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스웨덴의 국가연구위원회 제도를 배우자 / 신정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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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과 막말, 고소와 고발, ‘개딸’과 ‘태극기부대’로 대표되는 열정 지지자들의 극단적 언행, 회기 중에 정쟁으로 인해 제대로 논의되지 않다가 회기 말에 한꺼번에 통과되는 수많은 법안 등이 대한민국 국회를 둘러싼 풍경을 구성하는 대표적 요소일 것이다. 의회의 핵심 기능은 입법인데, 입법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경쟁은 발견하기 어렵다. 기후위기 극복방안, 경제적 불평등 완화방안, 저출산·고령화 대책 등은 정치권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한국 사회의 핵심 의제와 정치권의 의제는 심각하게 괴리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요인으로는 수많은 것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한과 분노의 정치에 연료를 제공하는 데 부족함 없는 자산을 가진, 험난한 한국 현대사의 유산, 대통령 단임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로 대표되는 정치제도의 문제점, 유유상종과 확증편향을 강화하여 정치적 입장의 양극화를 촉진하는 소통매체의 발전 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디서부터 문제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인가? 국회가 본연의 역할, 즉 좋은 입법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는 방안의 하나로 스웨덴의 ‘국가연구위원회’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스웨덴에서는 통상 ‘특별연구위원회(särskilda utredning)’라 부르는데, 그 성격이 잘 드러나도록 이 글에서는 ‘국가연구위원회’라 부르기로 한다).

▲국회가 본연의 역할, 즉 좋은 입법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는 방안의 하나로 스웨덴의 ‘국가연구위원회’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국가연구위원회는 스웨덴의 독특한 제도로서 국가에 의해 발족, 운영되는 정책연구조직이다. 정당의 의회 발안이나 행정부의 결정에 의해 구성된다. 국가연구위원회에는 특정 정책 의제를 둘러싸고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단체 및 주요 정당의 대표, 해당 사안에 관한 전문가가 모여 연구하고 의견을 나눈다.

참여자들이 최종적으로 합의에 도달하게 될 경우엔, 국가연구위원회는 연구내용과 합의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한다. 위원회 참여자들이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할 경우엔,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이 각기 별도로 제시된 보고서가 작성된다. 이렇게 국가연구위원회에 의해 제출된 보고서는 SOU(Statens Offentliga Utredning, 국가의 공적 연구) 시리즈로 출간된다. 매년 수백 개의 국가연구위원회가 활동해왔다.

국가연구위원회에서 다루는 문제들이 모두 정치적 성격이 두드러진 것은 아니다. 정부 정책 입안에 참고 될 수 있는, 순수 전문과학적, 행정기술적 성격의 문제도 다루며, 이럴 경우 연구위원회는 해당 분야 전문가에 의해 주도된다. 그러나 정책이라는 것은 대부분 상이한 인구집단 간에 이익과 손실의 재분배를 야기하기 마련이므로, 많은 경우 해당 문제에 대한 핵심 이해당사자 단체와 주요 정당의 대표가 국가연구위원회에 참여한다.

이렇게 주요 정치적 행위자들이 주요 참여자가 될 경우엔, 국가연구위원회는 단순히 연구기능을 수행한다기보다는 정치적 행위자의 상이한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정치적 제도로서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따라서 국가연구위원회가 정부에 제출하는 최종보고서는, 이해당사자 단체 등의 상이한 이해관계가 조정, 타협된 내용을 담게 된다.

이렇듯 국가연구위원회의 최종보고서는 이미 핵심 이해당사자 단체와 정당의 상이한 입장이 조정, 타협된 내용을 담게 되므로, 정부는 정책 입안에 있어 국가연구위원회 보고서에 크게 의지해 왔다. 또 스웨덴은 대학교수 등 전문 지식인이 정부의 정책 입안과정에 깊이 참여하는 편인데, 이들 전문 지식인의 핵심적인 참여 통로가 바로 국가연구위원회다.

국가연구위원회의 최종보고서가 나오면 정부가 이 보고서를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주요 유관단체, 전문가에게 회람시키고 보고서 내용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는데, 이를 심의제도(remiss system)라 한다. 심의절차가 종료되면 정부는 국가연구위원회 보고서 내용과 심의과정에서 나온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 정부 입법안(proposition)을 작성하고 이를 의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제출한다.

국가연구위원회 제도의 장점은 많다. 충분한 지식과 논의를 바탕으로 정책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모범사례라 할 만하다. 그리고 사안에 관해 상이한 이해관계와 견해를 가진 단체와 정당이 참여하므로, 다양한 입장의 표출, 조정, 합의라는 민주적 의사결정절차의 핵심 요소가 잘 구현된다.

또한 참여자의 최종 입장이 최종보고서에 실리고 이 보고서가 만인에게 공개되고 보존되므로 정당이나 이해당사자 단체가 책임감을 갖고 논의에 참여하게 된다. 주요 정당 대표들이 위원회에 참여하므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정책 연속성이 상당히 강하게 유지된다. 해당 사안에 관한 전문 지식인도 위원회에 참여하기 때문에 스웨덴 사회의 최고 수준의 지식이 결집되어 정책이 만들어진다.

한국의 경우 정치제도와 정치문화가 스웨덴과 크게 달라 스웨덴 국가연구위원회와 같은 제도를 바로 본격적으로 도입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몇몇 주요 사안에 관해 시범적으로 이런 제도를 운영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기후위기 대책이나 저출산·고령화 대책 등 정쟁의 요소는 작고 학습과 연구의 필요성은 큰 의제와 관련하여 중장기 정책방향을 논의하는 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무엇보다 이 위원회에 주요 정당의 국회의원이 참여하여 논의하도록 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그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위원회를 여럿 구성하여 많은 국회의원이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여 한국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무거운 의제들과 씨름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정치인이 고성과 막말, 고소와 고발, SNS에서의 자극적 글쓰기 전문가로 살아가며 정치생명을 계속 유지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신정완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