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채명신 장군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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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가장 많은 전투에 참전한 군인이다. 가장 많이 무공훈장(28개)을 받은 군인이다. 6·25전쟁 당시 특수부대인 백골병단을 이끌며 북한군의 유격대장 길원팔을 포로로 잡는 등 게릴라전의 최고 명장이다. 국군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파병한 월남(베트남)전에 초대 주월사령관을 4년여 동안 역임했다. 휴전이후 북한군의 도발이 가장 많았던 68년부터 3년 동안 한강 이남을 책임지는 2군사령관(현 2작전사령관)을 역임했다.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용사묘역에 안장된 최초의 장군이다.

▲1969년 환송식에서 채명신 장군 [사진=국가기록원]

이 분은 10년 전 11월 25일 87세로 세상을 떠나신 명장 채명신 장군이다. 싸우면 이기는 장군의 무용담은 차고 넘친다. 현재 육군본부와 2작전사령부는 회의실을 장군의 이름으로 명명하고 업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우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는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다.

필자는 장군을 세 번이나 뵈면서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진면목을 보고 느꼈다. 처음 뵌 때는 2004년 이라크 파병사단에서 장군을 초빙강사로 모시는 실무자로서 오고가는 승용차 안에서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비결은 무엇인지요?”라고 묻자, 뜻밖에 “골육지정의 전우애가 승리의 원동력이다”고 하면서 “자신을 지켜주는 전우를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인의 전우애는 일반인에게 이웃사랑이다. 필자는 현재 말로만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에 깊이 반성한다.

두 번째 뵌 때는 2006년 6.25전쟁 지평리(양평군) 전투 승전 기념식에서였다. 자이툰 사단 장병들에게 군인정신의 혼을 불어 넣을 때처럼, 고령(80세)에도 불구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말과 영어로 동시에 기념사를 했다. 행사가 종료되자 바로 떠나시기에 달려가서 인사드렸다. 단번에 알아 봐 주시고 “서울 오면 연락해라. 만나자”라고 격려해 주었다. 바쁘시지도 않는데 행사 진행요원들을 배려하기 위해 황급히 떠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세 번째 만남은 안타깝게도 10년 전 장례식장에서였다. 장군에 대한 존경심과 더 뵙지 못한 아쉬움에 언론안내를 자원하여 영결식에 이어 안장식까지 자리를 지켰다. 때문에 조문 온 전우들이 들려 준 일화가 기억난다. “6·25전쟁 직전 38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잦았다. 개성에 주둔한 1사단 채명신 중대장(대위)는 중대원과 함께 북한군의 도발을 현장에서 격퇴했다. 이 전공으로 상급부대에서 중대장을 영전시키려 하자, 대원들은 중대장을 붙잡고 함께 싸우겠다고 간청했다. 이에 상급부대는 중대원을 포함 특별중대를 창설해 채 대위를 다시 임명했다”는 가슴 뭉클한 내용이다.

채명신 장군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 흘렀다.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살아선 조국을 지키고 죽어선 전우를 지키고 있는 군인’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찬란하게 빛나는 전공보다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월남전 전우들이 있는 용사묘역에 안장하게 해 달라”는 그의 유언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어느 조직이든 구성원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매진하면 끝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손자병법, 上下同欲者勝). 이는 채명신 장군이 수많은 사선을 넘으면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채명신 장군을 추모하면서 결심한다. 이제 실천해야겠다. 골육지정의 전우애를 삶에 적용하여 함께하는 동료와 이웃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도록 더 마음을 열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