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돋보기] 전쟁이 된 아시안게임, 행복하기 위한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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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9 11:56 | 최종 업데이트 2018-08-29 12:04

아시안게임이 한창이다. 축구경기나 야구경기가 있는 날은 동네에서 함성이 들린다. 선수들의 경기는 예술작품처럼 아름답다. 자신이 만든 목표를 향해 땀방울을 흘리면서 경기하는 모습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아시안게임 기사들은 제목만 보더라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전쟁 상황을 중계하는 것 같다.

▲[사진=서울신문, 마이데일리, 인터풋볼 스포츠 기사 중 일부 갈무리]

80년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씨름부가 있었다. 운동장 한쪽 비닐하우스 같은 곳이 그들의 연습장이었다. 학교 대항 씨름대회에 응원으로 동원되어서야 그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그들의 영양보충을 위해 전교생이 돌아가며 치킨을 한 마리씩 부담해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이 먹는 치킨을 다른 학생들의 자비(정확히 말하면 부모님의 돈)로 지원해야 하는 경우가 황당스럽지만 그때는 그랬다.

중학교에는 탁구부가 있었다. 유명한 국가대표가 우리학교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역시나 3년 동안 그녀들은 딱 두 번의 경우에 등장한다. 출석부 맨 마지막 번호로만 존재하면서, 중간, 기말고사 시험 날 교실 맨 뒷자리에서였다. 그녀들(여중이었다)은 학교 강당이 연습장이었다. 코치는 덩치가 산만한 남성이었다. 강당 청소가 우리 반 몫이라 방과 후 청소하러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마대자루로 엉덩이를 맞으면서 기합을 넣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때로는 남성 코치가 피다 버린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를 내가 가진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는 선수들도 있었다. 그때도 별로 이상하지는 않았다.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행은 교실에서도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농구부가 있었다. 세월이 좀 흘렀다고 초등학교 때처럼 그녀들을 위하여 치킨을 부담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전국체전이 열리는 날에는 수업 중에도 그녀들을 위해 스쿨버스를 타고 역까지 전송 나가야 했고, 환영도 나가야 했다. 역시 그녀들은 출석부와 중간, 기말고사에만 우리 곁에 잠시 등장하고 사라졌다. 가끔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우리 반은 농구부가 한 명뿐이라 꼴찌는 면할 수 있다는 말도 오고 갔다. 그녀들에 대한 폭력도 여전했다. 경기 중에 화가 난 지도자 중 한 명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한 선수의 뺨과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장면이 관중들에게 중계되듯이 보였다. 차마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던 기억이 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4등’이라는 영화가 있다. 수영을 너무 좋아하고 수영할 때 행복한 소년이 있다. 이 소년의 문제라고 하면 문제는 경기 때마다 ‘4등’만(!) 한다는 것이다. 운동해본 사람들이나 현재 운동부에 있는 선수들에게 ‘4등’이라는 의미는 꼴찌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성적이나, 한 끗 차라는 안타까움이 더해져 좌절감도 더 커지는 등수인 것이다.

참다못한 소년의 어머니는 한때 유명했으나 선수 시절 일탈로 인해 지금은 그저 그렇게 사는 전직 수영선수를 찾아가 소년의 개인 코치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결국 그는 소년의 개인 강습을 시작하지만, 강습이라는 것이 마냥 보기에 즐겁지 않다. 강습 대부분은 폭력으로 일관된다. 더 심각한 것은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이는 폭력이 진행되고 폭력 이후에는 ‘내가 다 너를 위해서’라는 이유의 위로가 반복된다.

결국 소년은 한 수영대회에서 거의 1등이나 다름없는 2등을 했지만, 코치의 폭력은 외부로 노출되고 소년 역시 어느 순간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수영이 너무 행복한 아이는 다시 수영장으로 향하고, 수영대회에서 우승을 거둔다는 이야기다.

영화를 단순히 해피엔딩으로 보기에는 마지막 장면이 던지는 의미가 심란하다. 소년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클로즈업한 한 귀퉁이에는 폭력의 도구였던 빗자루와 마대자루들이 쌓여있다. 소년도 본인의 결과물이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인지 폭력 지도로 만들어진 것인지 혼돈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사진=영화 4등 포스터]

우리나라 체육은 ‘엘리트 선수’ 양성이 목적이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열심히 시켜서 일찌감치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학습권, 자기결정권, 더 나아가 건강권 따위는 가볍게 무시된다. 학교의 무관심과 정부와 체육계의 묵인, 국민들의 맹목적인 승자지향 애국심, 학부모의 결과중심 기대치가 만들어 낸 무시무시한 환경을 견뎌내야만 한다. 정신력으로 구타를 이겨내야 하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비인간적인 훈련도 견뎌야지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선수들도 결과를 위해 과정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성추행, 그리고 각종 비인간적인 대우와 인권침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의 승리는 달콤한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스포츠라는 것이 경쟁을 통해 순위가 매겨질 수밖에 없는 구조는 맞다. 하지만 우리나라 스포츠는 독재자의 정권유지 수단으로 선수가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전사를 키워냈다. 이 과정에서 엘리트 체육, 엘리트 선수 양성이라는 기이한 목적을 위해 아이들은 수도 없이 학대당해왔다.

한 고등학교 레슬링 선수는 체중 감량을 위해 자전거에 허리와 팔이 묶인 채 끌려가듯이 달리기를 하다 지쳐 쓰러졌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숙소까지 기어가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파주의 어느 초등학교 축구부에서는 코치의 무리한 체벌에 대하여 학교 관계자가 문제제기를 하였으나 교육청이 대충 사건을 무마해버렸다. 결국 몇 달 후 감독에 의한 폭력으로 아이가 사망했다. 국가대표에 선발된 한 수영 선수가 ‘정상적으로 공부하면서 운동을 하고 싶다’는 당연한 요청을 제기하며 태릉선수촌 입소를 거부하자 협회는 아예 올림픽 출전 자격을 박탈해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은 80년대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다.

스포츠가 타인과 경쟁을 벗어나 자신의 신체 한계에 도전하고, 신체활동의 경이로움을 경험하는 과정이면 좋겠다. 아이들의 학습권을 제대로 보장해서 운동이 아닌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할 때도 방해됨이 없이 다른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4등을 하고도 이 경기에서 네 번째로 경기를 잘한 사람이라고 박수받았으면 한다.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해도 같이 경기를 치른 상대 선수들과 웃으며 결과를 나눌 수 있는 대한민국 선수들을 화면에서 만나보기를 원한다.

유엔은 1989년 어린이가 누려야 하는 권리를 명시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채택했다. 대한민국은 이 협약을 지키기로 한 당사국이다.

19조, 아동을 보호하는 자들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폭력을 쓰거나 학대하거나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일이 없도록 정부는 노력하여야 한다.
28조, 아동의 교육받을 권리는 무상으로 제공되어야 하며 능력에 따라 제공되어야 한다.
29조, 교육의 목적은 인격과 재능,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마음껏 개발하고 인권과 자유, 이해와 평화의 정신을 배울수 있도록 한다.
36조, 정부는 나쁜 방법으로 아동을 해하는 어른들의 모든 이기적인 행동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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