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가로지르는 공간, <공간주권으로의 초대>를 읽고

[칼럼] 빨간 주부의 부엌에서 보는 세상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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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1 16:54 | 최종 업데이트 2015-09-01 16:54

어릴 적 살던 집은 언덕 위 길목에 있었다. 담이 낮고 언제나 대문을 열어놓는 우리 집은 행인에게 쉽게 노출되었고, 낯선 사람이 불쑥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다. 언덕 아랫마을 소식은 따로 듣지 않아도 공중으로 퍼져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우리 집의 각종 불미스런 소식 또한 우리 가족의 목소리를 따라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오롯한 개인의 공간이 존재할 수 없는 우리 집의 구조가 불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향 동네에서 우리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어디 사니?”라고 물을 때, 어디 산다고 당당하게 밝힐 수 없었다. 어렴풋이 거주지에 따른 어른들의 어떤 판단이 불쾌했다. 어린 시절 공간의 권력을 느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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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환경의 확장된 의미로서 공간에 대한 질문은 기억의 공간으로서 고향 집도 사실적인 고민으로 다가왔다. 이런 내게 추상적이면서 실체적인 공간과 주권 개념을 결합한 <공간주권으로의 초대>는 흥미로웠다. 이 책은 다양한 전공의 아홉 저자가 한국 사회의 위기를 공간이란 프레임으로 분석했다.

먼저 인간을 ‘사이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은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적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공간은 물리적 장소만이 아니라 사회적 힘의 산물로서 계층,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연령, 장애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권력관계가 응축되어 나타나는 사회적 장(場)이다. 따라서 공간의 문제는 사회 불평등, 사회정의, 인권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2009년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등은 공간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철학의 차이가 드러난 대표적인 예이다. 그뿐만 아니라 공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

지금까지 공간 구성은 사유화의 원리가 강화되면서 공간에 대한 독과점과 공통성이 말살되었다. 또, 위계적 공간 구성은 어디 사느냐가 신분이 되고, 공적 공간은 남성의 것으로 가족 등 사적 공간은 여성의 것으로 간주하는 젠더에 따른 이분법, 장애인, 어린이, 노약자와 같은 소수자의 주체적 이용이 어려운 반인권적 공간운영이었다. 또한, 도시 개발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공간은 행정편의나 자본과 정치 권력관계에 토대를 둔 토건개발 중심으로 구성됨으로써 생태적 지속가능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더구나 공간 구성과 사용 주체인 시민의 의견이나 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비민주성, 공간 구성에 대한 공동 논의를 통한 공간 구성 경험의 부족은 공사영역의 착종으로 이어져 공공성이 부족했다.

이에 저자들이 대안으로 주장하는 공간 주권은 공간에 대한 시민의 주권적 권리이다. 즉, 주권자인 시민이 주체가 되어 각자의 차이를 차별로 겪지 않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 열린 공간을 만들며, 그에 동등하게 접근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간에 대한 공공성, 민주성, 인간성, 생태성을 회복하자는 말이다.

영덕 신규원전 반대와 노후 월성원전 폐로를 주장하는 행진에 참가하면서 영덕과 월성의 지역 주민들이 내세울 설득력 있는 논거가 없을까 고민했었다. 주민의 재산권을 앞세우면 개인의 재산권보다 본질이 기업의 재산권에 가까운 공익권으로 사업을 밀어붙인다. 개인 재산권 보호는 한마디로 고전적인 권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재산권만 있는 게 아니다. 이 책 2장 ‘삶의 공간을 지키고 보호할 권리’에 따르면, 공간에 대한 권리가 서구에서는 세계인권선언에 규정된 보편적 인권 ‘주거권’으로서 저항권을 정당화한다. 특히, 주거권을 가장 침해하는 ‘강제퇴거’는 인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요소이다. 이것은 주거권이 단지 물리적 거처에 대한 좁은 해석이 아니라 주거생활에 필요한 경제적·사회적 환경까지 포함한 권리임을 말한다. 또 하나의 권리로 프랑스나 브라질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실정법으로 정해진 권리인‘도시에 대한 권리’가 있다. 이것은 ‘도시 거주자 누구나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누릴 권리, 나아가 도시 정치와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자신들이 원하는 도시를 만들 권리’이다. 토지의 소유권을 갖지 못한 자들도 도시공간에 대한 사용권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권의 진화는 개인에서 주거로 마을 혹은 도시 차원의 권리, 그뿐만 아니라 전쟁 ? 경제 침체, 기후 변화 같은 위협에서 벗어날 자유까지 포함한다. 그렇다면 영덕과 월성의 주민들이 원전 반대를 외치는 것은 공간에 대한 당연한 권리선언이며 저항이다.

특히, 공간과 기억의 관계를 다룬 5장 ‘기억의 공간, 트라우마의 공간, 희망의 공간’과 젠더의 렌즈로 관찰한 공간의 성적 분리를 살핀 4장 ‘젠더, 공간 그리고 공간의 정치화’가 인상적이다. 419 혼령이 잠자는 국립묘지와 국립 현충원, 민주화의 상징 망월동 518 국립묘지의 차이 없음은 공간이 ‘기억의 재현’이며, 재현에는 권력이 개입되는 ‘재현의 정치’가 작동됨을 보여준다. 대안으로 제시하는 ‘트라우마의 공간’은 고통받은 당사자의 처지를 담은 공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눈물도 상업적 이윤을 남긴다”는 저자의 말처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역사적 비극이나 참상이 일어난 장소를 그대로 보존해 후대의 반성과 교훈을 일깨워주는 여행)이 번성하면서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관광지 차원으로 전락하고 정형화된 상징적 이미지가 고통의 기억을 경화시킨다는 점에서 ‘트라우마의 공간’ 역시 충분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계승하고 시공간의 다층적인 관계망을 고려하여 매번 다른 재현을 모색하는 ‘희망의 공간’을 주장한다.

그 사회의 건강성을 재는 척도 중 하나로 평범한 여성이 밤길이나 골목길을 얼마나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느냐가 기준이라면, 대한민국은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이와 비슷한 문제를 4장에서 다뤘다. 젠더(gender)에 따른 공간 개념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공간이 분리되었다. 즉, 남성은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 공적 공간을 차지하고, 여성은 가정으로 대표되는 사적 공간을 차지한다. ‘공적 남성’, ‘사적 여성’의 이원적 대립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즉, 공적 공간은 좋고, 사적 공간은 나쁘다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공적 혹은 사적 공간과 같은 추상적인 공간 개념의 이분법을 깨뜨리는 일이 중요하다.

공간은 비어 있고 어떤 물질이 존재하거나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이다. 장소는 어떤 존재가 있거나 일이 이루어지는 곳 즉,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다. 공간이 물리적이고 객관적 성격이라면 장소는 정체성, 권력관계,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이 강조되는 개념이다. 여고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은 시간상 15분 거리였다. 하지만 이웃집 불빛에 의지해 돌아오는 밤길은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올까 두려운 공포의 ‘공간’이며, 실제로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골목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된다. 또, 밀양이나 청도 삼평리 같은 공간에 권력이 횡단하면서 사건 발생과 함께 그곳은 인권이 드러나는 장소가 되었다.

어느 날 고향 집 옆에 동창 까치네 집이 무너졌다. 주인이 집을 허물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까치네는 하루아침에 철거민이 되었다. 공간 주권의 개념은 분명히 기존의 공간 운영 및 구성에 대한 대안 개념으로 의미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또 다른 저자 박정수 씨의 말처럼 일반의지를 따지는 주권의 대의성(혹은 대표성)이 가지는 한계를 고려할 때, 까치네처럼 주권(법)에서 배제되는 자들은 삶과 싸움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삶은 공간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간 주권은 주권(법)에서 배제된 자들의 공공성이 보전되는 차이의 공간을 지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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