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다시 생각하는 후쿠시마

18:49

후쿠시마 사태가 일어난 지 8주년이 되었다. 실로 엄청난 인류적 재앙이 남긴 상흔이 여전한 가운데 탈핵을 염원하는 행사가 여기저기서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전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이어졌다.

후쿠시마와 관련한 기사들도 연일 쏟아져 나왔다. 후쿠시마 사고 처리 비용이 828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지난 2년간 300톤에 달하는 오염수가 누출되었음에도 도쿄전력은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계속해서 방류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와 함께 후쿠시마산(産) 수산물 수입 제한 조치에 대한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은 국내 언론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후쿠시마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후쿠시마 사태는 인류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원전 폭발의 순간만이 아니라 사후 수습과정을 지켜보던 전 세계인들은, 원자력 안전에 관한 한 선진적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일본의 몰락에 경악했다. 미국의 스리마일과 구소련의 체르노빌에서 일어났던 원전 사고가 인류에게 던진 질문과 교훈은 현실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토록 위험한 원전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2016년 3월11일 원전사고 5년 후의 3월 11일. ⓒ도요다 나오미

스리마일과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미국과 구소련 정부는 끔찍한 사태를 축소하기에 바빴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제때 대피하지 못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후쿠시마라고 해서 결코 다르지 않았다.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고, 자신들이 자랑하던 안전 시스템은 결코 작동하지 않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사람들의 육성을 통해 버림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핵발전소 폭발 이후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졌지만, 농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 못했다. 일부는 그곳에 남아도 문제없다는 전문가들의 거짓말에 속아 죽음의 땅에서 끔찍한 참변을 당했다.

당시 소련 정부는 사고 전까지 비옥했던 이곳에서 계속 농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주민들을 속였다. 작가는 사고 수습에 투입되었던 군인, 소방대원, 헬기조종사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무책임하고 참혹했던 상황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들은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안전조치도 갖추지 못한 채 치사량을 훨씬 초과하는 방사능에 피폭됐다. 피폭된 사람들은 방사능 오염물로 취급되어 국가와 사회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다.

체르노빌 이후 원자력의 가공할 위험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높아졌지만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원전이 축소되기는커녕 꾸준히 확산됐다. 국가주의, 경제성장제일주의에 포박된 권력자들은 체르노빌 이후에도 탈핵과 반핵을 주장하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대 이익집단인 원전마피아들에게 힘을 실어준 결과 원자력은 가장 지배적인 에너지원이 됐다.

이들은 늘 원자력이 저렴하고,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심지어 심각하게 부실하고 노후화된 원전조차 안전에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포장해 왔다. 원전마피아들이 가장 힘을 기울이는 일이란 바로 원자력을 미화하여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 명예교수인 돈 피츠는 원자력 안전 신화는 증명되지 않은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가정은 첫째 지금까지 원전사고는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3개 핵발전소 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적이 없고, 둘째 방사능이 누출된 것은 원전사고 때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기록되고 보고된 크고 작은 원전사고만 해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으며 방사능은 우라늄 채굴, 정련 과정과 핵발전소의 운전 과정, 핵폐기물 저장 과정 등 모든 단계에서 방출되고 있다.(≪녹색평론≫132호)

끝나지 않은 재앙, 끝나지 않을 재앙

▲원전사고로 인한 어린이 갑상선암의 증가 ⓒ도요다 나오미

지난 8년간 후쿠시마는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후쿠시마는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남아 있다. 방사능 제염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아니 원전사고의 특성상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완전한 제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정부의 은폐 노력에도 후쿠시마는 현재진행중이다. 한술 더 떠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후쿠시마의 재앙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후쿠시마는 일본, 혹은 일본의 동쪽에 위치한 한 지역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후쿠시마는 이미 동아시아를 넘어서 원전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세계를 표상하는 기호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자국의 변방에 위치한 후쿠시마의 고통과 희생을 발판 삼아 다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아베 정부는 2020년에 열리는 도쿄올림픽의 주제를 ‘부흥’으로 삼고 원전 참사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아우성이다. 이러한 사실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일본 정부는 도쿄올림픽 경기 중 일부를 후쿠시마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고, 최근 올림픽 성화 릴레이를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20여km 떨어진 곳에서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경향은 후쿠시마 참사가 일어난 직후에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원전 가동을 시간이 갈수록 점점 확대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후쿠시마’라는 참혹한 사태에도 꿈쩍하지 않고 기존의 원전정책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체르노빌 이후 소련이 보였던 모습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재앙은 이들 두 국가와 정부에게는 잠시 잠깐 지나가는 시련에 불과한 셈이다.

원전을 고수하려는 일본 정부의 배후에는 강고한 원자력 권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나라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아가는 자국민의 희생을 볼모로 또다시 원자력의 부흥을 꾀하고 있다. 원자력 권력이 추구하는 바는 명백하다. 에너지 산업의 주도권을 되찾아 막대한 이익을 점유하는 것이다.

원자력 권력의 토대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이다. 성장제일주의는 필연적으로 에너지의 팽창을 요구하며 이에 가장 합당한 에너지는 결국 원자력이다. 에너지의 원천이 나무에서 석탄, 석유 그리고 원자력으로 옮겨가면서 에너지산업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돈 피츠는 이를 두고 “원전은 성장을 위한 성장을 강요하는 사회적 관계의 물리적 표현”이라고 말했다.

원전마피아들은 이러한 속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이들은 이 시대 사람들이 뿌리 깊이 젖어 있는 ‘성장’ 신화를 교묘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마치 원자력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되지 못할 것처럼 떠든다. 이들은 원전이 없다면 전력이 끊길 것이라는 극단적 위협을 통해 원자력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려 할 것이다. 에너지원의 고갈이나 생태계의 훼손은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들은 기후변화라는 지구적 위기조차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논리로 변용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에너지 권력을 쥐고 흔드는 한 재앙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생각하는 후쿠시마

후쿠시마 사태는 우리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고, 제거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흔적을 남겼다. 후쿠시마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가 되었지만, 인류가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짓의 표본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핵발전이 계속된다면 스리마일이 그랬던 것처럼, 체르노빌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후쿠시마의 재앙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역사는 반복될 것이라고.

인류사회는 왜 스리마일 사고가 일어났을 때 원자력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체르노빌 사고에서 왜 우리는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했는가? 에너지 사용이 축소되면 인간의 삶이 황폐해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왜 버리지 못할까? 왜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오늘의 거짓 풍요와 안락을 위해 다 소진하려 하는가?

만일 우리가 후쿠시마가 전하는 교훈과 메시지를 또다시 망각한다면 이젠 정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후쿠시마의 통곡에 귀를 닫는다면 우리들이 사는 곳 이곳이 바로 후쿠시마로 변할 것이다. 지금 우리와 후대 사람들의 운명을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언젠가는 실효를 상실할 것이 틀림없는 운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전은 결국 멈춰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일본의 한쪽에 위치한 후쿠시마 주민들의 희생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기리는 최소한의 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