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4) KBS대구방송총국 방화미수 사건

14:44

[편집자 주=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류동인 씨가 기억하는 1987년의 기억을 매주 수, 목요일 연재합니다.]

휴학 중이던 내게 군대영장이 날아왔다. 어떻게든 군대에서 빠지기 위해 심했던 축농증을 핑계로 경북대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 논산에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해서 하루 전 천안에 도착해서 여관에 투숙했다. 그런데 옆방에서 밤새도록 남녀의 야릇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혈기방장했던 나는 그들과 함께 밤을 꼬박 새야 했다.

벌건 눈으로 신체검사장으로 나갔다. 밤의 일로 인해 심신이 미약했으며 심했던 축농증 진단서까지 제출했지만 ‘3급을’이 나왔다. 당시 대학생은 ‘3급을’까지가 현역입영 대상자였다.

대구로 돌아온 나는 선배에게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감방에 가야겠다고 했다. 물론 운동에 대한 의무 같은 것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군대에 가기 보다는 사건을 만들고 감방을 가는 것이 운동권 나름 ‘가오’였다.

그리고 나 같은 경우 군대를 가면 소위 ‘녹화사업-빨간 것들을 녹색으로 바꾼다고 해서 녹색사업이다’이라고 해서 보안사에 불려 다니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할 것이었다. 사회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보안사로 불려가 누가 그랬을 것 같은지 이름을 적으라며 괴롭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떤 경우는 고문관 취급을 해서 편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보안사에서 심하게 취조받는 등 힘든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때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어찌 됐건 일상적인 군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운동권에서 나름 가문이 좋은(?) 나는 녹화사업 대상자가 분명할 거라고 생각했다. 선배에게 감방에 가겠다고 말하자 선배는 은근히 반색(?)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정리 못하고 있는 것들 있는데 같이 정리해라.”

내용인즉 당시는 ‘유화국면’이라고 해서 어지간한 사건으로는 구속이 되지 않고, 구류만 살았다. 민정당사를 점거했는데도 구류만 살았다고 한다. K대 1년 선배인 최○○, D대 동기인 이○○은 세 번의 거사에도 구속되지 못한 채 세 번의 구류를 살고 나왔다. 내가 결합하기로 하고 Y대에서 또 1명이 결합하기로 해서 대구에 있던 각 대학에서 4명이 같이 하기로 했다. 4개 대학에서 한 명씩 차출한 것은 당연히 선배들이 만든 계획이었다.

선배들이 어디를 타격할 것인지를 정하라고 해서 같이 논의했다. 그러니까 83년에 대구에서는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일로 대구에서 운동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안기부로 잡혀가 조사당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이때 대구에 와서 많은 선배들을 고문했다. 그 고문을 버티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좌절했고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구 운동세력은 쑥대밭이 됐다. (편집자 덧붙임_1983년 당시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 주동자라는 누명을 쓴 함종호, 손호만, 박종덕 씨 등 5명은 불법 구금되고 고문까지 받았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형을 지내야만 했다. 이후 2016년 법원이 재심을 진행하라고 판결했고, 법적인 명예회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미 국무성에 의하면 이 사건을 “한국 정부의 소행이다”라는 보고를 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대구운동권 트라우마였다. 우리들 또한 미문화원에 대한 공격을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어지간한 다른 곳들은 구류만 살지 구속되지 않았다. 내가 제안했다. KBS방송국을 타격하자고 했다.

당시 방송국은 1급 방호시설이었다. 선배들이 괜찮겠냐고 했지만 구속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대구지역 첫 번째 ‘선도투쟁’ 대상이 대구 KBS방송국으로 정해졌다.

‘선도투쟁’은 당시 유행하던 방식으로 앞에서 이끄는 방식의 투쟁을 의미했다. 서울 등에서는 이미 많은 선도투쟁이 있었고 대구에서는 우리가 처음이었다. 논의 중 Y대로부터 결합하기로 한 이가 집안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하게 됐다.

한 학교에서 50명씩 모두 200명을 동원해 우리 투쟁을 받쳐주기로 했다. 하지만 고문을 당하면 알고 있는 이들의 이름을 불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한 학교당 50명이면 당시 한 학교 동원 인원으로는 엄청나게 무리한 것이었다. 대체로 서클을 통해서 훈련받으며 올라온 후배들 거의 전부였다. 일을 꾸미기 얼마 전 선배가 이렇게 올라온 후배들을 담당하라고 해서 거의 이름을 알고 있기도 했다. 선배에게 찾아갔다.

“형 고문당하면 안불 자신 없는데요.”
“불어도 괜찮다.”
“그래도요. 한 학교당 10명씩으로 줄이지요.”
“그래도 괜찮겠나?”
“예”
“그럼 그러자”

그렇게 한 학교당 10명으로 해서 40명 정도를 동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올라오는 후배들 중 핵심일 것인데 타격이 심할 것 같았다. 결국, 5명씩 20명으로, 거기서 또 그냥 우리 3명만 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나는 16절지 3장에 빡빡하게 알리바이를 위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조사받으면 나오는 육하원칙을 조금 풍부하게 해서 내용을 만들었다. 3명은 시위에 참여하다가 우연히 만났고, 서로 공분을 참지 못해 모의했다는 가당치도 않은 각본이었다. KBS를 타격하게 된 주된 이유는 광주항쟁에 대한 왜곡이었다. 80년대 투쟁을 지속적으로 관통하고 있던 것이 광주항쟁이었다. 나는 또한 유족이었기에 ‘어용언론’의 응징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편집자 덧붙임_1980년 광주에서 류동인 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형인 故 류동운 열사가 광주항쟁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D-1, 답사를 갔다. 방송국 정문에는 총을 든 전투경찰이 있었다. M-16이었고, 탄창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경찰버스 한 대가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답사 후 3명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배들과 관련을 최소화하기 위해 처음 외에는 3명이 자체적으로 일을 수행했다.

“야 근데 총에 탄창 꼽혀있다. 탄창에 총알 들어 있겄나?”
“글쎄 잘 모르것다.”
“총알 있으면 X되는데”
“총 쏘면 엎드려래이”
“그럴까?”
“쪼매 쪽팔리지만 우짜겠노”

이렇듯 다소 엉성하고 황당한 모의를 통해 사건에 대한 계획은 틀을 잡아나갔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만들어준 유인물, 그리고 화염병 2개, 안전핀이 빠지지 않아 폭발하지 않았던 최루탄(SY-44) 2개를 들고 경북대 정문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KBS방송국으로 향했다. 방속국 담장이 꺾이는 곳에 몸을 숨겼다.

그날따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화염병에 불이 잘 붙을지 걱정됐다. 막상 사건을 치르려니 망설여졌다. 바람을 핑계로 돌아서고 싶은 마음 또한 스멀거리고 있었다.

“병에 불이 잘 붙겄나?”

이렇듯 불안함은 사건을 충분하게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사건이 가져올 앞일에 대한 불안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쓴 탕약을 마시기 전에 망설이는 마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용기를 냈다.

“우찌겠노 그래도 해야지”
“그렇지”
“하자”

경찰버스에서 병력이 뛰어나올 것을 대비해 시간을 벌기 위해 버스 문 앞쪽에 화염병 1개를 던지고 최루탄을 던지기로 하고 달려 나갔다.

“광주항쟁 왜곡하는 KBS는 자폭하라!”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을 타도하자!”

구호를 외치며 들고 있던 유인물을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다. 대구KBS는 조금 외진 곳이어서 유인물을 주워서 볼 사람들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시위하는데 유인물이 빠질 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문자화된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는지를 알 수 있기도 하다.

화염병은 버스 앞문 쪽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최○○ 선배가 던진 화염병은 방송국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빵”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총을 쏘는 줄 알았다. X되었다고 생각하던 순간 아 최루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 이○○이 던진 최루탄이었다. 그 긴박한 순간에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버스 앞문으로 나오지 못한 전경들이 뒷문으로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충분히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무사한(?) 구속을 위해 순순히 잡혀주었다. 경찰들은 우리를 끌고 경비실 같은 곳으로 갔다. 3명이 바닥에 앉았다. 조금 있으니 방송국 카메라가 달려와 우리를 향해 촬영을 시작했다. 그 순간 기자를 노려보며 나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내가 그렇게 쉬지 않고 욕을 잘 할 수 있는지 몰랐다. 그 덕분인지 뉴스에 나오기는 했지만 자료화면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욕을 얻어먹고 있던 기자가 결국 나에게 한마디 했다.

“욕 좀 그만 하이소”
“머라 XXX야, XX놈아 느그가 잘했으면 이럴 일 없잖아. 야이 XX놈아”

문장이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났다. 투사로서의 품위, 정치범으로서의 가오 같은 것은 전혀, 눈곱만치도 없었다. 동네 양아치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기자들을 상대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