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가 사는 세상” 극장개봉을 맞아 /김상목

‘내일’이 없는, 술 권하는 세상을 부유하는 청춘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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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국민소득 3만 불 시대,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을 떠올린다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

한국과 일본에서 10년여 전쯤 화제가 되었던 소설이 있다. 고바야시 다키지(1903~1933)의 “게공선”, 1929년 당시 일본제국의 노동탄압과 군국주의에 저항하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졌지만 곧 사장되었던 이 소설은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워킹 푸어’, ‘사회양극화’ 등이 사회적으로 화두가 됐던 당시 일본과 한국에서 뒤늦게 인기를 끌었다. “게공선”은 당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통조림 산업을 위해 게잡이 어선과 통조림 가공공장을 합쳐놓은 대형 선박을 뜻한다.

“게공선”은 노동법도, 선원법도 제대로 적용받지 못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가득 싣고, 무자비한 구타와 욕설, 이를 뒷받침하는 일본군대의 일방적인 사용자 비호, 러시아 영해를 침범하는 위험에 폭풍과 열악한 의식주라는 극악의 환경에서 신음하다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키는 과정을 간결하게 논픽션처럼 서술한다.

노동자들의 봉기를 다루고 있지만,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들 군상은 불결하고 나약하며 인생종착역으로 추락한 이들에 불과하다. 동시기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도 대두했던 카프 문학과 궤를 같이하는 묘사는 계급적 단결로 귀결하지만, 그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무덤에 묻힌 것 같던 “게공선”이 유행한 것은 1929년 당시와 80년이 훌쩍 지난 21세기 초반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문제의식에 기인한 것이다. 잘나가고 있던 일본제국의 호황기에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들은 비참함은 19세기 후반 대영제국 시절 런던의 하층민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국부는 넘쳐나는데 착취 받는 식민지인도 아닌 영국과 일본의 ‘내지인’(당시 한국인과 구분하기 위한 호칭, ‘내선일체’의 그 ‘내’) 역시 빈곤에 시달리고 있던 것이다. IMF 구제금융을 벗어났지만, 비정규직과 양극화 문제가 심화되던 2008년 당시의 사회상이 겹쳐보였던 것이리라. (2008년은 바로 자칫 대공황으로 갈 수 있었던 세계금융위기와 월스트리트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3월7일 극장개봉을 앞둔 영화 “내가 사는 세상” 또한 “게공선”이 소개된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이 옛날 소설이 주목받았던 몇몇 초점과 여전히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1. 왜 주인공들은 “게공선”의 등장인물처럼 저항하지 않는가?

주연배우들의 실명이기도 한 ‘민규’와 ‘시은’은 일용직과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전후의 ‘불안정’한 커플이다. ‘민규’는 전자음악 뮤지션을 꿈꾸며 밤에는 클럽에서 음악활동을 하고, 낮에는 퀵서비스 기사로 거리를 질주한다. ‘시은’은 선배의 미술학원에서 보조강사로 일한다. 이들이 동거하는 공간은 또래 세대가 부모를 벗어나 얻는 가장 일반적인 주거형태인 원룸이며, 그들의 주변은 노동조합이나 노동관계법보다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선배나 지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시은’은 착해빠진 ‘민규’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불만을 품고 있지만, ‘시은’ 또한 미술학과 선배인 학원장에게 제대로 처우를 요구하지 못한다. 노조의 거리상담을 받아 어렵게 체불임금을 받아내지만, 그 대가로 일자리를 잃는다. ‘선배’로 호칭되는 사회적 관계는 일이나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권리를 주장하기 힘든 환경을 굳어지게 만든다.

이들에게 법과 노조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민규’와 ‘시은’은 집세를 내고, 밥을 먹고, 꿈을 위한 최소한의 투자를 해야 한다. 그리 여유가 없어 보이는 부모세대들에게 의지하기도 힘들다. 이들을 ‘착취’하는 선배나 관리자들 또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악을 저지르거나 자기 합리화하는데 가깝다. ‘민규’가 다른 퀵서비스 기사 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얻더라도 임금 미지급 관행이 있거나 없는 정도 차이일 것이다. ‘시은’이 학원을 그만두려 했던 결정적 이유, ‘서울학벌’이 없기에 그만두거나 결국 선배가 강요한 ‘새끼강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노력의 배신’은 사실 이들에게 이미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음악과 미술이라는, 문화예술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가진 것 없는 청춘남녀는 꿈을 포기하거나 최하층으로 정해진 구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외에 특별한 수가 없어 보인다. 하다못해 다수가 균일한 조건에서 일하는 공장이나 회사라면 노조를 만들거나 요구를 걸고 싸워볼 수는 있겠지만, 소규모 일용직, 혹은 인간관계에 의지한 가내수공업적 사업장에서 그런 싸움은 요구 관철은 차치하고 인간관계의 파멸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몇만 원 받겠다고 퀵서비스 업체 관리자가 적반하장으로 소리 지르듯, ‘너 이 업계에서 발 못 붙일 줄 알아!’라는 협박이 실제 공포인 현실에서 주인공들은 사실상 비극의 주인공 티켓이 예정된 것이다.

불안정한 조건, 합리적 기준보다 인간관계나 업계 관행에 강박되는 환경, 대규모가 아닌 소수의 상시 채용과 이직이 일상화된 21세기의 신규 노동시장 구조는 머리띠와 작업복으로 상징되는 IMF 이전의 단결투쟁 모델과는 동떨어져버린 지 이미 한 세대가 지난 셈이다.

그래서 “내가 사는 세상”은 피상적으로 볼 때는 그저 구질구질하고 의욕 없는 청춘 군상들을 ‘비정규직 세대’로 포장해 보여주는 밍숭맹숭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재미없는 독립영화로 비치겠지만, 현재 청년세대의 위치와 한계에 대한 풍경화로 완성됐다.

2. “내가 사는 세상”이 보여주는 대구경북 청년세대의 군상극

최창환 감독은 대구경북지역을 떠나지 않고 노동문제를 배경으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왔다. 지역의 신진 독립영화감독들과의 협업에도 힘을 기울이는 감독의 신작인 “내가 사는 세상”은 청년 비정규직 세대의 암울한 초상을 잘 담아냈음은 물론, 사회적 통찰력 측면에서 돋보이는 장점이 많은 작품이다.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서 비용 절감을 위한 방책으로도 활용된 인위적인 흑백화면은 장편영화로 완성된 본 영화에 집중하는데 시각적 피로가 되기도 하지만 작품이 갖는 씁쓸한 정서를 살리고 있다.

21세기 청년노동의 현주소를 짚어내기 위해 선택한 문화예술노동 영역의 강조는 흔히 노동문제를 제기하는 독립영화에서 다루지 않지만, 분명히 노동영역에 속하는 분야를 주류 노동담론에 편입시키려는 감독의 시각이 진하게 반영한 부분이다.

아울러 대구시민이라면 너무나 익숙할 몇몇 장소들은 타 광역시도에 비해서도 하위권에 속한다는 지역의 청년실업과 노동권 문제를 상기시키는 작용을 확실히 해줄 것이다. 아쉬움이라면 안정된 기반이 없는 지역의 영화 제작 환경에서 제작진을 지역 내 인력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점이다.

두 주연배우는 근래 한국독립영화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지역 감독들의 작품에도 자주 출연해 영화 속에서 자연스레 잘 녹아들고 있지만, 조연급 배우들의 경우 전문배우들을 구하기 어려워 스태프가 1인 다역을 맡거나 지인들이 투입됐다. 이 부분은 한국독립영화 전반에서 공통되는 부분이다. 물론, ‘환경이 좀 더 안정적이었으면 더 뛰어난 작품으로 완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푸념에 가깝다.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후원금으로 최초 제작비를 충당하고, 후반작업을 위해 다시 소셜펀딩을 해서 비용을 마련했던 “내가 사는 세상”의 조건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 구조가 계속돼야 하는가’라는 항의에 가까운 셈이다.

3. ‘노동영화’라는 범주의 확장으로 보는 “내가 사는 세상”

세계적인 노동영화의 거장 영국의 켄 로치 감독은 여전히 노동문제를 다룬 작업을 계속하지만 늘 패배하거나 해고당하거나 개인의 우연적인 성공으로 그치는 이야기들이다. 왜 켄 로치 감독은 노동자들, 노동조합에 힘이 날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이는 비슷한 문제의식이나 과거 경력을 가진 다르덴 형제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도 관련된 부분이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특히 노동문제를 다루는 감독들은 노동영화는 더욱 그래야 한다는 공통적인 신념을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노동문제는 전 지구적으로 가지는 공통점과 함께 각 사회의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환경과 결합해 엄청나게 다채로운 풍경을 보인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과 ‘노동의 소외’는 결정적으로 공유된다.

한국의 ‘노동영화’는 여전히 1990년대 초반 “파업전야”를 희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조직이 회사와 싸움에 나설 때 ‘승리적 결말’을 담아서 “부흥회”가 가능할 영화를 찾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오랜 정체, 혹은 지난한 패배를 겪는 세상에서 ‘판타지’로서 노동문제를 대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 창작자들은 무수한 고민을 갖고 작업에 임한다. 노동영화를 우직하게 놓지 않은 창작자들은 “파업전야”의 전설 이후 사반세기 동안 다양한 실험과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작업들을 선보여 왔음에도 노동조합과 그 구성원들은 실험을 거듭하는 노동영화의 현 세대와 단절되어 있다.

‘이것이 왜 노동영화가 아니란 말인가?’라고 반문하고 싶은 지점이다.

“내가 사는 세상”은 2019년 현재 새롭게 등장한 것도 아닌, 상당수의 요즘 세대가 이미 겪고 있는 현실의 노동문제이지만 간과되거나 놓치고 있는 지점에 대한 영상기록화의 일환으로 주목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물론 대학 4학년 취업동아리나 스터디 모임의 풍경이 조금 더 보편적인 면모이긴 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흔히 노동문제로 인정받지 못하던 영역을 끄집어냈다는 점에서 상당한 장점이 있다. 지난해, 지역을 배경으로 청년세대의 군상을 담아내 주목받았던 “수성못”(2017년 제작, 2018년 개봉, 유지영 감독)이 ‘지역’적 배경과 ‘청년세대’를 결합했다면 “내가 사는 세상”은 ‘청년세대’의 ‘노동문제’를 ‘지역’적 풍경 위에 펼쳐낸다. “수성못”이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세대 등 노동문제를 배경으로 활용했다면 “내가 사는 세상”은 노동영화로서 문화예술분야나 지역 특성을 배경으로 활용하는 영화라 하겠다.

4. ‘판타지’적 해피엔딩이 아닌, ‘암울할지언정’ 리얼리스트가 되자

“게공선” 소설로 다시 돌아가면, 열악한 환경에서 생산량을 강요당하던 노동자들에게 찰나의 휴식과 보급이 이뤄진다.

“밤이 되었다. ‘일만 상자 축하’를 겸해서, 청주와 소주, 오징어, 야채조림, 담배, 캐러멜이 모두에게 나눠”지고 변사가 영화를 틀어준다.

“일본 영화는 가난한 한 소년이 ‘낫토 장수’, ‘신문팔이’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공장에 들어가 모범적인 직공으로 일하다가 특별히 등용되어 큰 부자가 되는 영화였다. 변사는 대사에 없었지만 이렇게 덧붙였다. ‘참으로 근면이야말로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고 무엇이더란 말이냐!”

“거기에 잡일꾼들은 ‘진지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어업노동자와 선원들 가운데 이렇게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다. ‘거짓말쟁이! 그렇다면 나는 벌써 사장이 돼 있어야 하잖아!’ 그러자 다들 크게 웃음보를 터트렸다. 마지막으로 회사 소속의 공장과 사무실을 비췄다. ‘근면’하게 일하고 있는 많은 노동자를 보여줬다. 영화가 끝나자, 모두는 ‘일만 상자 축하 술’에 취했다.”

소설 후반에서 계급의식을 자각하고 봉기를 조직하는 이들은 진지한 박수를 쳤던 잡일꾼이 아닌, 고함치던 어업노동자들이었다. 현실의 불합리를 개인의 노력 탓으로 돌리는 회사의 ‘선동’은 이 소설이 등장한 지 90년이 지나 수십 배는 더 우리의 일상을 포위하고 있다.

변사가 구닥다리 홍보영화 몇 편 틀어주던 1929년에서 TV 드라마, 뉴스, 유튜브 채널까지 입체적으로 가치관을 주입하고 거짓 정보를 펼친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노동에 대한 공격과 소외는 뿌리 깊고 막강함을 부정하면 안 된다. 부동산에 대한 욕망이 단순히 강남 땅 부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저 평생 고생해서 집 한 채 겨우 장만한 부모세대 전반에 세뇌처럼 주입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하듯이, 악덕 사용자에 맞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단결해 싸워 이기는 판타스틱 노동영화를 보고 갑자기 노조에 가입하거나 머리띠를 묶는 경우는 잘 없다.

“내가 사는 세상”의 ‘민규’와 ‘시은’처럼 숨죽이고 흐느끼지만 체념하고 떠나길 반복하는 작금의 비정규직 청년세대들이 단지 집권당의 유력정치인 표현대로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어서’ 저렇게 무기력하고 의기가 없다고 보면 영영 그들과 만날 수 없다. 같이 울어주고 곁에서 토닥거려주며 차근차근 이야기 나눠야 한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런 새로운, 이미 한참 전에 시작했어야 할 기나긴 세대 간의 대화를 위한 좋은 재료가 될 것이다.

P.S. 2019년 3월 7일(목)에 개봉한다.

[작품정보]
내가 사는 세상 Back from the Beat (2018)
드라마|한국|2019.03.07 개봉|67분|12세이상관람가
(감독) 최창환 (주연) 곽민규, 김시은
19회 전주국제영화제(2018) CGV아트하우스 – 창작지원상
18회 전북독립영화제(2018) 국내경쟁
13회 런던한국영화제(2018) 인디 파이어파워 초청
44회 서울독립영화제(2018) 새로운 선택-장편 초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