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12) 전향사업에 맞선 대전교도소 출장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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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정부는 교도소에 수형 중인 정치범들에 대해 소위 전향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반성문을 쓰면 내보내주는 것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 때문에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접근하기 쉽게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일종의 사상교육이었다.

대전에서 실시됐다. 청주에서도 개인적 사정이 있거나 수형생활이 힘든 친구들이 그 교육을 신청하고는 교육받기 위해 대전으로 떠나버렸다. 이 문제에 대해 <옥중동지회>가 열렸다. 교육을 막아보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방법도 확정됐다.

그 교육에 청주에서 사람을 보내 소위 깽판놓기로 한 것이다. 두 명이 선발됐다. 가장 탁월한 싸움꾼 임○○과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정○○이 뽑혔다. 계획에 따라 두 명이 교육을 신청했다. 교도소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이들을 대전으로 보냈다. 그들은 대전 교육장에서 난장을 쳤다. 하지만 얼마 못가 교도관들에게 제압되어 징벌방으로 끌려갔다.

대전교도소는 전국에 있는 장기수 사상범들을 수용하는 악명높은 교도소였다. 그들에 대한 혹독한 전향사업이 전설처럼 전해왔다. 일반재소자들을 시켜 사상범들을 심하게 구타해 전향을 유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은 사람도 발생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청주에서도 우리가 있던 방 중 중간에 이○○라는 무기수가 있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그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잘 해줬다. 그런데 어느 날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인 김○○ 선배가 우리들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야들아 뭐 땜시 갸 한테 잘 해주냐?”
“왜요? 좀 안 됐잖아요.”
“갸가 어떤 놈인 줄 아냐?”
“어떤 놈인데요?”
“갸가 대전교도소에 있으면서 사상범들 전향사업에 앞장서서 사람들 막 패서 죽이고 한 놈이다.”
“그래요”

그러고 그 뒤로 그는 방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들 중 거친(?) 애들이 가서 문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오면 죽인다고 했다고 한다. 한 걸음도 나오지 말거나 아니면 이감 신청해서 교도소를 옮겨가라고 했다. 결국 그는 이감을 선택했다. 수용자에게 이감은 새로운 교도소 생활을 개척해야 하기에 가장 꺼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청주교도소 여자 사동에는 80년대 이철희, 장영자 사건(편집자 덧_1982년 5월 4일, 당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던 장영자와 남편 이철희가 어음사기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면서 일어난 대규모 어음 사기 사건)으로 유명한 장영자가 들어와 있었는데 그 또한 노는 언니들(?)에 의해 문밖출입이 금지되고 이불만 덮고 살았다고 한다.

다시 대전교도소 이야기로 돌아가자. 임○○, 정○○이 청주로 돌아와 푸념하면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대전교도소 징벌방은 잘 갖춰져 있었다. 벽은 두툼한 패드가 깔려있어 머리를 아무리 세게 박아도 푸석거리기만 했다. 식구통이나 문에 나있는 창으로 소리를 지르면 셔터가 “차르륵” 소리를 내면서 자동으로 닫혔다고 한다.

둘은 난감했다. 그 답답한 곳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지가 막막했다. 그때 임○○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었다.”
“뭘?”
“손목”

임○○은 자신이 쓰고 있던 안경을 깨서는 깨진 안경알로 손목을 그어버렸던 것이었다. 대전교도소에서는 더 데리고 있어봤자 머리만 아프리라 판단했는지 손목 치료가 끝나는 대로 그 둘을 다시 청주로 보내버렸다.

둘에게는 좀 안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굉장히 좋은 콤비를 파견한 것 같았다. 이렇듯 오지랖 넓게 우리들은 파견 투쟁까지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