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직 덕준이 친구들이 있다”, 쿠팡이 마지막 일터 된 아들의 이야기

<마지막 일터, 쿠팡을 해지합니다> 출간
아들의 죽음 이후···남은 아들 동료들을 위해
대구에 국내 최대 규모 물류센터 준공
“환영할 일 아냐···노동환경 먼저 개선 돼야”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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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야간노동을 한 아들은 2020년 10월 11일에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새벽 6시 귀가했다. 동생에게 주려고 사 온 웨하스를 두고 까치발을 든 채 욕실로 걸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아들이 자는가 싶어 문을 두드렸다가, 이내 남편을 불러 안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가슴을 움켜쥐고 욕조에 엎드려 있었다. 곧바로 119 구급대를 불렀지만 아들은 병원에 도착하고 한 시간쯤 지나 사망선고를 받았다.

아들이 죽은 날 아침을 써 내려간 어머니의 심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그날 아침에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져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쿠팡에서 근무하다 과로사로 숨진 노동자 故 장덕준(당시 27세) 씨의 어머니 박미숙 씨의 글로 시작하는 책 <마지막 일터, 쿠팡을 해지합니다>가 출간됐다.

책에는 기록노동자 희정이 ‘장덕준·박미숙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이승훈 민중의소리 기자,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 이희종‧정하나 한국서비스산업노동노동조합연맹 정책실이 ‘쿠팡의 퇴행적 혁신’을 다각도로 분석한 내용이 담겼다.

▲부부가 운영하는 경북 경산의 목공소에서 故 장덕준 씨 어머니 박미숙 씨, 아버지 장광 씨를 만났다.

24일 비가 오는 오전, 출간된 책을 들고 경북 경산의 목공소에서 박미숙 씨를 만났다. 박 씨는 “슬픔을 표현하면 읽는 사람이 그것에만 집중할까봐 최대한 덤덤하게 썼다. 중요한 건 덕준이 동료들이 아직 쿠팡에서 일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 7월쯤, 쿠팡에서 연락을 단절한 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열악한 쿠팡 근무환경과 연속된 야간노동의 위험성 그리고 덕준이가 죽은 이유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박 씨는 기록노동자, 기자, 연구자, 노동조합과 함께 책을 쓰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에는 2020년 초부터 2022년 초까지 쿠팡에서 일하다 죽은 10명의 이름이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장에는 박미숙 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들의 죽음 이후···남은 아들 동료들을 위해

“그날 아침을 복기하는 게 사실 힘들었어요. 아직 우리 가족은 일상을 영위하는 게 힘들거든요. 아이 아빠는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야 겨우 잠이 들어요. 취업준비생과 사춘기인 덕준이 동생 둘에게는 저희가 언론에 나오고 서울 집회에 가는 게 상처가 됐더라고요. 남은 가족을 생각하면 ‘여기서 멈춰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덕준이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어요. 덕준이 이후에도 사람이 계속 죽고 있잖아요. 유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요”

‘아들이 없는 삶은 너무 고통스럽다’고 박미숙 씨는 썼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 이게 우리 밥줄이에요. 아들 동료의 이야기가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판다. 문제가 많다는 걸 알지만 참으며 일할 수밖에 없다는 절실함이 느껴진다’고도 썼다. 박 씨는 아들의 죽음 이후 쿠팡에서 일하는 아들 동료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고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싸웠다.

덕준 씨의 어머니 박미숙 씨와 아버지 장광 씨,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쿠팡이 야간노동을 최소화하고 충분한 휴식시간과 공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일용직 중심의 고용 구조를 정규직으로 변화하고 이를 정부가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故 장덕준 산재사망 1주기···어머니 박미숙 씨 “쿠팡엔 아직 덕준이 동료들이 있잖아요”(‘21.10.12.))

덕준 씨는 사망 4개월 뒤 산재 인정을 받았다. 사망원인은 급성심근경색, 과로사였다. 쿠팡은 자료 제출에 협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국회의원 앞에 무릎을 꿇고 받은 근무 기록을 어머니가 한 자 한 자 타자로 쳐서 국정감사에 제출했다. 박 씨는 아들이 아무래도 너무 많이 걷는 것 같다고, 만보기를 차고 일을 간 날을 떠올렸다. 돌아와 만보기 액정에 찍힌 숫자를 보여줬는데 5만 보가 찍혀 있었다.

“지금껏 쿠팡과 두 번 만나고 세 번 통화했어요. 쿠팡과 연결되는 건 국정감사가 열리거나 전국 순회 투쟁을 하는 등 이슈가 있을 때뿐이었어요.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덕준이가 죽은 시점이 국정감사가 진행되던 때였어요. 택배 노동자 문제가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고용노동부에서 특별 근로감독을 실시한다는 기사가 뜰 때였고, 그 덕에 산재 인정받는 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 후 쿠팡 측에서 합의하자고 연락이 왔는데, 아무것도 얘기된 것 없이 끝났죠. 그때가 쿠팡이 상장을 한 시기예요”

대구에 국내 최대 규모 물류센터 준공
“환영할 일 아냐···노동환경 먼저 개선 돼야”

박미숙 씨는 슬픈 마음을 미루고 냉정한 얼굴을 했다. 노동이니 인권이니 민주노총이니 잘 몰랐지만 아들과 같이 쿠팡에서 일하다 죽는 사람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건 알았다. 집회에 가서 마이크를 잡고 전국순회투쟁을 했다. 언론, 라디오 인터뷰를 하고 故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씨를 만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어떻게 아들을 먼저 보낸 엄마가 저렇게 냉정하냐’, ‘생각보다 괜찮네’라고 했다. 박 씨는 슬퍼하며 운다고 해서 이 문제를 사람들이 들여다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 아프다고 말하면 주위에 사람이 오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진짜 괜찮은 건 아니었다. 어떤 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집에서 풀어놓는 슬픔에 잠길 땐 걷잡을 수 없었다. 김용균 재단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겁이 났다. 슬픔 속에 있다는 걸 잊고 있는 순간도 있는데, 다시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우릴 잘 아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는 여지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싸우기 위해 공부를 했어요. 전태일 평전을 읽었는데, 그 당시의 야간노동이 지금 쿠팡의 야간노동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거예요. 쿠팡은 아이 키우는 엄마의 부업으로, 야간노동이 새로운 기회라고 대대적인 광고를 하는데, 실상은 일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는 구조거든요. 취업하기 어려운 청년들, 일자리 없는 주부들이 가서 쉬지도 못하고 여름에 에어컨 없는 창고에서 일하는 거예요”

▲쿠팡은 올해 3월 대구에 국내 최대 규모 물류센터를 준공하겠다고 발표했다. 박미숙 씨는 “환영하는 기사들을 보고 많이 답답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먼저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쿠팡은 올해 3월 대구에 국내 최대 규모 물류센터를 준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지자체와 언론은 쿠팡이 대구 지역에 2,500개 이상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거라며 축하를 쏟아냈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 간 고용 형태, 열악한 근무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곳은 없었다.

“기사를 보고 많이 답답했어요. 쿠팡 일자리가 열악한 건 이제 알려질 만큼 알려졌잖아요. 거기에 갈 수밖에 없는 이들의 현실을 말해야 해요. 대구는 특히 청년 일자리가 부족하잖아요. 공무원 시험 같이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나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여성, 중장년층이 일하러 갈 텐데 이게 마냥 축하할 일인가요. 점심시간 40분을 제외하면 쉬지도 못하고 무거운 짐을 옮기고 무기계약직 전환 직전에 계약 해지를 통보 받는 현실부터 바꿔야 해요”

누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박미숙 씨는 “내 또래들”이라고 답했다. 덕준 씨 이후 올해 2월까지 쿠팡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 6명은 모두 40대~50대로 박 씨의 또래들이다.

“덕준이가 죽기 전에는 쿠팡이 정말 혁신기업인 줄 알았어요. 젊은 친구들이 힘든 일을 안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더라고요. 우리 자식, 청년들이 그 구조에 몰리는 현실을 우리 세대, 기득권층, 그리고 정치권이 알아야 해요.

덤덤하게 쓴 책을 앞에 두고 쿠팡의 노동환경을 거침없이 얘기하는 박 씨의 눈가가 내내 붉었다. 인터뷰가 끝나니 빗줄기가 거세져 있었다. 줄곧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킨 아버지 장광 씨가 검고 단단한 우산을 건넸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