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한·일 이해득실 구분선은 국경이나 핏줄에 있지 않다 /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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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13:47 | 최종 업데이트 2019-07-15 13:48

쓰고 떠드는 것으로 먹고 살다 보니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대한 얘기를 최근 많이 하게 되었다. 일본의 무역 보복으로 기업이 위기를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업을 보다 배려한 정치경제적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문제다.

또, 한국과 일본의 양국 정부가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쪽 모두 자본을 대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치와 언론이 강조하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공동체 사이의 전면적 대립구도는 허구적인 성격이 있다. 주어진 기회의 한도 안에서 이런 얘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양국 정부와 언론은 서로 간의 민족주의적 대립구도를 자극하고 조장하고 있다. 한쪽에선 기업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문재인 정권이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경제적 위기가 눈앞에 닥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런 주장을 ‘문재인 정권을 비난하기 위해 일본의 편을 드는 행위’로 규정한다. ‘비정상’인 보수언론을 비판하는 자칭 ‘정상적 언론’들이 후자의 논리를 답습하면서 정부와 기업, 국민이 ‘우리편’으로 똘똘 뭉쳐 ‘상대편’인 일본의 ‘경제 침공’을 막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7월 16일, 서울상인연합회, 한국마트협회 등 중소상인 자영업자 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일본제품 판매 중단 확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그런데 일반 국민들 사이에 강하게 형성된 반일 여론의 경우는 이러한 상층부 정치의 논리와도 결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정부 여당에 속해있거나 이를 지지하는 명사들이 ‘21세기 독립투사’로 변모해 우국충정을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지난 9~11일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5명을 조사한 결과를 잠시 참고해보자. 이 조사 결과 일본에 호감을 나타내는 응답자는 전체의 약 12%에 불과했다. 이런 흐름은 대부분의 연령 지역에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다만 고령일수록 또 자유한국당 지지 성향이 강할수록 이 사태의 책임이 일본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는 앞서 설명한 보수세력이 애용하는 논리가 위력을 발휘한 덕분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사람’에 대한 호감을 묻는 말에 대해선 젊을수록 호감을 표현하는 정도가 컸다는 것이다. 특히 20대의 경우 일본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는 답변이 51%로 과반 이상이었고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답변은 29%에 그쳤다. 반면 60대 이상 연령층에선 일본인에 호감이 간다는 답변은 32%에 불과했지만,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답변이 51%로 과반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는 세대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좀 더 과학적인 분석과 조사가 필요하겠으나 이런 잡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 입장에선 이 여론조사 결과를 세대별 반일감정의 차이를 논하는 것에 활용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게 자연스럽다. 간단하게 말하면 일본 순사들이 죄 없는 한국인을 잡아다가 괴롭히고 짓밟았다는 식의 반일주의는 젊은 세대에 있어서는 자기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도자와 국가, 민족을 동일선상에 놓는 민족주의는 상당 부분 퇴색됐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등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에 의지를 갖는 정도는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옛날식 반일주의가 퇴색된 자리를 메운 것은 무엇일까?

2015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영화 <베테랑>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 영화는 재벌 3세의 일탈행위에 책임을 물으려는 경찰들의 고군분투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경찰들은 법 집행 과정에서 원칙을 지키고 인권을 중시하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와 자신들을 감시하는 눈길 등의 사회적 규범 때문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빠져있다.

경찰들이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는 방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린 다음 비상사태를 선언해 초법적 권한을 획득하는 것이다. 주인공 형사는 언제나 “이제부터 정당방위다”라고 말한 이후에야 폭력을 사용한다. 사건 수사에 미온적이던 경찰 조직이 적극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것도 경찰이 구체적 ‘피해’를 당한 다음이다. 주인공 형사가 자기 후배가 신체적 상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판이 뒤집혔다며 좋아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즉, 최근 사람들이 온라인 등을 통해 표출하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과거 일제의 식민지 경험에 대한 반발의 연장선이라기보다는 “상대가 나의 이익을 훼손했으니, 나 역시 (오매불망 기다려 온 바로 그대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혀도 된다”는 무제한적 복수 의식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한다. 여기서 판단의 기준은 오직 서로 간의 이해득실만에 한정되며 여타의 대의나 사회 원리, 규범 등은 허울 좋은 껍데기로 전락한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냉소주의적 현실인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 최근 형을 방어하기 위해 자기 부하였던 이를 변호사로 소개한 ‘소윤’을 ‘대윤’이 감싼 사건이 화제였는데, 이런 무제한적 복수의 정신은 이 사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도리는 경찰이 먼저 어겼으니 우리 검찰도 막 나갈 수밖에 없다는, 그런 얘기였다.

사실 “네가 나를 적대하니, 나도 너를 적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21세기의 시대정신 중 하나이다. 예멘 난민에 적대적인 사람들의 주장에서도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결코 무슬림이라는 특정한 정체성을 혐오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거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가짜 난민’들이 ‘진정한 박해’를 당하는 것도 아니면서 단지 경제적 이득을 취하겠다는 목적으로 우리 공동체에 기생(?)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절대로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해야 할 복수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만이 존재하는 이 세계관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대중의 의식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대안적 역할을 자임하는 정치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내려는 노력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조릿대표묘전시관(강제연행자료관. 구 광현사). 왼쪽부터 김용봉 일제강제징용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 도노히라 요시히코 강제연행 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 공동대표 등. 일본에는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시민들이 활동하고 있다. [사진=일제강제징용피해자지원재단]

가령 일본 정부가 외면하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추모비를 만드는 활동을 함께하는 일본인들이 있다.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배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일본 지식인들이 성명을 낸 일도 있었다. 최근 전직 일본 총리가 국내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해 자국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우리 편 일본인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전쟁으로 이익을 본 쪽과 피해를 본 쪽을 구분하는 선은 국경이나 핏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당시 군에 의한 모든 학살과 강제노동과 성폭력 피해자들과 반전 평화의 깃발 아래 같은 편에 설 수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일본의 노동자들과 손을 잡고 마찬가지로 노동자였던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자본을 위해 이용하는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일은 정말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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