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유월의 바람이 전하고 가는 말 /김수상

11:38

유월의 바람이 전하고 가는 말
– 고은재활요양병원 601호 권오현 박사에게

김수상

오늘은 무슨 일로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숲과 들을 움직입니다
숲은 푸르고 해는 붉은데
푸르지도 붉지도 않고
검지도 아니하고 희지도 아니한
저것은 무엇입니까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겁에 사무칩니다
내 삶은 어리석었으나
투명하고 청정한 마음의 바탕은 그대로 있어
당신과 함께 했던 일들이 꿈처럼 펼쳐집니다

우리는 당신을 권박이라 불렀어요
우리가 못하는 일이 당신에게 가면
마술처럼 기적처럼 이루어졌어요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밤을 사랑해서 늘 마감이 아슬아슬했지만
맡은 일은 어쨌든 정성을 다해 완성해내는
당신은 우리의 맏형 같은 사람이었어요
항상 불편하고 불리한 자리가 당신의 자리였지요
일이면 일
밥이면 밥
술이면 술
책이면 책
당신은 우리들의 해결사였어요

담배도 잊고
술도 잊고
지방선거도 잊고
시의원도 잊고
작가회의 지회장도 잊고
예술도 잊고
평론도 잊고
시민사회도 잊고
당신의 서재에 있는 수많은 책들도 잊고
사랑하는 아들과 딸마저 잊고
601호 병실에서
말간 얼굴로 까만 눈동자만 깜박이고 있네요
오현 샘, 이제는 일어나야지,
귀에다 대고 말하면
입술이 움직이고 눈은 더욱 반짝이는 것을 보니
혼자 꾸는 긴 꿈에서 곧 깨어날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당신의 야윈 다리와 발만 주무르다 오는 일
내가 당신에게 사야 할 밥도 술도
이자가 붙어 수북이 쌓여있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병문안 못 간지도 한참이 되었어요

오현 샘, 권박, 우리들의 맏형!
일어나 봐요
일어나서
1년이 다 가도록 왜 이따위 밖에
일을 못했냐고
우리의 멱살이라도 잡고
소리도 지르며 흔들어봐요

우리들 인생이
허공에 뜬 구름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지만
그래도 당신의 잠은 너무 길어요
당신의 착하고 수줍은 웃음과
당신이 주실 술잔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데
정작 당신은 깊은 잠만 자기인가요

권박,
유월의 솔바람에 새는 놀라고
구름이 흩어지니 산은 저절로 드러나요
당신도 그렇게 이젠 긴 잠에서 깨어나세요
달팽이의 뿔 같은 공명도 물거품과 같고
부귀와 영화도 뜬구름인 걸 이제야 알겠어요
울울창창 저 녹음도 가을이면 안색을 바꿀 것인데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건
우리들한테 내어준 당신의 마음뿐이에요

일어나요, 권박!
일어나 봐요, 오현 샘!
당신은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자는 게 아니라
꿈에서조차 당신의 꿈을 그리느라
또 늦잠을 자고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딸의 저 기도를 좀 들어보세요
아침이에요
새는 울고 바람은 불어요
선거일 막바지에 연설 트럭에 올라
우리 동네를 지나며 목이 쉬도록
민주주의와 시민주권을 외치던
당신의 목소리가 그리워요
우리가 김용락 시인과 함께 먹던
막창 집의 저 구수한 연기와
차고 맑은 소주 좀 보세요
헤어질 때면 늘 남을 배웅하고 자기는 맨 나중에 가는 남자
그래서 정작 자기는 쓸쓸하고 고독했던 남자
일어나요, 일어나 봐요, 어서
선남자(善男子) 권박, 어서 일어나 한잔 하러 가요
인생은 한바탕 꿈
꿈에서 꿈을 깨니 또 꿈
우리는 그 꿈을 앉아서 꾸지만
당신은 누워서 꾸네요
당신이 이렇게 긴 꿈을 꾸는 것은
전도몽상의 이 세상을 바꿀 비책을 준비하기 때문이라는데
일어나요, 권박!
어서 일어나 우리가 함께 꾸었던 그 꿈 이야기 들려줘요
거짓 세상 부숴버릴 꿈 이야기 좀 들려줘요
당신이 들려주실 술자리 야단법석(野壇法席)은 우리가 마련할게요
사랑해요, 권박!
돌아와요, 권박!

 

※ 문학평론가 권오현 박사(56)는 2018년 6.13 지방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대구 달서구 제4선거구 시의원에 출마했다. 6월 14일 새벽, 박빙의 승부를 다투던 개표방송을 보던 중에 뇌경색과 뇌출혈로 쓰러져 두개골을 절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 후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대구 고은재활요양병원 601호에 어린아이처럼 누워있다. 부디 신의 가호가 있어 그가 병상에서 하루빨리 일어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