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사랑은 먼 데 있지 않다 /김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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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4 09:28 | 최종 업데이트 2018-10-24 09:28

사랑은 먼 데 있지 않다
-제2회 성주 愛地里 문화농원 잔치에 부쳐

흙을 모르는 사람들이 높은 곳에 앉아있다
흙을 모르는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검토하고, 서명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있다

흙의 마음을 한 번도 헤아려 보지 않은
사람들이 흙과 땅을 못 살게 하고 있다
그들에게 땅은
투기의 대상이고 재산을 불리는 수단일 뿐이다

흙이,
아직 눈 뜨지 못한 작은 벌레들을 키우고
어린 나무의 연한 뿌리를 꽉 잡고 있다
흙이,
목마른 생명들에게 줄 물을 품고 있다
땅속의 작은 생물들과 땅 위의 생물들이
거기에 기대서 산다
흙은 누대(累代)에 걸친 우리 조상들의 뼈와 살의 잔해다
그러니 흙은 우리가 흘린 땀보다
조금이라도 더 돌려주려고 애쓰고 있다

흙은 안다
바람을 알고 햇빛을 알고 물을 알고
무엇보다 때를 안다
피고 지는 때와 나고 죽는 때를
인간은 배반을 하지만 흙은 배반을 모른다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돌려준다

흙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땅속의 눈먼 벌레들이다
흙을 망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다
산성비로 망치고
농약으로 망치고
비닐로 망치고
쓰레기로 망치고
개발과 투기로 망친다

흙은 작은 씨앗 하나를
수천 개로 만들어 우리에게 돌려준다
단단한 뼈들도 흙으로 만들어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흙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만지고
무엇에 의지해서 살 수 있었을 것인가

흙이 망가지면 인간도 망가진다
흙이 기뻐야 우리도 기쁘다
그런데 흙을 모르는 손이
판결을 하고 법을 만들고 정치를 하고 있다
흙을 모르는 손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흙이 병들고 있다

사랑은 먼 곳에 있지 않다
흙을 만지는 일이 사랑이다
흙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사랑이다
만질 수 있는 구체적 사랑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흙의 바탕은 사랑이라서
다 품고
다 참고
다 용서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 길러낸다
흙의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어림없는 일이다

흙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흙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마침내 사랑을 깨닫게 한다

흙이 아니었다면
아, 흙의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사랑의 땅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결국 흙으로 돌아갈 사람들
흙이 따뜻해야 죽음마저도 따뜻하다
우리는 감자를 키우고 벼를 키우고
딸기를 키우고 참외를 키운다
흙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여기 애지리, 사랑의 농원에서
大地의 사랑과 우리들의 노동을 기억하자
오후의 잘 익은 이 흙냄새를 기억하자
사랑은 병들지 않는다
사랑은 늙지 않는다
우리는 흙처럼 웃는 착한 사람들
가장 오래도록 빛나는 것은 착하고 어리석은 것들이다
오늘 이 사랑의 시간을 마음껏 즐기자

김수상
1966년 경북 의성 출생. 2013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랑의 뼈들』과 『편향의 곧은 나무』가 있다. 제4회 박영근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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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상
1966년 경북 의성 출생. 2013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랑의 뼈들』과 『편향의 곧은 나무』가 있다. 제4회 박영근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