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불법 촬영 영상 사이트 차단이 승인한 자유의 남성성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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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1:43 | 최종 업데이트 2019-03-04 11:43

지난달 11일부터 895개 사이트가 방송통신위원회에 의해 접속 차단됐다. 이른바 ‘서버 네임 인디케이션(SNI) 필드 차단’ 방식을 적용했다. ‘SNI 필드 차단’이란 서버 이름이 불법 사이트와 일치하면 기계적으로 접속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이번에 차단된 895개 사이트 가운데 776개는 불법 도박 관련 사이트였고, 96개는 음란 사이트다. 음란 사이트에는 몰카 등 불법 촬영 영상을 유통하는 곳들이 포함됐다.

이 96개를 두고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접속 차단 발표 직후 올라온 ‘https 차단 정책에 대한 반대 의견’이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순식간에 26만여 명이 동의했다. 지난달 16일에는 10대와 20대 남성 100여명이 촛불을 들고 서울역 광장에 모였다. ‘리얼돌’과 성인용품 등에 대해 방송하는 유튜버가 주최한 이날 집회에 나온 남성들은 “인터넷에서 국가의 통제권이 강화되는 것”에 반대하고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시위에 나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본적인 인권이나 표현의 자유나 욕망을 차단하는 것은 절대로 하면 안 될 짓”, “문재인 대통령 각하, 저희는 즐기고 싶습니다. 저희가 즐기는 걸 방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발언도 나왔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문재인 정부의 ‘여성주의 정책’으로 자신들이 억울하게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국가의 통제에 대한 우려는 역차별을 주장하는 10대와 20대 남성들 사이에서만 제기된 게 아니다. ‘오픈넷’과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진보 성향의 정보 인권 단체들도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이번 접속 차단으로 인해 “이용자의 통신 정보에 대한 국가기관의 통제권이 강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거나 “통신비밀침해를 확대하기 시작하면 국가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인터넷 트래픽에 대한 감시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밝히고 나섰다. “일괄적인 접속 차단보다 불법 사이트의 수익 구조 등을 타격해야 한다”거나 “국제공조나 자정 문화 조성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라는 견해도 나왔다.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자 수가 20만 명을 넘기면서 나온 이효성 방통위원장의 답변을 소개한 보도에서 주로 부각된 건 “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민이 공감할 수 있도록 소통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방통위원장의 사과 발언이었다. 젊은 남성들에 이어 진보 단체까지 나서서 방통위원회를 비판하니 방통위원장이 무릎을 꿇었다는 투였다.

뒤이어 나온 “방통위가 차단을 해제했다”는 오보 역시 같은 선상에 있는 보도다. 하지만 이날 방통위원장의 답변에서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지난해 4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가 문을 연 뒤, 지난해 말까지 불법 촬영물 등 몰카 피해를 호소한 사람이 2,379명이나 됐다는 사실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남성 피해자도 271명 포함됐다.

인터넷상에 유통되는 불법 촬영물로 인해 고통받으면서도 정작 신고하기는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2,379명은 실제 피해 인원의 최소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 최소 숫자들의 피해 호소에 대응하기 위해 센터가 영상을 삭제하거나 차단한 규모는 28,879건에 달했다. 한 달 평균 3,208건에 이른다.

센터의 조처와 함께 웹하드 업체에 대한 수사가 강화하자, 불법 촬영물은 점점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국외 사이트로 퍼져 나갔다. 정부의 이번 접속 차단은 이런 과정에서 등장한 예외적 조처다. “불법 사이트의 수익 구조 등을 타격”하거나 “국제공조나 자정 문화 조성”이라는 ‘근본적인 해법’은 이 예외적 조처를 우선 적용한 뒤에 고민해봐도 늦지 않다. 쏟아지는 피해자들의 고통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맥락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여성의 몸이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되어 유포되고, 다시 누군가의 ‘소장품’이 되고, 다시 누군가에 의해 ‘상품’으로 거래되고, 다시 누군가의 ‘통신 정보’나 ‘통신 비밀’이라는 프라이버시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호소되는 과정 속에서 누구도 이런 모든 일들이 여성의 몸을 도구 삼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국가의 통제와 개인의 자유 사이의 권력 관계에서 하위 주체인 개인의 자유가 침해받고 있다는 사실만 거론됐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개인을 상대적 약자로 보고 있다면, 정작 ‘개인의 자유’에 의해 착취당하는 ‘여성의 신체’라는 더 약한 고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의 자유와 착취당하는 여성이라는 권력 관계에서 상대적 약자인 피해 여성들은 “기본적인 인권이나 표현의 자유나 욕망”, 그리고 “이용자의 통신 정보”나 “통신 비밀”을 거론할 권리조차 배제당한 건 아닐까.

이번 ‘https 차단 정책’을 둘러싼 논란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표현의 자유와 욕망의 자유 등 개인의 자유가 논란을 통해 남성들만 전유할 수 있는 권리로 승인됐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누군가를 혐오할 수 있는 자유가 존재할 수 없듯, 누군가에 대한 착취를 전제로 한 자유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이번 ‘https 차단 정책’을 두고 나왔어야 할 목소리는 국가 통제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국가의 통제에 다시 사회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차단된 사이트 주소가 무엇인지, 어떤 키워드를 통해서 차단한 것인지, 조금 더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공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가르는 것은 사회의 끊임없는 감시다.

인간은 평등한 존재이지만, 개인으로 존재할 때 평등할 수 없다. 무한대의 자유 속에서 개인은 어떤 능력을 통해서든 문화 자본을 통해서든 격차를 생산한다. 그리고 그 격차는 끊임없는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개인의 삶에 사회가 개입해야 하는 까닭이다. 누군가의 성적 자유조차 상품이 된 현대 사회에서 사회의 개입 없는 자유란 단 하나만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자유롭게 누군가를 착취하고 싶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그 착취를 방임하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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