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서로 돕는다.”: 표트르 크로포트킨 ①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13)

15:35

1. 크로포트킨의 생애

“모두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All is for all!”
(Pyotr Kropotkin, <The Conquest of Bread>(1907), p. 14.)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Pyotr Alexeyevich Kropotkin;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Кропо?ткин: 1842.12.9~1921.2.8)은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이다. 자유분방하고 활동적인 성격의 미하일 바쿠닌이 아나키즘을 사회혁명 차원에서 실천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라면, 온건한 성격과 사고의 소유자인 크로포트킨은 당시 운동 형태로 존재하던 아나키즘에 처음으로 과학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그린비, 2006, 20쪽). 영국의 버나드 쇼는 크로포트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개인으로서 크로포트킨은 성자라 할만큼 훌륭하다. 그의 붉고 탐스런 수염과 사랑스러운 모습은 양치는 모습과 흡사하다.”

고등교육을 받은 과학자이기도 한 크로포트킨은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맞서 근대의 제반 조건에 관하여 세련되고 상세하게 아나키즘의 시각에서 분석하였다. 그는 주도면밀한 분석을 통하여 아나키즘에 입각하여 미래사회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아나코-코뮌주의’라 한다. 그의 작업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기려 사람들은 그를 ‘아나키스트 공(公)’이라 불렀으나 정작 크로포트킨 본인은 이 칭호(Prince)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은 여러 권의 탁월한 저작을 통해 당시 주류이론으로 각광받던 사회진화론과 맑스주의를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지리학자로서 철저한 고증에 의거한 과학적 학술연구를 통하여 아나키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이론이 ‘상호부조론’이다. 이 이론에서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였다.

그는 경쟁은 그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서로 최선의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개인(집단)이 발전과 진보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상호부조’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도 바쿠닌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경제적 계급투쟁을 할 수 있고, 아나키스트가 민중운동, 특히 노동조합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프루동의 ‘지역자치연합‘과 바쿠닌의 ’집산주의‘를 계승하여 ’상호부조주의‘를 확립함으로써 현실 사회에서 아나키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실현될 수 있는가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또 하나 그의 주장에서 눈여겨볼만한 것이 있다. 크로포트킨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사상을 노동자조직(노동조합)을 통하여 선전하고 학습하여 이를 현실적으로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노동조합이 의회입법을 요구하지 않고 자본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을 하도록 촉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바쿠닌과 마찬가지로 그도 혁명가로 평생을 인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Anarchism, p. 287&298).

“농노해방 문제와 노동자 계급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특권을 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그들의 노력에 냉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는 인류의 진보는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그것이 온 세상을 사로잡을 때에만 가능하며, 가난과 박해는 똑같이 정신적인 가난과 모든 것에 대한 굴종을 가지고 온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자신을 커다란 목적을 위한 하나의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자유와 해방(내가 자유롭게 생각하게 되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는)을 위한 지식과 빛, 그리고 신의를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노예제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과거의 유산을 청산할 수 있을까?”

크로포트킨은 <한 혁명가의 회상> 러시아어판 머리말에서 “만약 이 책이 누군가에게 이러한 문제를 푸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 책은 자신의 목적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본인이 자서전을 쓰게 된 동기와 소망을 밝히고 있다(표트르 크로포트킨 지음, <크로포트킨 자서전>, 11쪽).

“이 사람보다 청렴하고 인류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한 혁명가의 회상> 서문에서 게오르크 브란데스가 크로포트킨에 대해 평가한 말처럼 그는 평생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남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

크로포트킨은 1842년 12월 9일** 모스크바의 스타라야 코뉴센나야 거리에서 크로포트킨공작가의 삼남(4남매 중 막내)으로 태어났다. 그가 4세 되는 해인 1846년 4월 모친 예카테리나가 사망한다. 크로포트킨은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확실히 비범한 분이었다”고 회상하면서 어머니에게 감화를 받은 농노나 하인들이 그에게 보인 ‘지극한 사랑’이 그의 가치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그의 아버지는 재혼한다. 이로 인해 그의 운명은 급변한다. 계모는 그의 어머니와는 완전히 다른 차갑고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가정교사로 고용된 프랑스인 뿔랭은 아주 단순 암기와 체벌을 일삼는 권위적인 교육으로 그를 훈육한다.

[출처=https://anarchyisorder.files.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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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린 시절 가운데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생애는 다시 한번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모스크바에서 거행된 니콜라이 1세 즉위 25주년 기념식에서 니콜라이황제가 그를 옥좌로 불러올린다. 이 자리에서 그는 근위학교 입학을 보장받는다. 모스크바 제1중학교를 마친 그는 1857년(15세) 페테르부르크 근위학교에 입학하여 1862년(20세) 5월 근위학교를 졸업한다. 같은 해 6월 24일 그는 시베리아의 카자크 기병연대에 부임한다. 그리고는 9월에는 이르쿠츠크 근무를 자원한다. 이때부터 지질학자로서의 크로포트킨의 자질과 능력이 발휘된다. 그는 바이칼호 주변을 탐사하고, 러시아의 다양한 지역의 지질과 지리를 조사한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65년(23세) 12월 러시아 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는다.

1862년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크로포트킨의 사상 형성에 있어 큰 변화의 계기가 일어난다. 이 시기부터 그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5.20~1873.5.8),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게르첸(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е?рцен, 1812.4.6~1870.1.21), 조제프 피에르 프루동 등의 저작물을 읽고 아나키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한다.

25세가 되던 1867년 1월 그는 군에서 퇴역하고, 그 이듬해인 1868년 러시아 지리학협회의 정식회원으로 선출된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지리학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아나키즘 운동에도 적극 관여한다. 1872년(30세)에는 스위스 여행 중 아나키스트계의 쥐라연합 회원을 접촉하고, 바쿠닌 지지자의 일원으로 제1인터내셔널 회의에 러시아 아나키스트 대표로 참석한다. 귀국 후에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혁명클럽인 ‘차이코프스티단’과도 교류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혁명 선전활동을 한다.

1874년(32세) 크로포트킨은 혁명 모의 혐의로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감옥에 수감된다. 수감 생활 중 류머티즘과 괴혈병에 걸려 건강을 해친 그는 감옥병원으로 지정된 니콜라이 위수병원으로 이송?수감된다. 병이 호전되자 이곳을 탈출한 그는 핀란드, 노르웨이를 거쳐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 후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몇 번의 체포와 수배, 그리고 투옥을 반복한다. 그런 와중에도 상황에 굴하지 않고 유럽 전역에서 아나키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계속한다. 1878년(36세) 스위스에서 도피 중 소피아 그리고리예브나와 결혼한다.

유럽 각국을 떠돌면서도 크로포트킨은 많은 저술과 강연을 한다. 그러던 중 1905년(63세) 제1차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귀국을 고려했으나 단념한다. 1917년(75세) 러시아 2월혁명이 일어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러시아제국이 멸망한다. 이 혁명을 계기로 크로포트킨은 페트로그라드로 귀국한다. 혁명임시정부는 그에게 교육부장관 취임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이를 거절한다. 연이어 볼세비키에 의해 10월혁명이 일어난다. 그는 볼세비키의 민주집중제 및 집권적 혁명과는 다른 분권적?반권위주의적 혁명을 주장하며, 10월혁명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것은 혁명의 장송(葬送)”이라는 그의 예언대로 러시아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시작된다.

1918년(76세) 6월 그는 모스크바 교외의 드미트로프로 이주하고,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한다. 유고(遺稿) <윤리학>(Ethics)을 집필하던 중 심장질환에 폐렴까지 겹쳐 중태에 빠진 크로포트킨은 1921년 2월 8일 79세로 사망한다. 지지자들은 그의 유해를 모스크바로 옮겨 볼세비키 비판을 기치로 내걸고 대규모 장례식을 거행한다. 아나키스트들이 들고 행진한 검은 깃발에는 다홍빛 글씨로 “권력 있는 곳에 자유는 없다”고 씌어져 있었다. 레닌은 반란과 폭동을 우려했음에도 이 행진을 묵인한다. 하지만 그의 사후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은 금지된다.

크로포트킨은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는 <상부부조: 진화의 요인>(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 1902)(P.A. 크로포트킨, 김영범 옮김, <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르네상스, 2014)(이하, <상호부조론>)이다. 그 외 <빵의 정복>(The Conquest of Bread; 1892), <청년에게 고함>(An Appeal to the Young; 1896)(P.A. 크로포트킨, 홍세화 옮김, 낮은산, 2014), <국가: 그 역사적 역할>(The State: Its Historic Role; 1897), <한 혁명가의 회상>(Memoirs of a Revolutionist; 1898)(표트르 크로포트킨, 김유곤 옮김, <크로포트킨 자서전>, 우물이 있는 집, 2014) <전원·공장·작업장>(Field, Factories, and Workshops; 1899), <근대 과학과 아나키즘>(Modern Science and Anarchism; 1901)(크로포트킨, 하기락 옮김,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신명, 1993), 등이 있다. 그리고 그는 유고(遺稿) <윤리학>(Ethics)은 미완의 저작으로 남겼는데, 사후에 출간되었다(1921).***

어릴 적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남긴 말은 운명처럼 그의 삶을 이끌었다. 이 말에서 우리는 그가 불의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평생 학자이자 혁명가로 살다 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바람대로 죽은 후에도 그의 사상과 정신은 세상에 남아 자손대대로 기억되고 있으니.

“사람은 죽은 후에도 세상에 남고 싶어 한다. 하지만 참으로 선량한 사람은 영원히 기억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기억은 다음 세대에 남겨지고 자손 대대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영원히 산다는 것도 노력해볼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표트르 크로포트킨 지음, <크로포트킨 자서전>, 11쪽)

2. 청년에게 고함

<낭객의 신년만필>이란 글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해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고 하면서, “아아,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하노라>란 논문의 세례를 받자. 이 글이 가장 병에 맞는 처방이 될까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 말에서 우리는 귀족이란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평생 인민의 ‘이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다간 크로포트킨과 같은 혁명가를 기다리던 신채호 선생의 간절한 염원을 읽을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이 인용한 <청년에게 고함>이란 책에서 크로포트킨은 “오늘 나는 청년에게 말을 건네려고 합니다”라며 혁명가답지 않은 부드러운 문장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여러분에게 놓인 첫 질문은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청년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젊은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직업 훈련을 하거나 학문을 공부한 것(사회가 그 비용을 지불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이 착취의 도구가 되려 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동안 쌓아올린 지성이나 능력과 학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신음하는 사람들을 도울 날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덕으로 타락한 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여러분은 그러한 꿈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꿈을 실현하려 무엇을 할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P.A. 크로포트킨 지음, <청년에게 고함>, 30쪽)

그의 이 말은 오늘날 한국 현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그리고 “마음과 정신이 이미 늙어 버린 나이 든 분”이 아닌 우리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꿈을 갖고 있습니까? 그 꿈을 실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크로포트킨은 “역사적으로 국가는 하나의 계급을 위하여 토지의 사유권을 확립하고, 그 독점적인 권한을 유지시킴으로써 발달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지주계급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노동자는 지주계급에 의해 끊임없이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젊은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직업 훈련을 하거나 학문을 공부한 것(사회가 그 비용을 지불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이 착취의 도구가 되려 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청년들이 오래 동안 직업 훈련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지배계급에 의해 ‘착취의 도구’가 되려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지적이다. 크로포트킨이 생존한 19세기 유럽 사회는 산업혁명의 결과 산업 및 금융권력은 물론 정치권력까지 산업자본가의 수중에 떨어져 노동자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산업자본가들은 개인을 오직 ‘착취의 도구’로 보고 그들의 경제적?정치적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청년들에게 자신들이 직업 훈련을 하고 학문을 공부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산업자본가가 아니라 ‘사회가 그 비용을 지불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둘째, 크로포트킨은 청년들에게 “쌓아올린 지성이나 능력과 학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신음하는 사람들을 도울 날을 꿈꾸라”고 호소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덕으로 타락한 것”라며 청년들을 강하게 질책한다.

물론 크로포트킨이 활동하던 당시와 오늘날의 청년들이 맞고 있는 정치?사회?경제적 현실 상황은 많은 면에서 다르다(지금 우리나라의 청년들은 치솟는 물가와 등록금, 그리고 취업난과 집 값 등으로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삼포세대’(三抛世代)니 이에 ‘인간관계’와 ‘내집 마련’ 포기 두 가지를 더하여 ‘오포세대’(五抛世代)로 불리면서 9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청년들이 이러한 현실에 굴복하여 좌절하고 만다면 자신과 가족은 물론 그 사회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청년들이 살아가야 할 국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가고 묻는다.

3. 국가론

청년들이 그들의 지성과 능력, 그리고 학식을 이용하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신음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국가를 꿈꾸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무엇보다 거대자본과 세금, 그리고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없애라고 요구한다. 이 특권을 배제하기 위하여, 국가 그 자체와 통치기구를 개혁하고, 그 기능에 알맞은 새로운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크로포트킨(하기락 옮김),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신명, 1993, 101쪽).

국가에 의해 발생하고 강화되어 온 특권이 소멸하면, 국가도 자연히 그 존재이유를 잃게 된다. 크로포트킨은 <국가-역사에서 국가의 역할>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을 빌어 아예 국가의 개조가 아니라 폐지를 주장한다.

“국가는 현대적인 국가체제 혹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국가체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본질 자체가 사회혁명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즉 국가는 자유와 평등에 근거한 사회 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발전을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적 형식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갖는 사람들은 국가의 개조 대신 국가의 완전한 폐지를 추구한다.”(표트르 크로포트킨(백용식 옮김), <아니키즘>, 개신, 2009, 73~74쪽.)

국가를 폐지하고 그가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그는 국가와 그 낡은 조직을 폐지하고, 코뮌(농촌공동체)과 자유노동조합 등의 사회 단위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연합형식을 창조할 것을 주장한다. 이 때 ‘새로운 연합’이란 코뮌?자유노동조합과 병립하여 개인적 관계로 형성되는 집단)’을 말한다(표트르 크로포트킨, <아니키즘>, 136쪽;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101~102쪽). 이를테면, 코뮌과 코뮌,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또는 코뮌과 노동조합이 다양한 목적을 충족시킬 필요에서 “무한히, 다양하게, 그리고 일시적 또는 장기적으로” 결합되고 존속하면서 끊임없이 변용되고 추가된다. ‘새로운 연합’은 이러한 집합체로 이뤄진 결사, 곧 ‘자유연합’을 말한다(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102쪽).

그가 말하는 연합의 개념은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 두 가지 사항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첫째, 그는 절대자유주의 정신에 따라 코뮌을 사회의 기본세포로 간주한다. 같은 코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서로 가깝고 서로 잘 알고 있다. 이는 사회적 단위 내부에서나 혹은 위계적 신분 구조에서나 민주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해주며, 자율성에 근거한 사회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스스로를 조직화할 수 있도록 해준다(장 프레포지에, 296쪽).

둘째, 그는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주도권에 기초한 수천의 중심”을 가지는 사회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즉, 그는, ‘국가 안의 국가=자유연합’을 상정함으로써 ‘국가=신민’이라는 지배와 종속이라는 연결고리를 파괴하고자 의도하고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은 다음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는 필수적으로 그러한 도시에서 모든 내적 관계를 파괴하고, 도시 자체를 파괴하며, 도시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파괴해야 했다. 연방의 원리 대신 국가는 복종과 규율을 수립해야 했다. 이것이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이것이 없다면 국가는 국가이기를 중단하고 연방으로 변화된다.” (표트르 크로포트킨, <아니키즘>, 115쪽.)

기본적으로 크로포트킨은 권한과 권력이 집중된 국가 중심의 사회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코뮌과 노동조합이 서로 결합되고 분화됨으로써 서로 병렬적이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수없이 파생되는 자유로운 개인과 그 집단을 통해 정치적?경제적 힘의 집중을 분산시키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사회형태, 즉 ‘자유연합’을 건설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크로포트킨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규정한 바와 같이, ‘자유연합’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의 실현 형태라고 할 수 있다(장 프레포지에, 288쪽).

공산주의를 혐오한 바쿠닌과 달리 크로포트킨은 집산주의는 공산주의에 이르는 전단계로 본다. 집산단계에서 소유는 코뮌의 소유라는 형태로 남아 있지만, 한층 단계가 발전하면 소유 그 자체가 소멸되어 공산주의에 이른다는 것이다(玉川信明, 80쪽). 따라서 그는 사회로부터 유리되거나 오로지 그 내부를 지향하는 공동체와 반사회적인 양상을 띤 공동체를 배격한다. 모든 인위적인 공동체는 고립될 수밖에 없고, 곧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장 프레포지에, 288쪽).

이처럼 ‘자유연합’ 건설이라는 아나키즘적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국가의 폐지라는 사회혁명을 요구한다.

“우리가 자유롭고 반국가적인 토대 위에 사회를 재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는 인민들에게 자발적 선택을 맡긴다. 결국 국가폐지를 통한 사회혁명을 달성할 것인가에 대한 최종적인 선택은 인민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둘 중의 하나. 국가는 폐지되어야 하고, 그러한 경우에 정력적인,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주도권에 기초한 수천의 중심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혹은 국가는 개인과 지방적 삶을 압살할 것이다. 국가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권력 장악을 위한 전쟁과 내적인 투쟁을 수행하고, 폭군들을 교체하기만 하는 피상적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끝, 죽음이 온다!?스스로 선택하라!“ (표트르 크로포트킨, <아니키즘>, 140쪽.)


* 하승우는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로 번역?사용하고 있다(하승우,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그린비, 2006, 106쪽). 크로포트킨의 주된 관심이 ‘인민’, 즉 ‘사람’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이 번역도 타당하다. 그러나 ‘상호부조론’으로 대변되는 그의 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을 서로 돕는다”는 기본원리에 바탕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필자는 “모두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로 번역한다.

** 크로포트킨이 태어난 날짜에 대해서는 1842년 12월 9일과 11월 27일로 이견이 있다. 김유곤이 번역한 <크로포트킨 자서전>은 ‘크로포트킨 연보’를 부록으로 싣고 있는데, 출생일을 후자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문헌에서는 전자인 12월 9일을 출생일로 보고 있다. 그의 자서전에서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출생일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 볼드윈은 그의 주요 저작물을 <혁명적 팜플렛 선집>으로 간행하였다. <Kropotkin’s Revolutionary Pamphlets: A Collection of Writings by Peter Kropotkin>, Edited with Introduction, Biographical Sketch and Notes by Roger N. Baldwin, Dover Publications, Inc., New York, 1927.

***?<Anarchy Archives>에 들어가면 그의 주요 저작물을 볼 수 있다.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_Archives/kropotkin/Kropotkinarchiv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