 상당히 놀라운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연히 검색하다 발견한 연기자 섭외 광고를 확인해서 알게 된 바에 의하면 두 배우는 정말 원래 섭외조건에 찰떡처럼 들어맞는 이미지다. 필연이 우연을 매개해준 셈이다.

십여 분 남짓한 전형적인 단편영화 분량과 호흡을 가진 <중고, 폴>은 한편의 영상에세이 혹은 성인용 그림동화를 연상하는 구조를 취한다. 관객은 그림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이야기를 확인해나가는 셈이다. 그 중간중간 넘기려다 만 채 독자의 특권이기도 할,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대입해나가며 행간의 여운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구성이다.

스토리는 간단하지만 <중고, 폴>은 주변의 흔한 사물, 그것도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내다버릴 낡은 물건에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사연을 기억장치처럼 가득 저장해두고 그것 때문에 망설이며 괴로워하는 풍경의 집합체다. 철민은 냉장고에서 자신이 몇 년간 세월을 보낸 원룸의 시공간을 본다. 그 추억은 벗어나야 함을 알지만 쉽게 헤어나기 힘든 슬픈 사연을 품고 있다. 철민은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이 방에서 탈출할 것을 결심은 했지만, 미련은 쉽게 극복할 수 없다.

▲영화 ‘중고, 폴’의 한 장면

2_왜 철민은 냉장고에 집착하는가?

영화 속 한나절은 철민이 다양한 방법으로 그저 회피하는 게 아니라 소중한 것만 꼭꼭 챙겨 갈무리해둔 채 자신이 겪었던 슬픔과 상실을 ‘극복’하고 새 출발을 해내느냐 준비에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그 절실함을 영화는 흔해빠진 소형냉장고에 송두리째 봉인해둔다.

지저분해 뵈는 냉장고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스티커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관객은 그것이 ‘Paul’과 ‘Nina’ 이름이란 걸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와 상징이 담긴 걸까?

철민은 이 방에서 영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둘은 같은 지방대 미술 전공으로 만나 불안정한 미래를 서로 의지하면서 나누던 사이다. 영지는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을 아느냐 철민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대마왕이 폴의 여자 친구 니나를 이 세계로 납치해가자 제한시간 동안 폴이 동료들과 다른 차원에 뛰어들어 니나를 구하려다 거듭 실패하는 이야기다. (폴의 주 무장은 요요다. 과거 국내 요요 붐에 일조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중고, 폴’의 한 장면

사실 만화영화에서 후반에 폴은 니나를 구출한다. 그리고 대마왕을 물리치고 이차원 세계를 해방하기 위해 계속 싸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니나가 구출된 이후는 기억하지 못한다. 신기할 정도로 구출 후부터 재미가 뚝 끊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상한 나라의 폴’을 기억하는 이들 역시 대부분 폴의 고군분투와 찰나의 한계로 번번이 놓치는 니나를 떠올릴 테다. 이 만화영화의 정수는 오르페우스 신화와 잇닿아 있다.

철민은 영지와 비극적인 이별을 겪었을 테다. 해당 사연은 구체적 설명 없이 분위기상으로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폴과 니나가 누구를 뜻하는지, 그리고 왜 냉장고에 그 이름이 붙어 있고 왜 철민은 냉장고를 쉽게 처리하지 못하는지도.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 공간들을 배경으로 삼지만 아주 조금의 판타지 장치를 심어둔다. 냉장고 문을 열면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영지가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은 기분. 그 느낌이 남아있는 한 철민은 이 원룸에서 이사하는 걸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런 망상이 부질없는 걸 알지만 슬픔을 잊는 데에는 본래 시간이 좀 필요한 법이다. 사실 처음엔 월세 타박하는 것 같은 주인집 아주머니의 권유, 그리고 철민 주변의 유일한 친구인 형우 선배가 해주는 조언은 딱히 틀린 말 하나 없는 셈이다. 철민도 그게 옳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 화면 속 한나절의 방황 끝에 철민은 원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깨닫는다. 마침내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닥쳐왔음을. 그리고 냉장고와 그 속에 자신이 남겨둔 영지와의 소중한 순간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 또한 이제 철민은 받아들여야 한다. 제일 작은 사이즈 트럭 화물칸에 들어가는 몇 년간의 흔적과 함께 그저 하루에도 몇 차례 우리 곁을 스쳐지나갈 이삿짐이 남겨두고 간 어떤 것.

3_지역에 단단히 뿌리내린 제작자들의 이야기

실제 감독과 PD의 사연이 <중고, 폴>에는 적지 않게 녹아들어 있다. (둘은 이제 부부가 되었다) 지방대 출신, 미술이라는 비생산적 전공을 가진 커플이 실제로 겪었던 자전적 경험담과 판타지 연출이 조화를 이룬 스타일은 이후 제작자들의 작업에서도 중심축으로 변함없이 작동 중이다.

▲영화 ‘중고, 폴’의 한 장면

<중고, 폴>은 지역의 낙후한 현실이나 2030세대의 취업절벽을 핵심 주제로 삼은 작품은 아니지만, 지방에서 ‘버티는’ 2030세대라면 낯설지 않을 풍경들로 가득하다. 아무것도 보장될 수 없는 불투명한 조건들, 주어지는 기회라고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반복적인 것들 위주인 답답한 배경들은 사람을 정체시키기 딱 좋은 구조다. 영화 속 철민 또한 그런 분위기에 개인적 슬픔이 더해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청춘의 한 군상일 테다.

제작진의 실제 경험을 통해 선정되었을, 그들에게 너무나 익숙할 공간과 장치들이 <중고, 폴>에선 전폭적으로 활용된다. 남구 대명동 일대의 풍경과 금호강 천변, 벽화거리의 배경은 제작자들이 다년간 생활하고 일하던 것들일 테다. 그런 친숙한 분위기 속에서 영화는 아련한 봄날의 동화로 탄생했고, 현재까지 두 감독 협업의 정수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 경북 의성으로 이주한 이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뚝 잘라내 화면에 담으려는 도전을 계속 이어가는 중이다. 그 작업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로 소개할 기회를 마련할 예정이다.

<작품정보>
중고, 폴 Secondhand, Paul
2015|한국|드라마|18분
감독/각본 김은영
PD/미술 황영
출연 오동민(철민 역), 원진아(영지 역), 박건아(형우 역)
2016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