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떠날 수 없는, 머물 수 없는 술자리 / 박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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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22:12 | 최종 업데이트 2018-09-03 22:13

여성주의를 체득한 뒤 반복되는 고민이 있다. 남성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전에는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듣기 불편하거나 불쾌한 이야기들이 된 것이다. 최근에도 술자리가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친한 남자 선배들과 오랜만에 가진 술자리였다. 반가움으로 시작된 술자리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앉아 있기 불편한 술자리가 되었다. 근황을 묻는 이야기는 최근 있었던 혜화역 및 광화문 시위를 조롱하는 이야기로 이어졌고,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는 늘 그랬듯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고 성희롱에 가까운 이야기가 되었다. 참다못해 내뱉은 나의 한마디는 다시 그들의 웃음거리로 소비되었다. 그들의 노골적인 ‘여혐(여성혐오)’은 나의 반발과 함께 다시 조롱거리로 역전되어 술자리 내내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 술자리 이후 나는 여러 날을 분노하며, 후회하며, 자책하며 보냈다. 왜 나의 분노에 충실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학대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 술자리를 안 가지면 되잖아, 그냥 그 자리에서 나오지 그랬어?”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친한 여자 선배는 불쾌한 술자리를 굳이 가지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한 여자 연예인은 술 마시다가 기분 나쁘면 그냥 나간대, 멋있지 않니?” 그 선배의 조언대로 불쾌한 술자리를 가졌을 때 취할 수 있는 ‘정답’이 있다. 애초에 그런 술자리를 가지지 않는 것. 혹은 그 술자리를 떠나버리는 것. 그것이 그들의 잘못된 발언에 일갈하는 것보다 더 ‘똑똑한’ 대처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관계를 끊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많은 이들의 말처럼 나 또한 나의 퇴장, 혹은 나의 분노로 그 술자리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비록 나는 여성으로서 그들의 ‘여혐 발언’으로 정서적 언어 학대를 당했지만,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정서적 지지를 얻기도 했고, 실질적 도움을 받기도 했다. 대학 생활의 많은 부분을 그들과 함께 즐겁게 보냈다. 이러한 그들과의 ‘관계맺음’이 술자리에서 ‘머물 수 없음’의 폭력적 상황에 지속적으로 대면하면서도 ‘떠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무력한 상황을 스스로 재생산하는 이들을 가리켜 ‘멍청하다’거나 혹은 ‘스스로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근본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주의적 규범’을 근거로 분노하지 않는 것은 가부장 사회에서 같은 여성들에 대한 배신이자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복무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의 의견에는 일견 타당한 지점이 존재한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 ‘여혐 발언’을 일삼는 남성들의 술자리에서 그들의 농담 아닌 농담에 일갈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페미니즘의 지향점은 그러한 ‘여혐’에 저항하는 것이니깐. 그러나 나에게 있어 그 술자리 이후 가진 고민들은, 그들과 관계 맺음을 유지하면서도 즐거운 술자리를 만들고 싶은 최선에 대한 희망, 다시 말해 최선의 상황을 만들고 싶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욕구에 기반 한 것이다. 일명 ‘매 맞는 여성 증후군’을 연구한 학자들은 매 맞는 여성이 남편으로부터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면서도 남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가정으로부터의 탈피 및 도피’가 아닌 남편의 변화에 기댄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욕구를 가리켜 ‘멍청하다’거나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들의 종합적인 현실 인식을 고려하지 않고 구조적 위계를 무기 삼아 도리어 이들에게 가하는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여성이 떠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술자리’를 만드는데 있어 필요한 가장 큰 기본 전제는 ‘남성들의 변화’임에 틀림없다. 여성 혐오를 멈추고, 언어폭력과 정서적 학대를 그만두는 것. 분명 그 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행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동시에 당장 이러한 상황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여성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즘에 대한 강박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두렵고 불편하더라도, 그리고 때로는 ‘정답’을 지키지 못해 자기 역설적 상황에 마주치더라도 성찰은 하되 자기 학대는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주의를 막 터득한 한국 사회의 젊은 여성들이 곳곳에서 자기 학대에 기반 한 힘듦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의 호소에 ‘정답’보다 ‘포용’으로 응답할 때, ‘나쁜 페미니스트’들의 진정한 반란이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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