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레드데드리뎀션2’, 미래를 위한 실패 /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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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11:32 | 최종 업데이트 2018-11-19 11:33

락스타 게임즈의 신작 <레드데드리뎀션2>는 레드데드 시리즈 중 <레드데드리뎀션>의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의 프리퀄이다. 설명이 이렇게 복잡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 또한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었는데, 그걸 논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니 넘어가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제목의 일부인 ‘리뎀션(redemption)’의 의미이다.

▲게임 레드데드리뎀션2

‘리뎀션’은 뉘앙스가 복잡한 단어이다.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고 남을 구원하는 동시에 자신을 구원한다는 뉘앙스의 표현인데,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예수의 대속이다. 제목 중 ‘레드 데드’의 유래에 대해서는 첫 작품 주인공 이름과 관계있다는 것 말고는 영어권 이용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있는 모양이니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결국 이 게임 시리즈의 주제 의식이 ‘리뎀션’에 있다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인지 1편과 2편 모두 주인공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누군가를 구하는 결말이다. 비록 무법자로 법이나 질서와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며 남에게 해를 끼쳐왔지만, 희생과 구원을 통해 결과적으로 속죄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뎀션’에는 비극적 서사가 동반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인공들이 애초에 왜 무법자로서의 삶을 살았는지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데 2편이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인 아서 모건이 속한 반 더 린드 갱단은 범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여타의 갱단과는 다른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두목인 더치는 도시 문명과 법적 질서를 혐오하며 어딘가 먼 서부나 혹은 타히티 등에 존재하는 이상적 공간에서 자유롭게 사는 미래를 갈망한다. 주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인 갱단 멤버들에게 이런 이상론은 결속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범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당화된다.

첫째는 이들의 범죄 대상이 어차피 부자들이 부당한 수단을 통해 축적한 재산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이상적 도피의 완성을 위해 자금이 필요한 현실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부 개척 시대가 사실상 종언을 고한 이 시기에는 범죄를 반복해도 도피처로서의 이상적 공간은 멀어지기만 할 뿐이어서 오히려 이상론 자체가 핑계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회의론이 갱단 내에 팽배하게 된다. 주인공 역시 이런 회의에 일정 부분 공감하지만, 어릴 때부터 갱단에서 자란 처지에 조직을 등질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기에 비극은 예정된 것이었다. 이야기의 초중반에는 이미 시대적 효용이 다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후반부에는 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앞으로 최소한의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반 더 린드 갱단의 이런 복합적 모습은 당시 미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듯 보인다. 작중의 배경이 되는 1899년은 부유한 기업가가 기간산업을 독점하며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현실에 반발이 커져가던 시기였다. 작중의 레비티커스 콘월은 당시의 독점적 기업가에 대한 묘사이다. 실업과 양극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실업자들과 노동조합의 반발이 과격해지면서 중간계급의 불안이 형성됐고 이는 곧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되어 혁신주의가 대두됐다.

혁신주의자들은 역사의 진보를 위해 인간의 목적의식적 간섭이 필요하고 이 역할을 정부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철도 산업 등을 중심으로 한 트러스트와 이들의 뒤를 봐주는 정치세력의 추문 등을 폭로하는데 진력하고 노동계급과 농민을 통제하기 위한 금주운동을 촉발했다. 종교 내에서도 근본주의적 태도의 반작용으로 신앙을 사회개혁의 수단으로 삼는 사회복음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갱단 멤버로 술독에 빠져 살던 스완슨 목사가 갱생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도시는 모든 모순이 집약된 공간으로 여겨졌으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게임에서는 부유층과 도시노동자들이 극단적 외양을 한 채 함께 사는 생 드니에서 이 같은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게임 내 인물들은 도시노동자를 노예나 다름이 없는 상태로 묘사한다.

그런데 이상론을 내세우는 갱단의 눈으로 보면 기업은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고 도시는 약자들이 착취당하는 혐오스러운 공간일 뿐이다. 또, 혁신주의 전문가들이 내놓는 이런저런 해결책도 결국은 잘 배운 지식인들이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 기득권에 호응하며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치의 갱단은 반(反)문명화 되어 존재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이상적 공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생 드니의 연회에서 법치가 곧 미국의 정신이라는 전직 군인의 주장에 더치가 자유의 보장이 핵심이라고 반론한 것에서도 이런 구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적 도피가 실재하지 않거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정된 이후에 가능한 ‘구원’이란 결국 기성의 체제에 적응할 기회를 주자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쟁취한 구원은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결국 1편과 2편의 에필로그에서 ‘복수’의 반복으로 이어지게 된다. ‘돌아온 탕자’나 친구 혹은 가족의 복수는 서부극의 전형적 모티브지만 동시에 이 장면들을 통해 실패한 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이상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결국 사회부적응자로 인생을 끝내고 만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게임의 서사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은 정부가 핑커튼 탐정을 고용해 갱단을 추적하고 체포하려는 시도와 군의 원주민 탄압이 동일시된다는 것이다(핑커튼 탐정들이 악명을 떨친 또 하나의 계기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방지하거나 분쇄하기 위해 사측의 편에서 물리력을 행사한 것이다).

한쪽은 범죄자이고 다른 한쪽은 야만적 약탈에 의해 살 곳을 빼앗긴 이들이지만 두 집단의 구성원 모두 모두 기성 체제 내에서 낙오돼 굴욕을 피할 수 없는 신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갱단의 행동파들은 원주민 내 강경파들을 자극해 군과의 대립을 유도해 이득을 거두려 하지만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미래가 없는 갱단이 범죄를 반복하는 것처럼 무익한 살생을 되풀이하는 일일 뿐이다. 실제 원주민의 대다수는 지금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

싸우다 죽거나 또는 굴복해 지워지거나의 두 선택지를 벗어나려면 적어도 실패가 대안적 정치의 가능성을 여는 것으로 연결돼야 한다. 사실 이 시기의 미국인들이 대안적 정치 세력의 형성을 거부한 것만은 아니었다. 1900년을 전후해 미국 사회당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게 대표적이다. 미국 사회당의 대표적 인물인 유진 뎁스는 1900년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5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특히 1912년의 득표율은 6%에 육박할 정도였다.

사회 개혁을 향한 열망이 컸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성 정당들도 유권자의 구미에 맞는 목소리를 내야 했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행정부가 친기업적이란 비판에 직면하자 전직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혁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제3당(진보당)을 창당해 대선 출마를 강행했다. 적전 분열로 승리를 거머쥔 것은 교수 출신으로 순수한 혁신주의자로 알려졌던 우드로 윌슨을 내세운 민주당이었다. 주류 정치가 혁신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대안적 정치세력의 가능성은 꺾였다.

유진 뎁스의 정치적 최후를 야기한 것은 전쟁이었다. 유진 뎁스는 1918년 1차 세계대전 참전 거부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소요죄로 기소돼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제국주의적 확장을 향한 욕망이 동거하는 상황이 되면서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급진적 시도는 철저히 외면당했고 기각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게임의 시나리오가 주인공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노동운동이나 사회개혁 운동에 뛰어드는 것으로 마무리됐다면 프로파간다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진행은 또 비현실적이다. 주인공이 여성참정권자들의 시위를 위한 마차를 몰아주는 것 정도가 최대치일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이 게임의 시나리오가 보여준 것이 우리 현실에 비추어볼 만한 내용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주인공이 속한 갱단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우리 주변도 온갖 분노와 절망에 가득 차 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이런저런 저항을 시도하지만, 그것은 마치 갱단의 결말 없는 범죄의 반복이나 이미 패배한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원주민들의 비극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미래를 위한 실패여야 하고, 우리의 실패가 누군가에게는 어떤 구원(redemption)이어야 할 것이다. 일거에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더 나은 실패는 결국 대안적 정치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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