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견 시간은 10분, 동료시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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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도소 12번 접견실. 투명 강화유리와 창살 너머로 한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올리브색 미결수 수용복을 입은 그의 어깨가 둥그렇게 말려 있다. 그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특수공무집행방해, 특수공용물건손상죄로 징역 3년 실형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갇힌, 김민수(가명, 42)다.

김민수는 지난해 12월 법원에서 실형 선고를 받은 후 창살과 강화유리를 사이에 두고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마주했다. 그때 김민수는 낙심한 마음에 낯선 이들 앞에서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두 달 후 다시 만난 김민수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모습을 보였다. 창살 너머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스피커폰으로 흘러나왔다.

지난해 8월 그는 통근 버스를 운행하던 중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을 시작한 출입국관리사무소 공무원 다수를 다치게 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날 오전 그는 대구 한 공단에서 이주노동자 통근 버스를 운행하다가 갑자기 출입국 공무원들이 단속을 시작하자, 지시에 불응하고 운전을 계속하다 공무원 11명에게 전치 2~3주의 부상을 입혔다.

버스 주위 3면을 출입국 차량이 가로막은 상황, 김민수는 차를 후진해 후면을 가로막은 차량을 밀어냈고 좌측 전방으로 운행해 또 다른 차량을 박은 후 도주했다. 단속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었던 거리는 단 150m. 김민수도, 안에 타고 있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도 모두 붙잡혔다.

그는 45인승 버스를 끌고, 안에 탄 30여 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함께 어디로 가려고 했을까. 피신할 길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보다 그는 왜 막다른 길을 향해 성큼 들어선 것일까.

접견 시간은 10분. 김민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민수 씨 면회를 위해 대구교도소를 찾은 사람들

공장 관리자가 본 김민수
“어떤 양심적인 부분이 발동한 게 아닌가 합니다”

“그 공장에서 20년 정도 일했죠. CMC/MCT를 운행 하면서, 일은 주간만 했고 추가로 출퇴근 버스 운행을 제가 맡아서 했어요. 돈 한푼이 아쉬운 상황이었거든요. 버스 운행을 준비하려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어요. 퇴근하고 집에 오면 9시 반이었어요.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김민수)

대구 한 공단 길목, 목재 팔레트, 폐스티로폼이 널브러져 있다. 가로 정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제조업, 섬유공장, 식품업체가 난전처럼 펼쳐진 이곳에 김민수가 잡혀가기 전까지 출퇴근하던 자동차 부품공장이 있다. 공단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이주노동자다. 열악한 환경에 장시간 근무를 해야 하는 영세한 업체가 많기 때문에 이를 감내할 수 있는 이들이 모여든다.

조립식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공장 3개동에선 조업이 한창이지만, 어딘가 어수선하다. 이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하던 김민수가 구속된 지난 8월부터 공장 또한 위기를 겪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민수는 이 공장의 설립 초기부터 함께한 중심 인물이어서, 맡은 역할이 많았기 때문이다.

관리자 A 씨는 눈살을 찌푸리며 책상에 펼쳐진 서류를 보고 있다. 기자 방문에 경계심을 보이다가도, 김민수 이야기가 나오자 답답한 심정을 숨기지 못한다.

“김민수,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근처 주물공장에서 일하던 친구예요. 그 친구가 참 성실하고 예의 바르기로 소문이 나서, 우리가 스카우트 했어요. 같이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 친구를 키워주고 싶었죠. 얼마 전까지도 맡긴 일이 많았어요. 일도 하면서, 공장 관리도 했거든요. 수출하는 공장이다 보니 납품 영업도 했고. 우리 부품이 제작에 기술이 필요한데 그것도 잘 했어요.”

김민수는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어울리는 이주노동자들을 보살피려 했다고 한다. 그는 고향에 가지 못하는 처지에 가족 생각이 날 법한 명절이 되면, 약소한 것이나마 손에 쥐어주려 했다. 이주노동자와 일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려 했다.

“내가 교도소에 면회 가서 물어봤어요. ‘어쩌다 그렇게 됐노?’ 그러니까 그러더라고. ‘나도 모르겠습니다’래요. 듣고 보니 납득이 돼요. 그 친구 심성이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거예요. 그 순간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막 울부짖었다고 해요. 차 근처에 뭐가 있어서 움직이면 충돌할 거라고 생각은 못 했을 거예요. 그냥 사람들이 울부짖으니까. 순간적으로, 그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어떤 양심적인 부분이 발동이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김민수가 일했던 대구 한 공단

동생 김민주에게 김민수는 오빠이자 아빠였다
“이주노동자와 처지가 같잖아요. 연민이었을 거예요”

“19살 때부터 대구 공단에서 쭉 있었어요. 어머니가 먼저 일하러 대구로 넘어왔고, 저는 좀 이따가 학교 그만두고 여기로 넘어왔어요. 여기서 아내 만나서 애 둘 낳고 살았죠. 아파트를 샀는데, 아직 대출금도 다 못 갚았어요. 그래서 버스 운행도 한 거죠.”(김민수)

김민주(가명, 39)에게 김민수는 가족이자, 친구이자, 때로는 보호자였다. 아버지는 김민수 나이 6살,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가정을 꾸리기 위해 식당에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을 누리고, 남들과 같은 가정에서 제 나이에 맞는 투정도 부리고, 학교도 다니고 싶었을 민수에게 일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보살핌이 필요한 동생을 살펴야 했다. 동생 졸업식, 입학식에도 어머니 대신 무뚝뚝한 김민수가 참석했다.

어머니는 식당을 나와 대구 한 공장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동생 학원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살림은 나아졌다. 동생은 여상에 가려 했고, 컴퓨터 자격증이 필요했다. 김민수는 그 시기를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짧은 행복은 IMF가 찾아오면서 끝났다. 어머니는 체불임금을 받지 못하고 직장을 잃었다. 김민수는 학교에서 자퇴했다. 피자, 신문 배달에 나섰지만, 어린 나이에 급여를 떼어먹히기 일쑤였다. 지역을 옮겨 공사 현장에 들어갔다. 좀더 일정한 일터가 필요했던 김민수는 공장 일자리를 찾아 어머니가 일하던 대구로 이주했다.

가족과 공유한 시간이 얼마 없어서인지, 김민수는 가족을 곰살맞게 대하지 못했고 표현도 서툴렀다. 가정을 꾸리면서, 동생에게 연락도 생존 확인 수준으로 가끔 했다. 김민주는 김민수로부터 4개월 동안 연락을 받지 못했다. 해가 바뀌는 시점에서는 문제가 생겼다고 짐작하게 됐다. 올케언니인 이미정(가명, 46)은 처음에는 출장 갔다고만 했는데, 해가 바뀌고서야 뒤늦게 일렀다. “대한민국에 전화 안 되는 곳이면 어디 있겠어.”

구속 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1심 결과 실형이 선고되리라곤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12월 실형 선고 이후 가족에게도 알릴 수밖에 없었다.

김민주는 징역형 소식을 들으면서도 오빠가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생각할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본 김민수는 남을 해하는 사람이 아닌, 도우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을 듣다 보니 오빠의 행동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오빠가 살아온 걸 생각해 보면 이주노동자에게 연민을 가지는 게 당연한 거 같아요. 고향 떠나서 객지에서 일만 하는 그 처지가 이주노동자잖아요. 저와도 떨어져 있고.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처지고.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마음을 쓰는 게 당연한 거 같아요.”

연락을 받지 못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김민주는 아직 교도소를 찾지 않았다. 감옥 안에 있는 민수의 얼굴을 볼 결심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 오면 찾아가 볼 생각이지만, 아직은 준비 되지 않았다.

“오빠는 당연히 죄를 지었어요. 죄인이냐 아니냐를 떠나, 저는 인간 김민수라면 그렇게 행동했을 법하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가족으로서는 마음이 여러 갈래예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족 입장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죗값을 치르지 않았나. 죄는 입증됐고 어느 정도 수형생활도 했으니, 2심에서는 집행유예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도 들어요.”

공장에서 만난 남편···남편이 진 생활의 무게
“아이들은 아빠의 의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들과 오래 함께 일했습니다. 나랑 같은 사람들이잖아요. 저랑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봅니다.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는 마음이었습니다.”(김민수)

이미정(가명, 46)은 김민수가 일하던 공장에서 일하다 가까워졌고, 결혼했다. 가까워지기 전부터도 이미정은 김민수를 성실한 사람으로 봤다. 결근도 하지 않고, 일을 가리지 않고 나서서 처리했다. 김민수의 집안 사정과 살아온 길을 듣고 보니 그가 매사에 왜 치열했는지 이해가 되는듯했다.

김민수는 결혼 후 더욱 일에 몰두했다. 아이 둘을 낳았고, 어머니의 숙환이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 간병, 생활비 부담이 커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분투하는 남편은 불만도 가질법 했지만, 주변인을 살피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공장에서 일할 때도 특히 외국인들을 잘 챙겨줬어요. 일찍 사회에 나와서 고향떠나 혼자 있는 처지가 마음이 쓰였겠죠. 한번 마음 주면 잘 챙기는 스타일이에요. 외국인들이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출산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런 일이 있으면 아이들 옷을 구해서 선물도 하고. 잘 살펴 줬었어요.”

이미정은 2016년 어느날, 김민수가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렸던 일을 기억한다. 일상다반사를 입 밖에 내지 않는 성격이라 그때는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고 넘어갔지만, 김민수가 악몽에 시달리던 그즈음 공장에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훗날 전해 들었다. 당시 공장에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단속을 나왔고, 그 일로 공장에 있던 미등록 이주노동자 몇 명이 잡혀가 추방됐다고 했다. ‘김민수 답다, 혼자서 속 썩였겠네’하고 생각했다.

이미정은 남편이 집을 비운 동안 외벌이를 하면서 자녀들과 시어머니까지 돌보고 있다. 이미정의 걱정은 하나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신뢰하고, 걱정 외에 다른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문제다. 시어머니는 아직 김민수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고, 김민수가 해외에 장기 출장을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이 오래 일했던 사람들을 잡아간다고 해서 벌어진 일이죠. 잘못한 거 맞아요. 하지만 아이들은 아빠의 마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빠의 부재는 느끼고 있지만, 그보다 걱정은 어머니죠. 징역 3년씩이나 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머니는 아직까지 해외에 일하러 간 걸로만 알아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일하러 갔다니 그러려니 하고 계시지만, 많이 서운해하시죠.”

***

“객지에서 공장일 하는 처지가 똑같잖아요. 저랑 다를바 없는 사람이잖아요. 같이 생활하던 사람이잖아요. 그때는 정말 머리가 새하얗게 돼서, 차가 주변에 있다고 생각도 못했고, 버스에서 살려달라고, 도망가라고 외치는 그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김민수)

김민수가 일하던 공장에서 이주노동자 몇몇이 잡혀간 사정에 대해, 김민수 사건을 항소심부터 대리하게 된 변호사로부터 좀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손나희 변호사에 따르면, 김민수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도주하기로 결심한 이유로 한 사건을 꼽았다. 2016년 출입국 공무원들이 공장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를 적발해 수갑을 채웠다. 함께 밥 먹고 함께 담배 피우던 사람들은 잡혀가면서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그때 김민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트라우마처럼 마음에 남았다는 것이다.

손 변호사는 사건 수임 후 감옥으로부터 온 편지를 보여줬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혔다.

“오늘 저를 만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항상 누군가의 보호자였기에 다른 사람이 저를 도와준다는 기대는 한 번도 해본 적 없기에 진심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주노동자를 동료시민으로 여기고 보살피던 김민수. 타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도우려다 사고를 일으킨 김민수. 그 잘못으로 실형 3년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있는 그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오는 3월 6일 대구고등법원에서 열린다.

그의 사연을 알게 된 지역 시민사회에선 항소심 재판에서 그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탄원서를 모집하고 모금 운동도 시작했다. 관련 정보는 탄원서 구글 문서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탄원서 구글문서 사이트 바로가기

▲김민수 씨의 편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중 다친 공무원
2023년 한해만 72명
“강제 단속,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주노동자가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오더라도 체류자격을 잃을 위험은 상존한다. 사업장 이동 횟수에 한도가 있으며, 사업주 허가가 없어도 사업장 변경을 할 수 없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의 체류 자격 상실은 이주노동자 자신의 문제가 아닌 잘못된 제도의 문제며, 그렇기에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 단속에만 몰두하는 정책은 어떠한 개선도 이루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김민수 씨 사건을 파악해 탄원서 모집 등 도움에 나선 고명숙 이주와가치 대표는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잘못된 제도에 있는 만큼 국가가 수감 중인 김민수 씨에게 관용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또한 출입국 공무원들도 강제 단속으로 인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법무부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중 부상 당한 공무원은 2019년 16명, 2020년 2명, 2021년 0명, 2022년 4명, 2023년 72명으로 나타났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는 코로나19 유행 기간으로, 강제 단속이 최소화됐던 시기다. 코로나19 종식 이후 2023년부터 법무부는 합동단속 등 강력한 단속 활동에 나섰고, 공무원 다수가 부상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고명숙 대표는 “김민수 씨가 운행하던 버스에 탄 이주노동자들은 그냥 출근하던 사람들이었다. 이주노동자 없이 대구 공단지역이 존립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업주도 그들을 필요로 한다”며 “그들이 일하는 동안 아무런 나쁜 일도 발생하지 않는데, 이처럼 사람도 다치고 추방되고 처벌받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이어 “정치인 한동훈은 ‘동료시민’이라는 말을 전유물처럼 쓰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말과 정반대로 행동한다. 그가 법무부 장관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특정 계층, 특히 이주노동자에 대해 관용을 보이지 않고 배척하는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는 듯하다”며 “우리 이웃인 이주노동자도, 그리고 그를 도우려다가 실수한 김민수 씨에게도 관용을 보이는 사회가 바로 동료시민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지적했다.

끝으로 “김민수 씨는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으며, 부상당한 공무원들에게 치료비도 공탁해 피해회복에 최선을 다했다”며 “김민수 씨의 어린 자녀들이 피해 공무원들에게 편지를 썼고, 이번 일로 지역사회에서 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 면담을 갔더니 피해 공무원들도 실형 처벌을 받는 상황에는 안타까워했다. 앞으로 열릴 재판에선 김민수 씨의 상황이 충분히 고려되길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고명숙 대표는 김민수 씨 석방을 바라는 마음에 기도회 개최도 추진했다. 오는 29일 대구 서구 비산동 포레스트홀에서 대구NCC인권위, 대경목정평, 대구경북이주연대 주최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행동으로 인해 구속된 김민수 씨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연다.

한편 법무부는 법무부 직원이 피해자인 형사사건에서 대응 원칙에 대한 <뉴스민> 질의에 ” 공무 수행 직원이 피해자인 형사사건과 관련하여 별도 규정은 없다”라며 “다만 단속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에 대한 폭행 등의 사건은 사안에 따라 사법당국에 고발하여 엄정히 대응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김민수 씨 지원을 위해 대책을 논의 중인 고명숙 대표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