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글라스 공장 밖 9년] (4) 혼자서는 못할 일, 고공농성과 검찰청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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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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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글라스 공장 밖 9년] 해고노동자들은 어떤 일을 했나

떠난 것과 남은 것
오수일 #4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오수일 조합원이 안진석 조합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78명이 길바닥으로 내쫓긴 뒤, 공장으로 돌아가려는 투쟁이 만 7년을 넘길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합원은 22명으로 줄었다. 해고 직전, 오수일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할부로 차를 한 대 샀다. 아이를 낳고부터 장사에, 영업에 힘을 쏟느라, 아사히글라스에서는 주말 특근에 나서느라 제대로 가족여행 한 번 못 갔다는 생각에 SUV를 뽑아 가족 나들이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지금도 여전히 실행하지 못했다.

해고자가 되니 더 바빴다. 길바닥에 앉은 처지가 되니,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오수일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았다. 천막을 치고 부서지며, 다시 치고 부서지는 걸 반복하는 동안, 아사히글라스를 고발하고 소송을 제기하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해고 2년이 되도록 어떤 것도 진척은 없었고, 오수일과 해고자들은 절박해졌다. 2016년 김앤장 대항 투쟁,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도 나섰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해고자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다른 투쟁을 계획했다. 고공농성이다. 2017년 4월, 오수일은 서울 광화문 광고탑에 올라 고공농성에 돌입해, 27일 동안 탑 위에서 단식 투쟁을 벌였다.

▲2017년 4월 14일 광화문 인근 건물 광고탑에 오른 노동자들.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오수일 조합원도 포함됐다. [사진=아사히비정규직지회]

끝장을 볼 생각으로 올라온 고공농성장. 본인이 올라가겠다는 차헌호를 뜯어 말리고 올라온 농성장은 또 다른 세계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회의장에서 고공농성에 자원하고 난 뒤, 다시 생각해보니 덜컥 겁이 나긴 했다. 단식해본 적도 없긴 했지만, 고공농성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소름 끼치는 면이 있었다. 사흘 동안은 긴장감 때문에 배고픈 줄도 몰랐다. 나흘째부터는 농성장 아래 숯불고기집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오수일과 함께 농성하는 이들을 괴롭혔다. 더욱 괴로운 일은, 2017년 5월 농성장에서 보이는 광화문 광장에서 문재인 후보 연설이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이 농성장에서도 들렸다. 오수일은 지척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며 후보가 농성장을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헛된 기대였다.

오수일은 기대와 좌절을 반복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함께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콜트콜텍, 동양시멘트,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다. 기약 없는 앞날, 광화문 광장을 함께 내려다보며 오수일은 지금 비록 몸은 고되고 굶주렸다 하더라도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닮아있다면 제법 괜찮은 얼굴이리라 생각했다.

때로 흔들리는 날도 있었다. 가족들을 떠올리면 그랬다. 철탑에 올랐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농성에 들어서고 나서야 알렸다. 아내는 상경해 고공 농성장 철탑 밑까지 올라와 전화를 걸었다. 사실상 외벌이가 되어버린 아내는 고관절 상태가 악화해 수술받은 몸이었다. 가족이 벼랑 끝까지 몰린다는 심정에, 불쑥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도 떠올랐었다. 하지만 철탑 아래에서 아내는 아무런 타박도 하지 않았다. 철탑 위에서도 아내의 입 모양과 눈물이 또렷이 보였다.

“애들은 잘 있나.”
“올라가 있는 사람이 걱정이지. 잘 있다. 당신 몸이나 잘 챙겨.”

아내에게 응원받는다는 느낌이 들자,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수일 #5 안진석 #3

투쟁이 해를 두 번 넘기고 나서부터, 해고자들은 자신과도 싸워야 했다. 기약 없이 흐르는 시간이 해고자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해고 직후 하라노 다케시 당시 아사히글라스 대표이사 등 관계자들을 불법파견 혐의로 고소했는데, 검찰은 오래 시간을 끌다가 2017년 12월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기소했다. 담당 검사는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국외 훈련을 받은 김도형 검사(사법연수원 39기)였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해고 초기, 억울한 심정으로 공장을 찾는 해고자들에게 경찰과 구미시가 보인 얼굴이 회사의 얼굴과 닮아있었고 해고자 편은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청이 2년 넘는 기간 수사 끝에 관리자들의 불법파견 혐의가 있다며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기 때문에, 약간의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의아했다.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할 거면 왜 3년 가까운 시간을 끌었을까. 오수일은 실망감을 느꼈지만, 절망감은 아니었다.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내몰려도 버텨내는 일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해고자들은 대구고등검찰에 항고했다. 대구고검은 4개월여 뒤 재기수사명령을 내렸지만, 결과는 빨리 나오지 않았다. 2018년 1월, 해고자들은 대구지검 앞 인도 위에 천막농성장을 만들었다. 불법파견 사건은 급기야 대검찰청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안건으로도 올랐지만, 검찰은 도무지 기소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18년 12월 27일 오후 1시께,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 11명은 대구지방검찰청 1층 로비에 모여 박 지검장 면담을 요청하며 연좌하고 있다.

2018년 12월, 대구지검이 미적대며 수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을 때, 해고자들은 대구지검 1층 로비를 찾았다. 대구지검 로비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해고자 11명은 이날 박윤해 대구지검장 면담을 요구하며 로비에 주저앉았다. 수사기관 점거 농성은 구속과 처벌도 감수해야 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해고자들은 그만큼 절박했다.

안진석은 이날 ‘아사히글라스 기소하라’라는 간명한 문구가 적힌 피켓을 손에 쥐었다.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더는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투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질 것이고, 변곡점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노조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오수일, 다른 해고자들과 함께 로비에 눌러앉았다. 즉각 경찰 기동대가 출동했고, 청사 입구는 파이프 셔터로 막혀 출입이 통제됐다. 안진석은 경찰 기동대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사히글라스 직원이 아니라고 하는, 계약 해지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려면 불법을 인정받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어려워도 가야 할 길이다. 그래도 무섭다. 무서워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 우리 투쟁의 중요한 순간이다. 나 혼자는 못한다. 불법이라고 해도 좋다. 함께 하면 감수할 수 있다.”

로비 바닥으로부터 한기가 올라왔다. 오수일은 한기를 느끼면서도, 어떤 생각에 이르자 불현듯 마음이 벅차올랐다.

“바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살다가 이곳에 몰려온 10명의 동지들이 있다. 이들과 함께 처벌도 각오하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살아오며 이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이 동지들과는 무엇을 해도 되겠다. 설령, 투쟁 끝에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후회는 하지 않을 거다.” 가슴이 뜨거웠다.

▲2018년 1월 31일 2백여 명은 금속노조가 주최한 아사히 무혐의 처분 검탈 규탄 집회에 참석 후 대구지방검찰청 앞으로 이동했다.

오후 7시 40분, 로비에 들어오지 못한 다른 해고자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항의를 뚫고 들어온 경찰이 연행을 시작했다. 쌀가마니처럼 들려가는 해고자들의 찌푸린 얼굴 사이로 언뜻 미소가 맺혔다. 물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방감. 그리고 단절이 아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이 미소가 바로 투쟁하는 동안 얻은 새로운 것이다.

2019년 2월, 수사심의위원회는 검찰에 기소를 권고했다. 같은 달 15일, 대구지검 김천지청은 불기소를 뒤집고 아사히글라스 당시 대표 하라노 다케시, 하청업체인 GTS 대표 정재윤을 파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2019년 4월, 이들을 처음으로 법정에 세웠다. 2021년 8월,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형사1단독(재판장 김선영)은 파견법 위반죄로 하라노 다케시 전 아사히글라스 대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정재윤 전 GTS 대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계속)

▲돌아가고 싶은 구미 아사히글라스 공장 입구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안진석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

[편집자 주] 올해로 9년째다. 2015년 7월 아사히글라스 하청노동자들 178명이 전원 해고됐다. 22명의 노동자들은 원청인 아사히글라스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며 9년째 공장 앞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1, 2심 법원도 아사히글라스가 해고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사히글라스가 노동자 직접 고용을 거부하면서 노동자에게 배상해야 할 임금, 이자는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약 90억 원이다. 노동자들과 아사히글라스가 서로 제기했던 민사소송은 6건이고, 파견법 위반으로 진행 중인 재판도 있다. 아사히글라스는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과 법무법인 태평양에 사건을 맡겼다. 법조계에 따르면 소송 대리 비용도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사히글라스는 노동자들의 해고 이후 정문 앞 경비 강화에도 비용을 더 투입했다.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대신 법률 대응으로 아사히글라스가 9년 동안 쓴 돈은 100억을 훌쩍 넘긴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설립, 해고를 겪으며 다방면으로 투쟁에 나섰다. 법원을 출입하는 일도 잦아졌다. 9년 동안 26건의 다양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소송비용으로만 1억 원이 넘는 돈을 썼다. 법은 도대체 누구의 편인가 질문을 수없이 했다. 30대 초반의 노동자는 40대가 됐고, 40대 중반 노동자는 50대가 됐다. 만약, 아사히글라스가 노동조합을 인정했더라면 9년째 거리에서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뉴스민>은 노동조합을 만나 삶이 바뀐 해고노동자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 노동자에게 취약한 법과 제도까지 짚어 본다.

취재=박중엽, 김보현 기자
기사=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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