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20대 여성들은 정치를 했다 / 김자현

12:18

또 감성 타령이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 국민주권분과에서 문제적인 보고서를 하나 내놨다.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 요인 분석 및 대응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였다. 여기서 특히 사람들의 공분을 산 부분은 “20대 여성은 민주화 이후 개인주의, 페미니즘 등의 가치로 무장한 새로운 ‘집단 이기주의’ 감성의 진보 집단으로 급 부상했다”는 부분이었다. 개인주의와 페미니즘의 가치가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판받는 것도 우습지만, 무엇보다 화나는 건 사실 ‘감성’이라는 부분이었다. 왜 하필이면 ‘감성’이라는 말이 쓰인 걸까.

이의를 제기하는 상대방을 꼼짝 못 하게 하는 데는 몇 가지 고전적인 방법들이 있다. 그중 가장 클래식한 것이 바로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에 대해서 논쟁하기도 전에, ‘너는 그 주제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선을 긋는다. 이 ‘말할 자격’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가 이성의 여부다. 이렇게 짜여진 판에서는 먼저 흥분하는 사람이 지게 되어있다. “너 지금 너무 감정적이다”. 이 말 한마디로 논쟁은 없었던 일이 되며 지적당한 사람은 일단 잃어버린 이성을 먼저 찾아와야 하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감성이나 감정이라는 말은 논쟁의 장에서 오래도록 ‘무논리’의 다른 말로 통용돼왔다. 보고서에 등장한 ‘감성’이라는 말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이 내용이었다.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표현은 아주 오랫동안 여성들의 입을 틀어 막아온 상투어구다.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낸 여성들의 태도를 두고 ‘감성’이라 표현하는 걸 정부보고서에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 한 해 여성들의 주장이 ‘집단 이기주의 감성’이라고 표현할 만큼 비논리의 영역에 있었나? 지난해 여성들이 주장한 것은 불법 촬영 근절, 디지털 성범죄 근절, 직장과 학교에서의 성폭력과 성희롱의 단절, 경제 영역에서의 성평등 등이었다. 불법 촬영 근절 건을 예로 들어보자. 불법 촬영 범죄는 대검찰청이 집계한 건수만 해도 2017년 6,632건에 달하는 우리 사회의 악성 종양이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소속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가 반 년 만에 2만 건의 영상을 삭제할 만큼 불법 촬영은 거대한 문제기도 했다. 통계로도 잡히는 사회 문제를 온몸으로 겪은 여성들이 현실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 것이 작년 여성 시위의 핵심이다. 거기에 응답한 것이 ‘사이버 성폭력 특별단속’ 등의 정부 대책이었다.

무엇보다, 정치적 행동이 감정에서 시작하는 일은 나쁜 일인가? 혜화역 시위를 추동한 것은 감정이 맞다. 그러나 모든 정치는 감정에서 시작한다. 정의감, 분노도 모두 감정이다. 사람들은 고(故) 김용균 씨와 유가족의 고통에 공감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분노를 느꼈다. 그 분노가 촉발한 시민 행동이 ‘김용균 법’이라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윤창호 법’이나 ‘태완이 법’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의 이름을 앞에 안은 이 법들은, 피해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거기서 느꼈던 시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잊지 말자는 의미도 어느 정도 담고 있다.

역할이 지나치게 커지지만 않는다면 정치에서 감정은 문제를 발굴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구체화하며, 입법될 때까지 이슈를 유지하는 주요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여성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들을 저토록 한없이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에 비해서, 20대 남성들은 “경제적 생존권과 실리주의를 우선시하면서 정치적 유동성이 강한 실용주의 집단으로 변화”한 주체로 그려진다. 그렇게 표현해도 된다. 다만 여성들이 아무리 열정적으로 사회문제에 임하고, 문제를 냉철하게 파악해서 정책적인 해결책을 정부와 입법부의 코앞까지 들이밀어도 기껏 듣는다는 소리가 ‘집단 이기주의’나 ‘감성’이라는 점에 또 다른 분노를 느낄 뿐이다.

기왕 정치세력화됐다고 쓴 김에, 그렇게 비겁하게 표현하지 말고 20대 여성들도 정치 주체의 하나로 이제 그만 인정하는 게 어떨까. 20대 여성으로서 말하건대, 우리는 작년부터 지금까지 논리를 가지고 아주 열정적으로 정치를 했다. 보고서만이 그 현실을 못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