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과 함께] ② 1966년의 이상한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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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10:47 | 최종 업데이트 2019-06-07 23:01

[태일과 함께] ② 1966년의 이상한 결심

전태일의 흔적을 찾아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다. 오후 1시, 광장의 인파 속에서 문득 재미난 생각이 들어 옛 서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재크의 콩나무처럼 하늘을 찌르는 건물들을 마음속에서 왼쪽으로 지워나간다. 세브란스, 한진, 주택금융공사, 에스원... 하늘이 낮아지고 산이 높아진다. 이번엔 오른쪽이다. 벤츠, 엘지, DB생명보험을 지운다. 멀지 않은 남산 기슭의 낮은 판잣집들 사이로 사람들이 오간다. 돌아서서 새 서울역을 지운다. 옛 서울역은 남겨둔다. 고풍스런 옛 서울역 옆으로 중앙시장 채소전이 보인다. 만리동 염천교 다리 밑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올라온다. 후끈한 지열로 달아오른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들 속에 구두통을 매고 걸어가는 전태일을 상상하며 그 시대의 ‘일’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거리는 나의 무대
1964년, 열일곱 살 가출 청년 전태일은 돈을 벌어야 했다. 보호시설에 맡긴 막내 순덕이를 찾아와야 한다. 길에서 동냥하던 동생 태삼이를 우연히 만났지만, 어머니와 가족들은 모두 흩어져 있다. 그는 서울 바닥에서 밑천 없는 청년이 ‘몸’ 하나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였다. 낮에는 구두를 닦고 저녁에는 신문을 팔았다. 한밤중엔 야경꾼을 피해 명동 뒷골목을 쓸고 다니며 바닥의 꽁초를 주워 새 담배를 말아 팔았다. 빈병 줍기, 껌팔이, 휴지팔이는 물론, 비가 오면 우산을 떼어 팔았고, 날이 더워지자 하드를 팔고 ‘뒤밀이’를 하였다. 각종 물자가 부려지는 서울역에서 물건을 싣고 동대문시장까지 가는 손수레를 밀어주고 30원을 받았는데, 한번 하고 나면 온몸에 김이 날 정도로 땀이 흥건했다. 윗옷은 때에 절어 색이 변하고, 이는 누렇고 찝찝한 황금니였다. 잠은 대한문 앞이나 중앙시장 채소전 지푸라기 위에서 잤다.

상률 엄마의 도움으로 다시 만난 어머니는 식당 주방에서 일하다 하혈하고 쓰러졌다가 천천히 회복 중이었다. 여름 무렵에는 중부시장 좌판에서 수제비를 먹다가 동생 순옥이를 우연히 만나 부둥켜안는다. 순옥이와 아버지도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태일이네는 길고양이들처럼 대도시의 ‘부스러기’1로 연명하며 서울 시장통 여기저기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술을 끊고 일하겠다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도 어머니의 망설임과 각자의 형편 때문에 바로 모여살지 않고 1965년 말경, 여기저기 노숙하면서 번 돈을 합친 끝에 남산동 50번지에 셋방을 얻어, 차례차례 모이게 된 후에야 천호동 보육원에 있던 순덕이도 데려올 수 있었다.

▲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한뎃잠을 자며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일을 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찍은 사진. [사진=전태일재단]

기술자를 꿈꾸던 태일, 그늘을 보다
평화시장 학생복 맞춤집 삼일사의 ‘시다 구함’ 광고를 본 것은 동생과 구두통을 메고 다니던 길에서였다. 다음 날 면접에 합격한 태일은 이제 월급받는 기술자가 되고 싶었다. 첫 월급 1500원. 일당으로 치면 하루 하숙비 120원에도 못 미쳤지만, 태일은 미래를 생각했다. 기술을 배워 하루속히 돈을 벌고 하다 만 공부도 이어가고 가족들이 모여 살 기반을 만들고 싶었다. 부족한 수입은 추가 노동으로 채웠다. 새벽에 여관에 가서 구두를 닦고, 밤늦게 껌과 휴지를 팔아 돈을 버는 쓰리잡의 생활을 몸 하나로 버텼다. 어머니의 채소 행상이 어느 정도 자리잡고, 남산 기슭에 모여 살 즈음에는 아침과 밤 알바를 하지 않고 평화시장 일만 하게 되어 홀가분했다.

기술이 좋은 태일은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싱보조로 올라가 월급 3,000원을 받았다. 1966년 추석 대목을 앞두고는 아동 막바지를 만드는 통일사에 ‘미싱사’로 취직해 월급이 7,000원으로 올랐다. 재단사들은 15,000원~30,000원까지 받던 것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로도 태일이네 살림에는 한결 윤기가 돌았다. 그렇다면, 거리에서 연명하던 태일이 번듯이 취직해 중급기술자가 된 1966년은 어떤 해였을까?

당시에는 ‘경제 성장’이 유일하고 배타적인 국정 목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1월 연두 교서에서 국민들에게 밝고 명랑한 사회분위기를 만들고 생산에 기여하는 인간을 개발해 ‘조국근대화’를 달성해야 한다며 1970년대 후반에 도래할 풍요로운 ‘대량 소비 시대’를 약속하였다. ‘수출 아니면 죽음’이라는 처칠의 구호를 인용한 1965년의 연두교서에서 한발 더 나아간 주문이었다. 대다수 국민들도 우선은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산업 역군’으로 호명된 ‘근로자’들은 근면과 절약을 몸에 익히고 저임금 장시간의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면을 살펴보자. 당시 한국은 사실상, 원조경제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필요한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베트남에 대규모로 파병을 하고, 경제적으로는 일본과의 굴욕 협정으로 유무상 원조를 받았지만, 일본 산업의 후방기지로 편입된다. 대기업들은 전쟁특수를 누리고 정치자금을 청와대에 상납하면서 각종 특혜를 받으며 성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풍부한 노동력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동원되며 종속적 경제성장의 거름이 된다. ‘근로자’들은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 ‘산업역군’으로 칭송되었지만 끝없는 성장 목표에 동원되었다.

한편 1963년 설립 이후 노동청장은 10명 중 7명이 경찰 간부 출신이었고 중앙정보부와 경찰이 적극 협조해 노동 현장의 불만 표현을 철저하게 불온시하고 통제했다. 한국사회의 이른바 ‘오직 먹고사니즘’은 이렇게 국민들에게 좁은 시야를 강제하며 삶의 배타적 원리가 되었는데 분단사회의 남북 적대적 분위기 속에 사상과 언론의 자유는 과도하게 통제되었다. 박정희는 비록 군복을 벗었지만, 군대식으로 사회를 통치해 사회 곳곳에 일사불란하게 군대문화가 스며들었다. 기업은 겉으로는 직원을 가족처럼 대한다는 가족주의를 내세웠지만 비관용적이고 경직된 가부장적 폭력 문화가 일터를 장악했다. 경제성장의 그늘 아래 한국사회의 이런 고질적인 병폐들은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로서 작동하고 있다.

평화시장으로 돌아가보자. 태일은 이제 제 식구 생각만 하고 살면 먹고 살 수 있는 미싱사가 되었지만 마음은 점차 억울함과 괴로움으로 채워져갔다. ‘미싱사’는 10대 중반~20대 초반의 여성들, 미싱사를 보조해 한 팀을 이루는 ‘시다’는 대부분 10대 초중반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태일의 누이 전순옥과 당시 여공 신순애에 따르면, 그 당시 평화시장을 비롯한 의류공장 시다 여성들의 일은 대부분 집안의 남자 형제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한 희생 노동의 성격을 띠었다.

공장에서 이들은 발언권이 없었다. 작업 시간, 연장 근무 여부, 휴식, 옷 한 장당 단가 등 모든 결정은 사장과 재단사가 독점했다. ‘일은 시키는 대로 월급은 주는 대로’가 진리였다. 당근 없는 채찍의 시대였다. 시다들은 미싱사가 받는 돈에서 일부를 떼어 받았기 때문에 방값을 아끼느라 통풍이 안 되는 공장 다락에서 생활하였다. 온종일 먼지 속에서 사느라 각종 호흡기 질환과 안질, 근골격계 질환, 빈혈, 위장병에 시달렸다. 건강검진은 없었으며 시늉으로 몇 명만 엑스레이 필름을 빼고 촬영하고는 끝이었다. 다들 아프니까 아픈 게 당연한 것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아파도 피를 토하기 직전까지는 그것을 아픈 것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치료받을 시간과 돈, 치료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평화시장 여공들은 시집가도 한 3년밖에 못 써먹는다는 말이 유행했다.

▲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 시다, 미싱보조들과 함께(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전태일) [사진=전태일재단]

이에 더해 여공들은 사장과 재단사들의 상습적인 욕설과 폭력에 시달렸으며 화장실 가는 데도 눈치가 보였다. 갈증을 참고, 점심을 건너뛰어 허기진 배가 접히면 오후에 꾸벅꾸벅 졸았고 그 무엇보다 노동의 고통에 더해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린 소녀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야식으로 삼립빵 하나 나오지 않는 하루 15~6시간 노동의 대가는 어디로 갔을까?

소자본으로 시작한 사업주들이 2~3년 내에 사업을 10배 정도 불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소녀들의 노동이 초과 착취되는 동안 사업주들은 이윤을 독점하였다. 평화시장 물건은 서울물건으로 유명해져 ‘만들어놓기만 하면 모두 팔린다’는 말이 돌 정도로 전국적으로 팔려나갔다. 사업주들은 신당동에 호화 주택을 장만하였다. 이것이 태일이 취직해 중급기술자가 된 평화시장의 노동 환경이었는데, 이 현실을 몸소 체험한 태일은 ‘멍들어가는 어린 동심을 보며’ 깊은 번민에 빠지게 된다.

눈먼 사회의 ‘일하다 죽는 회사’
대전의 한 마이스터고 학생 김동준 군은 2013년 말에 충북 진천에 있는 CJ 식품공장으로 현장실습을 나갔다. 대기업이라고 칭찬과 박수를 받았다. 전산 전공이라 관련 파트를 원했지만 동준이는 포장육 나르는 일을 하였다. 180센티, 86kg의 건장한 동준은 등짝이 시퍼래진 채로 도망치듯 토요일 잔업을 간신히 빼고 대전에 온 적이 있다.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에 건장한 자신에게 유독 더 주어지는 과중한 일이 힘들었다.

회식하는 식당 마당에서 동기들과 단체로 회사 선임들에게 주먹 쥐고 엎드려 집단 얼차려를 당하고 구둣발에 차이다가 동준은 일어나 항의했다. 돌아온 것은 압도적인 협박과 욕설이었다. 학교에 이 사실을 말하자 담임교사는 현장을 방문하기로 했고, 그 전날 동준은 기숙사에서 몸을 던졌다. 졸업식을 며칠 앞둔 2014년 1월 말이었다. 어머니는 며칠만 참자고 아들을 돌려보낸 자신의 말을 가슴치며 후회했고, 갖은 노력 끝에 회사의 비협조와 방해를 뚫고 산재 승인을 받고서야 목놓아 울었다. 어머니는 ‘일하다 죽는 회사’에 그만 보내야 한다고 거듭 말하며 전국을 다니신다.

군포의 특성화고에 다니던 김동균 군은 현장실습으로 나간 대형 뷔페식당에서 이른바 ‘오마벌칙’에 시달렸다. 2000명 음식을 미리 세팅하려면 1시간 먼저 나오는 두 명이 필요한데, 지각을 한번 하면 바로 이 오픈마감조에 투입이 되었다. 학생들은 이것을 부당한 조기출근과 공짜 노동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당연히 받는 벌이라고 생각했다. 김동균 군의 아버지는 이 ‘오마 벌칙’이 실습생 군기를 잡고 인건비도 절약하는 악질적인 매뉴얼이라며 분노하였다. 수프를 끓이다 입은 화상은 스스로 치료했다. 이듬해 2016년 군입대를 앞두고 파트장의 성추행과 오마벌칙에 시달리던 김동균 군은 요리사 복장 그대로 뛰어나가 사라졌다가 전봇대에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2017년 12월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회원들이 23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서 제주현장실습에서 사망사고로 숨진 고3 고 이민호군의 추모식을 열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2017년 제주 생수공장에서 적재기에 끼여 사망한 현장실습생 이민호 군의 사고 이후로 전국을 동분서주하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민호 아버지는 회사 대표의 집행 유예 판결, 한 달 만에 정상 가동되던 생산라인, 위험한 데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민호가 들어가 변을 당했다는 과장의 거짓에 망연자실했다. 실습생에게 전가된 위험한 일을 하다 사람이 죽었는데 약간의 과징금과 집행 유예처분으로 끝나는 모습을 보고 ‘이게 나라인가’ 생각하였다. 원예 전공인 실습생 민호는 정직원들을 대신해 기계 고장을 손봤다. 주말에 집에 오면 좋아하는 게임도 못하고 잠만 잘 정도로 연장, 야간 등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퇴근해 기숙사에서 쉬다가도 부르면 나가서 일했다. 대표는 사고 이후 자신도 먹고살아야 한다며 생산라인을 어서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고 이후 조기취업형 현장실습제도가 전면 폐지될 듯하더니, 교육부는 최근 오히려 ‘산학일체형 도제학교’를 통한 ‘일학습 병행’식 현장 실습을 더욱 확대하려 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오랜 성장 만능은 이제 취업률 만능주의로 진화하고 있다. 교육부는 ‘학습 중심 현장 실습’을 통해 학생들이 실무를 배우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지난 4월, 도제학교 운영 실태 토론회에 따르면, 사업 계획 취지와 현장의 괴리감은 너무 컸다고 한다. 청소, 허드렛일 등이 대부분이고 학생, 교사들은 회의감을 드러냈다.

한국 기업의 인식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운 점이다. 도제학교에서 실습 나온 ‘근로 학습자’를 기업은 저임금으로 대접할 것이다. 왜, 평화시장이 그랬듯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니 말이다. 관리감독은 글쎄다. 권위적인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는 ‘근로 학습자’를 동료로 대접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위험한 일을 발언권이 없는 ‘근로 학습자’에게 시키기 쉬울 것이다. 일학습병행제가 외쳐온 ‘능력 중심 사회’란 사실 불안한 일자리에 성실히 순종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포장지이다.

이런 경직된 문화 속에 한국 산업 현장은 여전히 최장 노동시간과 최고의 산재 사망 사건 수를 자랑한다. 그런데도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고, 지속적인 저성장의 책임은 서민들의 ‘높은’ 최저임금이 다 지며, 재계는 과로사를 유발할 수 있는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를 줄기차게 요구해 관철시키고, 대기업의 곳간엔 1000조 원 가까운 독점 이윤이 쌓여 있다. 자유로운 한국을 지키자는 한 국회의원은 주당 노동시간을 너무 줄여 경제가 걱정된다며 자신들은 유연한 근무 환경 속에 배지 착용 과시 노동만으로 어마어마한 월급을 챙기고 있다.

태일의 이상한 선택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 장면

1966년 추석 대목 일을 마치고 자리 이동이 많은 10월에 태일은 평화시장 2층 244호 한미사에 재단보조로 들어간다. 7,000원 월급이 3,000원으로 준다는 뜻인데, 당시 어머니는 수제비 행상, 태삼이는 차비 정도 벌고, 아버지는 실직 상태였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시다로, 미싱보조로, 미싱사로 일하면서 태일의 꿈과 시선은 달라지고 있었다. 집안이 어려운 상황에도 절반 이하의 월급을 감수한 선택에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과연 재단사가 무엇이길래 태일은 그 길을 선택한 것인지 질문을 던져두고 오늘은 마친다.

[참고문헌]
아래 책들을 주로 전반적으로 참고해 이 시대의 삶과 연결해 입체적으로 전태일의 삶을 재방송하려 한다.
1.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의 일기, 수기, 편지 모음, 돌베개, 1995(초판2쇄)
2. 〈전태일 평전〉, 조영래, 돌베개, 1990 개정판
3.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전순옥, 한겨레신문사, 2004
4. 〈열세 살 여공의 삶〉 신순애, 한겨레출판, 2014
5. 〈청계, 내 청춘〉 안재성, 돌베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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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일은 1969년 친구 원섭에게 쓴 편지에, ‘덩어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부스러기’도 생기지 않는다며, 그것들이 ‘용해’되어 있는 평등한 사회를 ‘아름다운’ 색깔이라고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