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과 함께] ⑩ 오늘도 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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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5 12:55 | 최종 업데이트 2019-09-25 13:08

태일은 먼 길을 걸어 오늘도 온다.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 먹이고 세 시간 걸어 퇴근하던 그 걸음으로 집집마다, 당신과 나의 문을 두드리며 다닌다. 다섯 권의 노트에 담긴 태일의 발걸음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질 뻔했다. 그를 지우려는 이들이 없애려 했지만, 결국 전해져 태일은 우리에게 온다. 글에 담긴 삶의 힘, 남은 이들이 나누어받은 악착같은 생의 의지가 좁지만, 길을 만들었다.

태일의 일기 주요 부분은 면도칼로 잘려나가 있었다. 분신 후 기사에 참고한다며 가져간 조선일보사는 유족에게 나머지만을 돌려주었다. 민첩한 정보기관과 언론사의 공조 삭제였다. 민청학련 수배로 도피 중이던 조영래는 남은 일기를 바탕으로 평전을 쓴다. 이소선, 삼동회원, 평화시장 여공을 만나 인터뷰하며 태일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노트에 빼곡하게 쓴 조영래의 글은 복사기까지 감시하던 경찰을 피해 한 회사원의 도움으로 겨우 복사되어 민종덕의 집 마루에 숨어 지내다가 판로를 찾아나선다. 국내 출판사들이 엄두를 못 낼 때, 1978년 일본 따이마츠 사에서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한국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출간되었다.

돌베개 출판사는 구속을 각오하고 국내 출판을 결심한다. 문익환 목사는 모든 걸 책임지겠다며 지지한다. 1983년,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이름으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출간되자 사람들은 뜨겁게 반응한다. 전두환의 문공부는 바로 판매금지 조치를 내리지만 청계노조 일꾼들은 온종일 책을 전국 곳곳으로 배달했다. 혼신을 다해 배달하다가 평생 앓을 신경통을 얻은 사람도 있다. 그렇게 전해진 평전을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이 읽고 새 세상을 본다. 출판사에는 ‘밤새워 눈물 흘리며 읽었다는 편지와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1

책의 저자는 비밀이었다. 1990년 12월, 비로소 조영래 이름으로 ‘전태일 평전’ 개정판이 발간되는데, 조영래 변호사는 그 며칠 전 폐암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전태일은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 기록은 사라질 뻔하다가, 수배 중에 치열하게 써내려간 조영래의 공책에서 되살아나, 군부독재의 시퍼런 사슬을 뚫고 결국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렇게 배달된 태일의 삶 마지막 장, 1970년 11월에 우리는 도착했다.

11월, 태일과 삼동회의 온갖 노력에도 미싱은 똑같은 여건에서 돌아갔다. 삼동회의 요구는 한국 사정상 들어주기가 어렵다며 뭉개졌다. 10월 15일, 20일, 24일, 11월 7일에 걸쳐 노동청과 평화시장 주식회사의 약속은 미루어지고 시위는 어떻게든 무산되었다. 태일과 친구들은 결국, 13일에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한다. “그날만큼은”이라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11월 10일에 태일은 대구에 간다. 뜻밖의 방문에 동창 김예옥은 의아했지만 반가웠다. 예옥은 1965년 청옥고등공민학교 야간부의 짧고도 소중한 추억을 되새기며 태일을 만났다. 택시를 타고 동촌유원지로 갔다. 유원지 벤치에 앉아 태일은 평화시장의 열악한 상황을 한참 이야기했다. 김예옥은 죽음을 암시하는 태일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고민이 많아보였다. 대구 중앙통에서 떡만둣국을 맛있게 사먹었다.

11일. 태일은 평화시장에 단골로 다니던 국숫집에 가서 이틀 후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했다. 국숫집 딸은 삼동회 일 그만두라고 타일렀으나 태일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어 보였다. 태일은 그날 밤새 자기 방의 물건을 정리한다. 12일. 단정한 옷차림으로 식구들과 아침을 먹는다. 순옥이와 순덕이 머리를 쓰다듬고는 몇 차례 뒤를 돌아보며 집을 나섰다. 그날 밤 여인숙에서 삼동회 친구들과 밤새 현수막을 쓰고 데모를 준비한다.

흐리고 바람 부는 날이었다. 13일 오후, 이전보다 더욱 삼엄해진 경찰 병력을 보며 1시 반경 거리로 나오다가 형사들에게 현수막을 빼앗겨 찢긴다. 1시 40분경, 친구들은 책만 태우고 구호를 외치는 줄 알았지만, 태일은 자기 몸에 기름을 뿌리고 내려왔다. 옷 틈에 기름 먹은 솜을 끼워 퇴로를 차단했다. 계단을 내려온 태일은 친구 김영문을 부르고는 뛰어나가며 몸에 불을 붙인다. 김영문은 1미터쯤 뒤에서 그를 따라 뛰었다. 온몸이 불꽃이 되어 소리를 지르다 쓰러졌다. 친구 최종인이 잠바를 덮어 불을 껐다. 쓰러진 검은 몸으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다시 일어나 뛰어가며 소리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온건한 구호는 생명과 바꾸어 겨우 세상에 전해진다.

태일은 검게 탄 몸으로 몇 시간을 견디다가 밤 10시 넘어 숨을 거두었다. 그때까지 남은 힘을 그러모아 어머니, 친구들에게 확답을 듣고야 만다. 자신이 하던 일을 이어서 하겠느냐는 다그침이었다. 큰 대답을 들을 때까지 그는 계속 물었다. 어머니와 친구들은 눈물을 그렁거리며 그러겠노라고 크게 대답하였다. 그의 마지막 날은 어머니 이소선, 삼동회 친구들, 그 소식에 감응한 노동자들과 대학생들, 마음이 내려앉은 세상 사람들에게 첫날이 되었다. 태일은 고단한 숨을 거두며 이들의 생명 속으로 자기를 쪼개 두루 퍼졌다. 한쪽 눈을 맹인 예술가에게 주고 태일피복 설립 자금 독지가를 얻으려고 편지를 보냈던 태일은 결국, 자신의 온몸을 기증해 사람들의 눈을 열었다. 3년을 달달 외운 근로기준법이 새겨진 온몸을 태워, 사람들 눈에 안 보이던 평화시장이, 그 안의 사람이 보이게 했다.

▲ 전태일 분신 현장

태일의 질문과 세상의 오래된 대답
태일의 죽음은 대답 없는 세상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소선은 아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고쳐주었다. 개인적 이유로 죽은 게 아니라 잘못된 세상에 대한 분신 항의라 말했다. 살아 있을 때는 이루어지지 않던 대화가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태일이 골방에서 써둔 노트의 독백은, 답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으로 사회화되었다.

대통령을 더할 수 있게 삼선개헌으로 정권 연장의 길을 마련한 박정희도 동요하는 민심 앞에, 한 청년의 죽음 앞에 선거를 앞두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역방향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을 축소하고 지우려는 ‘무사유(無思惟)’의 무사(武士)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돈과 권력을 독점하는 자신들의 세상을 지키는 방향으로 뛰어다녔다.

시장 업주들은 태일의 죽음을 개인적 자살로 몰고 갔다. 불만을 품은 깡패가 죽어 가마니로 덮어놨으니 구름다리로 가지도 말라고 말했다. 여공들은 그런 줄로만 알았다. 경찰과 시장 사람들은 태일이 깡패들과 어울리다가 홧김에 자살을 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숱한 철거를 함께 겪으며 살아온 동네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태일이 왜 죽었는지 알았기에,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영안실을 지켰다. 태일이 다니던 교회들은 태일의 죽음을 죄악시하며 교회에서 장례치르는 것을 거부하였다. 생전에 그토록 바라던 대학생들이 찾아와 서울 법대 학생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태일은 6일 동안 영안실에 누워 있었다. 경찰은 이소선에게 시체 양도 증서에 서명하라 강요했다. 친척들에게도 압력이 들어왔다. 시장 대표, 노동청 관리는 300만 원이 든 회색 가방을 들고 와 회사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이소선은 남은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와서는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오히려 가방 속에서 한 줌의 돈뭉치를 꺼내어 공중에 뿌렸다. 이어 아들의 소원을 반영하는 여덟 가지 조건2을 대표들에게 적어주었다. 태일의 누이 순옥은 시다로 일하며 살림을 책임지고, 이소선은 매일 새벽 청계천 거리에서 헌 옷을 팔기 시작했다. 태일의 뜻을 지키고 익숙한 가난을 택했다.

당시 노동청 근로기준국장 임정삼은 훗날 인터뷰에서 태일을 섣부른 이상주의자로 기억했다. 못 배운 재단사가 책을 끼고 온 것을 보고 한자투성이 책을 읽을 수 있냐며 의심했다 한다. 근로기준법을 혼자 파고들면 ‘의식화’될 것이 아니냐며 “당시에 우리 산업현장이 어딜 가도 근로기준법 잣대로 보면, 맞을 곳이 없어요. 외람되지만 공무원은 ‘솔로몬의 지혜’로 임해야지, 법대로 하면 살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라고 했다.

임정삼은 삼동회와의 협상에서 고용주들이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라고 이어 말한다. 그는 사업주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았다. 근로자들이 당장 요구사항이 시행될 듯이 굴면서 자기들끼리 유토피아가 온 것처럼 좋아한 것이라며, 한국 실정상 매주 일요일을 쉴 수는 없었다고 한다.3‘근로기준국장’의 생각이 이랬다. 노동청 간부, 경찰, 중앙정보부원은 모두 이런 무의식 위에 하나가 되어 기업주의 일방적인 이윤과 착취를 ‘어쩔 수 없다’고 떠받쳤다. 권위주의적 국가기구의 파수꾼들이 요소요소 박혀 태일의 발목을 잡았다. 사회악은 너무도 평범하게, 혹독한 노동 착취를 ‘함께’ 당연시하며 두루두루 퍼져 있었던 것이다. 태일과 친구들의 희망이 허망하게 스러진 배경이다.

돌아보면 임정삼이 전태일을 보는 시선으로 우리는 ‘함께’ 살아오지 않았을까. 1970년 12월 30일, 동아일보 김중배 기자는 ‘근대화의 벅찬 발걸음, 그 응달엔 숱한 생채기가’라는 특집기사를 썼다. 시속 100㎞로 달리게 된 경부고속도로의 개통 이면에, 와우아파트 붕괴, 추풍령 고속버스 사고, 남영호 침몰, 정인숙 의문사, 전태일의 분신을 짚어보며 숱한 죽음의 의미를 묻고 있다.

하지만 이후로도 우리는 뒤돌아보지 못하는 지배 체제 아래 살아왔다. 경부고속도로의 속도와 성장을 누리는 생각의 울타리 속에서 세상을 보며 살아왔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사회구조 속에 고생하고 있다. 최장 노동시간, 고강도 저임금, 산업재해 사망 1위의 사회에서 우연히 살아남고 있다. ‘성장 만능’은 다시 국민소득 4~5만 불 카드를 꺼내어 사람들을 바쁘게 돌리려 한다. 경제 불황에도 2년 국가 예산이 넘게 든 대기업 곳간의 빗장은 굳게 잠겨 있다.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되차지했지만, ‘노동 존중 사회’는, ‘민주주의’는 좀처럼 체감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엘리트 권력층의 잡음과 섞이지 않는 삶, 집요한 물어뜯기가 세상의 전부인 양 TV채널이 고정된 ‘재난의 체육관’에서 살고 있다.

▲영남대의료원장실에 걸린 박정희 초상

영남대 의료원장실에 걸린 박정희의 사진과 성서공단노조 사무실 벽에 걸린 전태일의 사진은 여전히 긴장감을 자아낸다. 물론 아직도 강자는 박정희들이다. 2006년 박근혜 구재단의 영남대 이사진 복귀에 맞춰 영남대의료원은 창조컨설팅과 함께, 노조를 기획 탄압해 900명 조합원이 70명으로 줄었다. 끝가지 싸우다 해고된 간호사 두 사람은 13년이 지난 2019년 현재, 석 달 가까이 병원 옥상에서 태풍 두 개와 모든 날씨를 견디며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2012. 8. 28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전태일재단 방문이 거부된 가운데,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계천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를 찾은 박 후보가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려하자, 김정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바닥에 누워 헌화를 막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2012년 8월,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박근혜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와 협력으로 잘사는 나라를,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 노동자가 잘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전태일재단과 청계천에 있는 태일의 반신상에 꽃을 들고 왔으나 유족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가로막았다. 화해의 전제 조건인 폭력의 인정과 사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해란 무엇인가. 화해(和諧)는 쌀[禾]을 나누어먹고[口], 모두 각자[皆] 말[言]을 한다는 뜻4이다. 화해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분배해 사람을 살리고, 목소리를 가로막지 않아 곳곳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체제의 이행이다. 새 세상의 판을 짜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겨우 맨눈으로 세상의 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구도의 세상이 펼쳐진다. 지금도 매일 노동자들은 죽어나간다. 현장실습장에서 아파트 공사장에서, 오징어 가공업체 탱크에서, 이 땅 곳곳의 일터에서 사람이 죽는다. 누군가의 가족이고 대체 불가한 생명인 청년들, 하청 시민 노동자, 이주 시민 노동자의 죽음은 사회적 무감각 속에 단신 처리된다. 촛불 정부마저 세월호 참사 진실은 물론, 이들의 삶을 아래로부터, 주요 의제로 힘을 다해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화해의 구도가 아니다. 폐기되고 청산되어야 할 것들이 더욱 절망을 강요하는 구도이다.

태일은 절망이 강요된 시간을 온몸으로 거부하였다. 외롭고 힘들었지만,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냈다. 나는 응달진 거리를 태일과 함께 한참 걸었다. 발바닥에 땀이 흥건하다. 걸으며 나눈 대화를 공유할 수 있게 공론장을 나누어준 뉴스민과 독자들께 꾸벅, 명랑하고 유쾌한 몸짓의 전태일식 인사를 드린다. 책에서, 거리에서 뵙겠다. 전태일은 오늘도 걸어와 당신의 창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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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태일 평전〉 개정판(1990, 돌베개) 머리말에서
  2. 노조 결성 인정하라. 하루 16시간을 8시간으로. 매주 하루를 쉬게 하라. 정기 급료를 검토하라. 일 년에 한 번 모든 노동자들 건강 검진. 다락방 철거. 시다 임금 두 배, 고용주 직불. 환기구 충분히 설치/ 고용주들은 이렇게 답했다. 장례일 휴일, 한국노총은 노조 결성에 도움 줄 것, 시장 내 노조사무실 마련 조처, 나머지 조건들은 노동청 지도 아래 실행하기로 한다.
  3. KBS 인물현대사 〈꺼지지 않는 불꽃, 전태일〉, 2003. 인터뷰에서
  4. 고영직의 〈인문적 인간〉 (삶창,2019) 221쪽에서 인용한, 신영복 〈강의〉의 내용을 재인용함.