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청소년, 10월항쟁·민간인 학살과 마주하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시간 속에 묻혀진다"

19:58

“10월항쟁은 교과서에 잘 안 나와 있어서 몰랐던 이야기다. 이번에 공부하고 내용을 알기 전까지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해) 나도 빨갱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죽어 마땅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하고, 학살당한 현장에 와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친구들한테 많이 알려야겠다”

-대구 강동중학교 1학년 조현주

“(경산) 코발트 광산에 묻힌 이들을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하지 않으면 10월 항쟁이 시간에 묻혀 사라지게 된다. 10월항쟁에 대한 내용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추모회에도 참석하고 싶다”

-대구 고산중학교 1학년 김연우

광복 70년을 맞은 8월 15일. 청소년을 포함한 시민 20여 명은 ‘10월문학회’가 주최한 10월항쟁 답사를 진행했다. 10월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민간인 학살지로 알려진 대구 가창댐 수변공원 일대와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0월항쟁 바로 보기 강좌에 참석한 청소년을 포함한 20여 명은 8월 15일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답사를 진행했다.
▲10월항쟁 바로 보기 강좌에 참석한 청소년을 포함한 20여 명은 8월 15일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답사를 진행했다.

답사지를 향해 몸을 실은 버스 안 티브이에서는 광복 70년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사와 태극기를 흔드는 행사 참석자들이 나왔다. 그 무렵 가창골 가창댐에 다다랐다. 댐과 주변 공원은 아름다운 경관을 드러냈지만, 이곳은 사상범으로 몰려 국가에 희생된 이들의 무덤이다.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국가의 수장에게 이곳에 이름 없이 묻힌 희생자는 추모와 묵념의 대상이 아니었다.

‘10월문학회’ 고희림 시인은 “6.25전쟁과 함께 10월항쟁 참가 등으로 대구형무소에 있던 이들과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이들이 이곳에 묻혔다. 전쟁이 끝나고, 유족들은 리어카를 끌고 늦은 밤 몰래 시신을 산으로 옮겨 묻었다. 하지만 저수지가 들어서고, 5.16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국가폭력의 희생자는 빨갱이라는 누명 탓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며 “지금이라도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이 있었음을 시인해 억울한 혼을 달랠 수 있도록 우리가 기억하고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저수지 깊은 곳일까, 산속 깊은 곳일까. 희생자의 유해가 묻힌 정확한 위치는 누구도 모르지만, 억울한 혼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안다. 가창골 주변을 둘러보며, 10월항쟁을 잊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고 자리를 옮겼다.

▲코발트광산 입구
▲코발트광산 입구

경북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제2수평갱도 입구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세어 나왔다. 이곳은 1950년 6.25전쟁 직후 국가가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속을 실시한 후 학살한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갱도는 어두운 굴과 으스스한 바람, 습기 가득한 벽면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허리를 숙이고 낡은 레일 위를 100m쯤 지났을까. 유골과 아직 채 썩지 않은 살점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민간인 학살지 코발트광산을 찾아내고 진상 규명을 20년째 벌이고 있는 최승호 경산신문사 대표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필요한 코발트를 얻기 위해 만든 굴이다. 코발트 수탈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굴을 팠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자를 단체로 매장한 곳이기도 하다”며 “우리 역사에서 잘못된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불행한 역사는 또 반복된다. 유해 발굴과 추모, 그리고 진상규명을 제대로 해야만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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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광산을 직접 답사하고 있다.
▲코발트광산을 직접 답사하고 있다.

산 위로 이어진 수직갱도에서만 유해가 3백여구 발견됐다. 민간인을 사살하고 그대로 떨어뜨리고, 다시 바위로 덮어버린 곳. 그래서 발견된 유골은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놓인 유골을 바라본 청소년들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국가에 희생당한 이들의 아픔이 서린 유골이기 때문이었다.

1994년부터 광산 주변을 수소문한 최승호 대표는 “처음에는 동네 주민도 이곳에 얽힌 과거에 대해 말하기 꺼려했다. 빨갱이라는 낙인의 희생자이지만 입을 뗄 수 없는 억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코발트광산이 민간인 학살지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관계 보고서’를 발표한다.

보고서는 1950년 7~8월까지 군인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 3천여명이 코발트광산에서 집단사살됐다고 밝혔다. 주로 경산과 청도지역 국민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수감자들로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에 협조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희생됐다. 이에 대해 과거사위는 불법행위라고 결론을 내렸다. 가창골에서도 3천여명이 사살됐다고 나와 있다. 이후 유골 5백여구가 발굴됐다.

▲과거사위원회 활동이 중단되면서 코발트광산 유해 발굴에 대한 지원도 끊어졌다. 발굴된 유골도 유족회와 시민사회단체가 광산 입구에 마련한 컨테이너 박스에 안치돼 있다.
▲과거사위원회 활동이 중단되면서 코발트광산 유해 발굴에 대한 지원도 끊어졌다. 발굴된 유골도 유족회와 시민사회단체가 광산 입구에 마련한 컨테이너 박스에 안치돼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사위원회 활동이 중단됐고, 민간인 학살 관련 예산지원도 끊어졌다. 현재 유골 발굴 작업은 모두 중단된 상태다. 그나마 최근 경산시 지원을 받아 코발트광산 주변 정비를 하게 된 정도다.

올해로 69주기를 맞는 10월항쟁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에 의한 민간인 총격 이후 경북지역과 전국으로 확산된 대규모 항쟁으로 평가받는다. 미군정의 쌀 배급 문제와 친일 경찰 등용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도심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이 가려져 있었듯이, 10월항쟁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다.

이에 꾸준히 10월항쟁과 관련된 작품 활동을 벌여온 ‘10월문학회’는 <제3회 10월항쟁 바로보기> 행사를 열었다. 또, 8월 12일부터 3일간 후마네르 범어도서관에서 <청소년을 위한 10월항쟁 바로보기> 강좌를 진행해 함께 답사를 진행했다. 오는 9월 6일 유족과의 만남 행사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