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퀴어053’, 계란으로 바위치기 14번째 축제를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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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출발부터 난항을 겪은 영상화 작업과 돌파구

2009년부터 시작된 대구퀴어문화축제가 2022년 연내 14회 개최를 예정하고 9월 중에 연속 강연을 시작으로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2000년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출범한 이후 전국에서 두 번째로 시작된 유서 깊은 지역행사다. 무엇보다 ‘대구에서도 해내는데!’라는 경탄과 함께 타지역에서도 같은 행사가 조직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대구퀴어문화축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처럼, 두 자릿수의 무게감은 별것 아닌 듯해도 그 반향이 결코 적지 않다.

2018년 당시 10주년을 맞이하게 된 대구퀴어문화축제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그 결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문칠 감독이 낙점되었다. 이제 자료를 싹싹 긁어모아 잘 정리하고 구성하는 일만 남은 듯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지역의 작은 퀴어 페스티벌이 걸어온 10년이란 세월은 온전히 기록되어있지 못했다. 늘 행사를 치르기에 바빴고 소수의 활동가들은 전업은 고사하고 당장 자기 생계는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서 누가 책임지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분류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에 불과했던 게 지역 현실이었다. 감독은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기,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난제에 시작부터 봉착하고 만 것이다.

감독은 이런 난감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초창기의 부족한 영상 자료 대신 그나마 조금 더 구할 수 있었을 사진 자료를 수배하고 그 당시의 기운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도록 초창기 주체들과의 인터뷰를 마련한다. 물론 이 정도라면 안정된 자료를 공급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누구나 떠올릴 방법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여러 편의 극장 개봉 장편 다큐멘터리 작업경력이 있는 중견 감독의 발상은 흔하게 떠올릴 법한 예상치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사진=’퀴어053′, 박문칠 감독]

2_<퀴어053>이 선보인 형식파괴와 변주

영화는 단편으로는 길고 장편이 되기엔 모자란, 40분 동안 대구퀴어문화축제 10년의 기원과 배경, 주요 전환점의 내용, 그리고 현 단계에서의 결산과 전망을 꽉꽉 채워 넣는다. 초반부의 마치 문자기록이 몇 안 남은 선사시대 역사를 재현해 내는 듯 부분들은 인터뷰와 사진 슬라이드의 밋밋함을 보완하기 위해 각별히 예를 썼다. 흔히 퀴어 페스티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화면 전체에 구현해버린 것이다.

타이포그래피 형태로 디자인된 주요 말머리들은 레인보우를 구성하는 원색들로 강렬한 색감과 함께 길거리 그라피티를 보는 느낌으로 관객의 시선으로 달려든다. 여기에 끊어지지 않는 리듬과 비트가 단조로울 수 있는 인터뷰 내내 둠칫 둠칫 심장박동 소리마냥 배경음향으로 기능한다. 그렇게 공들인 구성을 통해 기록의 부재로 인한 구전의 자리는 지루한 훈고학 시간이 아닌 상상력을 발휘하는 옛날 전설을 체현하는 순간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그런 세심한 장치의 지원 속에서 대구퀴어문화축제 태동의 주역들이 10년 전의 기억을 차례로 끄집어낸다. 그런데 다들 즐거운 표정으로 회상에 잠겨 과거사를 들려주건만 화면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있는 별도의 자막해설이 전혀 붙어있지 않다. 그 결과 사전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면 도저히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길이 없다. 대충 눈대중 짐작으로 넘겨짚을 수 있을 뿐이다. 파격적인 시도다.

대신에 인터뷰 대상이 누구인지 파악해 재단해버리는 선입견은 사라지고 온전하게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된다. 어차피 변방의 활동가들이 대부분일 텐데 이 영화를 볼 수도권 내지 타지역 관객들에게 생소한 건 마찬가지일 테고, 대표자 혹은 전문가 권위를 전제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참가하는 퀴어 페스티벌 정신에 오히려 잘 부합되는 파생효과도 느껴진다. 작디작은 변주만으로 전형적인 구성 틀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총체적인 주제의식 구현으로까지 연결되는 배치가 아닐 수 없다.

▲[사진=’퀴어053′, 박문칠 감독]

3_대구퀴어문화축제의 태동기

형식면에서의 참신성은 두루두루 짚어봤으니 다시 영화가 담아낸 10년의 역사로 회귀해보자. 활동가들은 2009년 1회 대구퀴어문화축제의 아련한 기억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유에서 뒷감당 생각 없이 저지르게 되었는지, 어떤 배경과 준비를 거쳤는지, 실제 참석단위와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하나둘 드러나는 기억들은 치밀한 작전계획보다는 당위와 객기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어 구르는 돌처럼 하나의 물결이 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현재까지 집행위원장의 중임을 맡은 ‘배진교’라는 활동가의 이름이 인터뷰 대상자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호명된다.

그의 저지르고 보자는 패기가 추진력이 된 것은 물론이지만 아직은 커밍아웃을 망설이던 당시 지역의 성소수자 당사자들 대신에 대오를 갖춰준 지역의 진보정당과 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조력과 비수도권 중에서도 가장 뒤늦게 언젠가는 생길지도 모른다고 예정하고 있었을 대구가 대책 없이 추진하는 걸 보고 달려온 서울 퀴어 문화축제 관계자들의 협력이 결정적인 기반이 되어주었다. 특히 초창기 대구 퀴어 페스티벌의 조직화가 당사자가 아닌 지역 사회운동 역량의 뒷받침을 통해 이뤄진 측면은 비좁은 지역 판에서 서로 도우며 활동해야 하는 열악한 조건을 전향적으로 활용한 선례일 테다. 그렇게 2009년의 신화를 넘어 몇 해간 대구퀴어문화축제는 소소하지만 서서히 지반을 다져가게 된다.

아직은 ‘퀴어’라는 용어 자체가 대중적으로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라 초반의 대구퀴어문화축제는 대중들에게 그 본색(?)이 드러나지 않는 바람에 무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고 사회적 인식이 넓어지는 흐름이 반영되는 1차 분기점이 일어난다. 2012년 4회 당시 시도된 동성 결혼식 이벤트다. 물론 대구라는 동네에서 커밍아웃을 감행하기란 보통 일이 아닌지라 실제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선 이들은 취지에 공감한 지역 활동가들이긴 했지만, 서서히 지역사회는 대구퀴어문화축제의 실체를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성소수자들의 수면 위 부상과 이에 따라붙는 혐오세력의 준동으로 인한 세 대결이 2차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4_끝나지 않는 혐오세력과의 대결, 그리고 성과

2014년 6회부터 2015년 7회에 이르는 기간, 서울과 대구퀴어문화축제는 양 세력의 결전장이 되어버린다. 영화는 전국적인 상황을 취재하진 않았음에도 대구 지역 상황만으로도 전국 의제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아직 퀴어 문화축제가 정식으로 열리던 지역이 서울과 대구 두 곳뿐이었기에 양쪽 다 집중했기 때문이다. 화면 가득 눈살 찌푸려지는 근본주의 개신교 신자와 극우집단의 난행이 펼쳐지고 퀴어 문화축제 참가자들의 당시 경험담이 회고된다. 총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쐈을 거라며 충격을 받은 당사자 증언처럼 상대방과 토론 같은 건 고려치 않는 일방주의가 난무하던 아수라장을 지나 혐오세력과의 장구한 대결은 매년 이어지는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여전히 차별과 혐오를 자행하는 이들의 반동이 만만찮지만 2018년에 10회를 맞이한 자신감과 함께 영화 속 인터뷰에 응한 당사자와 활동가들은 지난 10년의 성과와 변화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일단 초반에는 당사자들이 정작 행진 안이 아니라 밖에서 구경꾼처럼 몰래 따라다니고 대열에는 연대활동가들로 채워지던 게, 서서히 눈을 가리는 가면을 쓴 채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오고 이제는 적어도 축제의 현장에선 당당하게 나서게 되었다는 자랑스러운 기억들과 함께 어느새 퀴어 문화축제의 상징이 된 드래그 퀸/킹 출현과 댄스공연의 대두,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지지까지, 전부 들어보니 그간의 성과가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7-8회 즈음부터 지역 주요 대학별로 성소수자 동아리 모임이 생겨나 거점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영남대학교 ‘유니크’와 대구대학교 ‘퀘스트’, 계명대학교 ‘계네들’ 같은 모임은 이제 매년 축제에 빠질 수 없는 후속세대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물론 홀로 고립되기 쉬운 당사자들의 거점으로 몫을 톡톡히 해낼 정도로 성장하는 중이다. 고무적인 일은 더 있다. 대구퀴어문화축제의 10주년을 전후해 부산과 제주, 인천, 전주, 광주 등으로 지역별 퀴어 문화축제가 여전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확장되는 도상에 있기도 하다.

5_10년의 가치와 전망이 오롯이 담기다

▲[사진=’퀴어053′, 박문칠 감독]

그런 보람과 성취에 뿌듯해하는 이들에게 감독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대구퀴어문화축제란?” 각자의 대답은 무지개 빛깔처럼 다채롭다. 누군가에겐 ‘업보’, 또 누군가에겐 ‘지켜나가야 할 행사’, 누군가에겐 ‘스승’, 다른 누군가에겐 ‘뒷배’가 되어주는 존재라고 한다. 배진교 집행위원장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고 말한다. 뒤를 이어 신세대 활동가들의 답변이 이어진다. ‘음란’할 때까지 가보자는 소망, ‘함께’ 계속 가자는 바램, ‘터닝 포인트’가 되어줬다는 평가, ‘인생’ 그 자체라는 벅참, ‘집’처럼 바깥에 나가있더라도 돌아오게 된다는 존재감이 피력된다.

이제 정말로 대미를 장식할 시간이 도래한다. 인터뷰에도 참여했던 대구퀴어문화축제의 열혈 참가자, 지역 펑크밴드 ‘드링킹 소년소녀 합창단’의 10주년 헌정곡 Here We are, “We are here and everywhere”가 장렬하게 울려 퍼지며 10년의 역사 갈무리가 1단계의 종언을 우애어린 응원과 함께 전한다. 공연 실황과 함께 화면에는 유독 행진하던 대열이 화면 밖으로 스크린을 뚫고 나오려는 듯 전진하는 기운이 넘실거린다. 그렇게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로 향한다. 2019년에 완성된 영화는 여러 영화제에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고 단편영화로선 꽤 오랜 유효수명과 함께 잊히기 쉬운 지역의 소중한 유산을 갈무리해냈다.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2020년 12회는 역병으로 인한 온라인 행사로, 2021년 13회는 11월, 2년 만에 오프라인 행사로 진행되었다. 이제 14회를 기다리며 카운트다운을 조심스레 세어보기 시작할 즈음 복습 겸 <퀴어053>은 여전히 유용하기 그지없는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작품정보>

퀴어053 Queer053
2019|한국|다큐멘터리|40분
감독 박문칠
출연 양희, 구장춘, 한상훈, 배진교, 나영정,
강명진, 이종걸, 기린, 선우, 이형석,
서창호, 권혁장, 배들소, 김명진, 이소,
김영화, 정우선, 김영교, 다노

2019 대구단편영화제 애플시네마 우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