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9일 대구에서 유성기업 8년을 다룬 ‘사수’를 보자 /김상목

다큐멘터리 '사수'를 '사수'하는 것의 의미란?
우리에겐 더 많은 '사수'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도 영화가 현실을 조금은 바꿀 수 있다고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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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사수>는 지난 11월 대구사회복지영화제×오오극장의 “전태일 열사 38주기 노동영화 특별전” 상영작으로 한차례 상영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조직위원회는 매월 진행 중인 정기상영회 12월 상영작으로 다시 <사수>를 상영합니다. 신작이 없어서? 아닙니다. 늘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상영회와 기획전 예비목록에는 몇 배수의 영화들이 언제 한번 상영될까 아쉬움 속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바로 전월에 상영한 작품을 다시 스크린에 걸려는 것일까요?

이유 첫째.
<사수>의 11월 첫 대구지역 상영 이후 유성기업은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의 패륜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뉴스 검색 순위만 봐도 경찰청에서 유성기업 사건 재조사 소식이 쉽게 눈에 띌 정도로 1달 넘게 지속되고 있지요. 물론, 경찰청의 조사 내용은 속칭 ‘유성기업 노조원들의 임원 감금폭행사태’ 때 ‘현장의 경찰이 왜 노동자들의 폭력을 막지 못했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뉴스는 그 내용을 다루거나, 가뭄에 콩 나듯 마지막 문장에서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도 조사하고 있다’ 정도에 그칩니다. 기계적 중립이 희화화된 면모겠죠. 대체 무슨 배짱으로 백주대낮에 경찰도 있는 상황에서 유성기업 노조원들이 하늘 같은 회사 임원(직장생활 해보면 압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강림하신 분들이거든요)을 두들겨 패는 지경에 이르렀냐는 점입니다. (그 폭력이라는 게 우발적으로 몇 분여에 그쳤으며, 주류 언론에서 대서특필한 ‘소설’에 비하면 우발적 해프닝 수준이라는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사수>는 지난 8년간 유성기업에서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해보려던 노동자들에게 벌어진 일을 드러내 보임으로 주류언론이 특정한 의도를 갖고 마음껏 창작의 자유를 펼치는 픽션에 대한 카운터펀치이자 지금껏 나온 가장 유력한 정황 자료일 것입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노동자들이 왜 노동조합을 만들었는지, 노조를 만들고 나서 회사 측에서 어떻게 반응했고 어떤 방해를 저질렀는지, 그 결과물로 노동자 개개인에게 가해진 유무형의 폭력과 법적 조치들이 인간을 어떻게 한계로 내몰고 파괴해왔는지가 점점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영화 ‘사수’의 한 장면

<사수>를 보고 나면, ‘저 정도면 정말 많이 참았구나’ 또는 ‘사람이 저 지경이면 획 하고 돌 수도 있지’ 하는 반응이 나올 법합니다. 이쯤 되면 언론이 왜 왜곡·허위 보도를 일삼는지가 오히려 궁금해질 지경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꽤 흥행하고 반향을 일으켰던 상업영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내부자들”이지요. 국민 개돼지론으로 지금도 간간히 회자되는 바로 그 영화입니다.

주류 상업영화에서 <내부자들>만큼 한국의 주류 언론과 언론인들이 정치권력과 대기업 광고에 목매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 못잖게 부역자를 자임하고 공정보도 따윈 내팽개친 채 권력에 완벽하게 융합한 실태를 보여줬던 영화는 없었으니까요.

물론 예전처럼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가짜 뉴스를 주류 언론이 마구 퍼붓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영화 <1987>에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으로는 너무 뻔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가설을 마구 섞어서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의심하게 만드는 방식을 택하죠. ‘결정 장애’를 유발하는 방법입니다.

처음엔 사실이 궁금하지만 각자의 일상이 있는데 두세 번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면 목표 달성하는 식입니다. 아니면 원인과 배경은 뚝 잘라버리고 단순 ‘사실’ 만을 보여줍니다. 헷갈리게 만들죠. 그러면서 불길한 단서만 몇 개 늘어놓고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합니다. 마치 ‘카더라’ 통신의 출발점 마냥요. 아니면 익숙한 편견으로 기울도록 물컵을 살짝만 기울여주면 됩니다. 정보 자체가 부재했던 시절에서 정보 폭발의 현재로 이행한 결과입니다.

<사수>는 이렇게 99대 1의 싸움을 벌이려는 작품입니다. 스마트폰과 PC 창만 열면, 혹은 케이블TV 화면만 켜면 나오는 언론의 조작에 맞선 다윗이 되려는 자임이지요. 이런 태도는 무척 오래된 것입니다. 이미 사라져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혹은 유튜브나 SNS 동영상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올드스쿨’ 풍의 작업이지요.

이유 둘째.
그렇게 <사수>는 골리앗 주류언론에 맞선 다윗의 역할을 떠맡으려 합니다. 왜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일까요?

<상계동 올림픽>이라는 가끔 회자되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랑 1988년 올림픽을 위해 강제철거당한 상계동 철거민들을 따라가는 비디오테이프가 30년 전 처음 등장하며 “독립다큐멘터리”라는 것이 이 땅에 탄생했다고 전해집니다.

▲영화 ‘상계동 올림픽’의 한 장면

‘땡전뉴스’가 통용되던, 권력의 직접통제에 벌벌 기던 언론이 꼭꼭 감춰두었던 소외된 사람들과 금박 이면의 어두운 일을 기어코 뒤집어 보여주려던 사회운동 영상활동가들이 활약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제도적 민주화가 진행되고 방송매체와 인터넷 환경이 다양해지면서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안정적인 기반 없이 활동가 개인 혹은 소집단의 열정으로 지탱하기엔 환경이 녹록지 않기도 했고요.

그러나 21세기에도 간간히 존재감을 드러냈던 게 용산참사나 쌍용차 정리해고, 4대강 사업 강행, 세월호, 송전탑과 사드 배치 논란, 광화문 촛불 등 굵직굵직한 사회적 사건이 터질 때 속보 혹은 아카이빙의 형태로 선보이는 전통적 의미의 ‘독립다큐’들입니다.

▲영화 ‘공동정범’

용산참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 <두 개의 문>이나 <공동정범>이 있었고, 쌍용차 정리해고를 다룬 <당신과 나의 전쟁>과 <안녕 히어로>가 존재하며, 세월호를 기억하는 4.16 프로젝트의 일련의 현재진행형 작업들과 밀양과 청도와 곳곳의 송전탑 건설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집요하게 담아내는 <밀양전>과 <밀양 아리랑>, 4대강 사업의 파괴적 행태를 기록한 <두물머리>와 <강, 원래 프로젝트>, 성주 사드 사태를 다룬 <파란나비효과>와 <소성리>가 있습니다.

광화문 촛불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되기 시작했으며, <시국페미>와 <광장의 닭>처럼 다양한 사회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수>는 그런 여전히 살아남아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픈 독립다큐멘터리의 2018년 현재 첨단에 서 있는 셈입니다.

모니터와 스크린이 숨기고 보여주지 않은 사실을 웅변하거나 혹은 감춰진 채 울고 있는 이들, 항의하는 이들 곁에 서려는 다윗의 작업은 비록 쇠락해 있지만 약간의 잔향 혹은 잔불만은 남겨놓았으니까요. 아니, 차디찬 21세기 현실의 세상이 무덤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못 가게 끄집어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유튜브 전성시대,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다양한 영상을 편집까지 즉석에서 해내서 공유하는 시대에 그저 기록만으로 예전만큼의 가치를 주장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태도”는 오히려 더 중요해졌고, 절차적/제도적 민주화가 겉으로는 완성되어가는 시점에서 그 태도는 유연하면서도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변을 준비해놓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논란과 악플을 견디는 내공까지 갖춰야 하죠. ‘자기는 뭐가 잘났다고 가르치려 드느냐?’ 또는 ‘아, 몰라 나 살기도 힘든데’, ‘세상일이란 게 다양한데 생각을 강요하지 마!’ 같은 부정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에 맞서야 합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암묵적 공모를 개인의 자유로 치부하는 그런 태도들 말이죠. 차라리 공권력에 맞서는 건 쉬워 보일 정도로 느껴지는 비아냥과 외면도 폭력적 태도입니다.

이유 셋째.
인터넷은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지식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게 될 것이란 장밋빛 희망과 함께 등장했습니다.(사실 선배가 있습니다. 필사가 아니라 인쇄로 찍어낸 책이 원조이죠)

그리고 인터넷의 정보 전달이 아니라 SNS 서비스를 통해 개인의 선택이 극대화되고 그룹을 통해 자유롭게 결합과 이탈을 결정할 수 있게 되면서 마치 현실에 정보를 공유하는 유토피아가 등장할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유튜브, 인스타그램…지금도 생겨나고 사라지는 사회관계망 서비스는 방구석과 세계를 연결하는, 앨 고어가 예언했던 ‘정보초고속도로’를 실현한 것처럼 보이지요.

물론 어마어마한 순기능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근래 온라인 세계에서 출발해 현실 세계를 뒤흔드는 흐름은 걱정되는 측면이 적지 않지요. 물론 많은 부분은 과거의 억압적 측면에 대한 반작용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정치적, 사회적 입장이 무엇인지, 어느 편인지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대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소위 구분하는 진보-보수/좌파-우파를 뛰어넘어서 말이죠. 나는 진보적이고 소외된 노동자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을 취하지만 정작 노동과 노동자의 얼굴은 다양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라, 산업, 지역마다 쟁점은 무궁무진합니다. 쏟아지는 현안에 대해 스스로 변별하지 못하면서도 세계의 다양성에 직면하지 못하면 사상누각에 그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노동자의 편을 들고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현재 노동문제의 중요한 부분을 포착해 담아낸 이 작품, <사수>를 봐주셔야 합니다.

그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경우라면 어떨까요?

배은망덕한 노동자들이 무지한 나머지 혹은 탐욕에 절어서 막무가내로 경제를 망치고 보금자리인 회사를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으니 엄히 대처해야 한다며 소리 높여 규탄하는 이들이라면 부디 <사수>를 한번 보시고 자신의 신념을 이어가셔도 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저 지경에 처했는데도 정신줄을 잡고 있다는데 경이로움을 느낄 공산이 훨씬 높을 테니까요.

그냥 쉽게 까놓고 말해 ‘나는 다 알고 있으니 안 봐도 돼!’가 가장 최악의 태도라는 생각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요. 세상은 아무리 석학이라도 자고 일어나 보면 예상은커녕,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경이롭거나 혹은 황당한 일투성이인데 말이죠. 일단 보고 나서 생각해보자는 무척 단순한 호소가 지나치게 길어졌습니다.

부디 이 작품 <사수>를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이들이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실’에 입각한 논쟁으로 서로 싸웠으면 합니다. 아무리 시끄럽더라도 외면보다는 어떻게든 생산적인 결말을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작품을 보고 지지하건, 항의하건 일단 봐야 뭐가 나오겠지요.

우리에겐 아직 더 많은 <사수>가 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사수>들은 다양한 입장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토론되어야 합니다. 논쟁의 땔감이 되어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간절한 바람을 가진 이들이 조마조마하며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편견 없이 전해지길 소망하는 것은 <신세기 에반게리온>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니 극장에서 만나요~

[상영회 정보]
■ 일시 : 2018년 12월 19일 수요일 19시

■ 장소 : 대구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 주관 :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조직위원회
■ 관람 : 사전신청 선착순 50명 자율관람료
※ 문의 :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010-8598-1324, spanishbombs@hanmail.net)

[작품정보]
사수 For Dear Life (2018)

한국 | 다큐멘터리 | 12세이상 | 104분
감독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생활문화공동체 “공룡”)
21회 강릉인권영화제(2018) 초청작
44회 서울독립영화제(2018) 새로운시선상
23회 인천인권영화제(2018) 개막작
10회 DMZ국제다큐영화제(2018) 초청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